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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0)화 (30/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0화

잠시 뒤, 응접실에 도착한 나는 아주 거만하게 앉아 있는 칼바도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칼바도스의 시선은 따갑다 못해 띠꺼웠다. 내 지적에 가까운 질문에도 칼바도스는 눈빛을 다듬지 않았다. 대신 비꼬듯이 한마디를 툭 던질 뿐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아, 내가 기분 좋은 게 아니꼬운 거였나? 하지만 정말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눈을 다친 줄 알았는데 멀쩡하더라고. 어제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야.”

전후 사정을 알게 되니 마음이 아주 편해져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 벗기려고 한 게 셔츠랑 바지가 아니라 안대였어?”

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냐고 따지려던 때, 칼바도스가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저 녀석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야? 네 세상을 무너뜨리고 말고 할 정도로?”

“중요하지, 그럼.”

내 세상은 소설의 일부이고, 레이델은 그 소설의 중요 인물이니까.

아무 망설임 없이 답하자 칼바도스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 질문의 꼬리를 물고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나는? 나도 중요한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며 제국의 차기 황제이며 나의 오랜 친우였다. 그러니 답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너도 중요하지.”

“맞아, 나는 정말 중요하지.”

“중요한 거 알면서 왜 물어봤대.”

“네가 종종 나의 소중함을 잊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칼바도스가 조금 전 걷어차인 허벅지를 가리켰다. 자신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한 질문이었나 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칼바도스는 더 위쪽을 겨냥하지 않은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더 위쪽이었다면 후사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미안하긴 한데…… 네가 먼저 나의 청렴함을 잊지 않았던가?”

그러자 청렴은 개나 주라며 칼바도스가 웃었다.

사실 얼마 전에 개한테 줬는데 네 앞에선 어느 정도 필요할 것 같아 다시 뺏어 왔다고 하니, 줬다 뺏는 게 어딨냐며 도로 개에게 가져다주랬다.

그렇게 칼바도스에게 난 청렴을 개에게 갖다준 사람이 되었다.

평소처럼 헛소리를 주고받으며 낄낄대다 보니 꽤 시간이 흘렀다. 칼바도스보다 먼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왔어? 에녹 때문에?”

“……그렇지 뭐. 검술학부에 입학하기로 했다며?”

“응. 오전에 아카데미 쪽 사람이 다녀갔는데 그때 결정했어.”

오늘 오전, 아카데미에 사람을 보냈고, 레이델은 검술학부를 택했다.

그런데 칼바도스가 벌써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소식이 참 빨랐다.

하여튼, 아카데미 쪽은 청렴하고 고결한 척하면서 이곳저곳 정보를 내줬다.

어쩌면 청렴을 개한테 준 쪽은 내가 아니라 아카데미 쪽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그 덕에 셀레네 성적을 알 수 있었지만.’

내가 정보를 얻을 땐 수월했지만, 내 정보도 그렇게 유출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너도 검술학부고 에녹 헤르트도 검술학부네. 가만, 그럼 나 혼자 역사학부잖아?”

“그러네.”

“나 전과할 거다.”

“전과는 아무나 하냐?”

외로워진 역사학부 신입생 칼바도스가 전과를 선언하며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그나저나 검술학부라.’

나는 레이델이 단순한 복수심 때문에 검을 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레이델은 검을 선택했다. 가문에 대한 복수심이 때문이 아니라, 숭고한 영웅의 마음으로.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날씨는 변함없이 추웠지만 그와는 관계없이 아카데미 입학식이 다가왔다.

수석 입학생은 선서를 해야 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아침 일찍 눈을 뜬 나는 칼바도스와 레이델보다 먼저 입학식 장소로 향했다.

‘이 날씨에 무슨 야외 입학식이야.’

입학금이랑 등록금을 그렇게 걷어 가면서 입학식 때 쓸 건물 하나 없어?

라고 따지려고 했지만, 이전번에 카인이 부순 건물이 아직 수리 중이란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3월이지만 아직 날씨가 너무 추웠다.

‘마법 못 하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고. 빨리 보온 마법 좀 걸어 달라 해야지.’

입학식 장소에 가면 마법사가 한두 명 정도는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몸에 달라붙은 추위를 떼어 내기 위해 야외 단상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저기요! 잠시만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나 부르는 건가?’

“저요?”

살며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자,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다가왔다.

‘멀리서 봤을 땐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색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미남이 가까워졌다.

바로 그 순간, 소설 속 어느 등장인물의 이름이 머리를 스치듯 지나갔다가, 되돌아오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보다 자주 불린 그의 애칭이.

‘유리.’

셀레네는 그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율리안 트로이센. 이 소설의 서브 남주. 여주인공 셀레네의 오랜 친구인 그는, 리오스 왕자의 명령으로 셀레네를 감시하다가 셀레네를 좋아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눈앞의 남자를 율리안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직전,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남색 머리에 금안이면 다 서브남이게? 나도 참.’

