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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29)화 (2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9화

칼바도스는 황태자궁에 방문한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디에고가 생각에 잠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벌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먼저 아버지를 부르려던 그때, 디에고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칼, 나는 잘 모르겠구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거운 목소리에 칼바도스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바로 긴장을 풀었다.

“에녹 헤르트를 엘렌시아에게 맡기는 것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황태자가 가장 신뢰하는 친우가 영웅이 된 평민을 극진히 대우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것이며, 귀족들에게 레이델의 존재를 각인하기 좋았다.

또한 레이델의 사정을 알고 있는 엘렌시아가 그를 맡는 것이 서로에게 편했으니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칼바도스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디에고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걱정도 안 되냐, 이놈아!”

“……무슨 걱정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걱정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칼바도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디에고는 그런 칼바도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어 번 내리쳤다.

“어휴…….”

디에고는 믿어 왔다.

지금은 약혼 이야기가 나오면 정색을 일삼는 두 사람이지만, 언젠가는 둘이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저렇게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다가 손잡고 결혼식장에 가는 사람을 여럿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공녀는 에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제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공녀에게 에녹을 맡겼다!

‘어리석은 녀석.’

“엘렌시아가 그 영웅 놈한테 반한 거면 어쩌려고? 어제부터 계속 그놈만 뚫어져라 쳐다보던데!”

“그럼 에녹 경을 설득해야지요? 뒷일은 걱정 말고 어서 도망치라고.”

설득과 도망이 실패한다면, 그자를 애도할 일만이 남은 거고.

디에고는 지나치게 태연한 아들이 미웠다. 이마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황태자비가 되기에 부족한 것 없는 아이가 아니냐. 어렸을 때부터 네 옆에 섰으면 했는데.”

“인성이 부족합니다.”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애롭고, 대등한 자나 윗사람은 잘 물어뜯는