이쯤 되면 중증이다.

아카데미를 ‘모든 등장인물이 모이고, 주인공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인식한 탓에 괜한 착각을 한 건지도 모른다.

‘소설 묘사랑 비슷하다지만 율리안은 이마에 흉터가-’

바로 그 순간, 가벼운 바람이 불어 정돈된 남자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기다란 흉터가 드러났다.

‘서브남이다.’

누가 봐도 서브남이었다.

그가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소설 속 내용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율리안은 리오스 왕자에게 보내려던 감시 보고서를 셀레네한테 들켜서, 셀레네에게 큰 상처를 준다.

거기에 더해 ‘나는 너보다 왕자님 명령이 우선이야.’라는 발언으로 셀레네에게 2차로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주제에 율리안은 마정석 폭발에 휘말릴 뻔한 셀레네를 밀어내고 대신 죽었다.

‘멍청한 놈.’

그렇게 셀레네를 지키다 죽을 거였으면, ‘너보다 왕자님 명령이 중요해.’ 같은 말은 하지 말지.

어느새 율리안과 나 사이에는 세 걸음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혹시 근처에 담요를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이 있습니까?”

담요?

“담요라면…… 정문 근처에 상점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아, 제 오빠라면 알지도 모르겠어요.”

“오빠분이요?”

율리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나는 그의 뒤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카인을 가리켰다. 하지만 카인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카인을 뒤따라오는 두 명의 파란 머리 남자들이었다.

‘저 파란 실뭉치들은 뭐야?’

하지만 대충 누구인지 알 것도 같았다.

황위 다툼에 끼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던 디아스 공작가의 레반과 로미오 형제였다.

“아까 전부터 등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던데 그 출처가 오빠분이셨군요.”

“이상한 기운이라뇨?”

“등에 화살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내가 머쓱하게 웃자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서브남.’

잘생기긴 했다.

옅은 미소를 띤 서브남주의 얼굴에 감탄하던 때, 정적을 깨고 소년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카인 동생인가 봐!”

“거짓말! 그냥 카인 아니야? 아니면 쥐가 카인 손톱을 먹고 사람으로 변했다거나!”

카인의 뒤를 따라 걸어오던 디아스가의 형제들이 어느새 카인을 앞질러서 뛰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편히 살던 카인은 체력이 저질이라 뛰는 것을 포기하고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사용했다.

형제의 말을 들은 율리안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설마 쥐는 아니시죠?”

“이렇게 아름다운 쥐 봤습니까?”

“아…… 처음 본다고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그때, 바로 옆에서 단거리 이동 마법을 쓴 카인이 나타나 물었다.

“뭐 해, 여기서?”

“이분이 담요를 구할 수 있는 가게를 찾으셔서. 혹시 알아?”

잠시 고민하던 카인이 손가락으로 정문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 정문 쪽 로타가라스 상점에서 담요를 팝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신입생인 것 같은데,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어차피 율리안도 검술학부 학생이다. 둘 중 하나가 휴학하지 않는 한, 보기 싫어져도 3년 동안 꾸역꾸역 마주 보며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왕이면 잘 지내는 게 낫겠지.’

그렇게 카인과 나에게 감사 인사를 한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율리안이 머문 장소에서 눈을 뗀 카인은 스위치를 누르듯이 내 이마의 한가운데를 살짝 눌렀다. 그러자 발끝부터 천천히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

“수석 입학생이 저 사람이었구나.”

율리안이 단상 위에 선 수석 입학생을 바라보며 짧게 읊조렸다. 그러자 그의 옆자리에 앉은 셀레네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조금 전까진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름도 알았어.”

사람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오빠의 손톱을 먹고 사람으로 변한 쥐일지도 모르니까.

“언제 만났는데?”

“아까. 담요 파는 곳을 알려 주셨어.”

율리안은 셀레네의 무릎 위에 덮인 담요를 가리켰다. 조금 전 도움이 없었다면 공주에게 담요를 건네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유리, 너는 춥지 않아? 담요가 커서 같이 덮어도 될 거야.”

셀레네는 두 번 접어진 담요를 펼쳐 율리안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거침없는 공주의 행동에 율리안은 귓가가 붉어진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저분이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라며?”

“어쩜, 소꿉친구와의 로맨스라니!”

단상 위의 여자를 본 학생들 몇 명이 수군거렸다.

“들었어, 유리? 황태자비래!”

“응, 들었어.”

담요에 정신이 팔린 율리안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황태자는 무척이나 용맹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아까 전 여자의 오빠가 자신에게 보낸 그 눈빛을 이겨 낸 것이니 말이다.

성스럽게 느껴지는 은발을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단상에서 내려왔고, 그 모습을 보던 셀레네가 홀린 듯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예쁘다…….”

제비꽃이 떠오르는 보랏빛 눈에는 수석을 향한 작은 동경이 함께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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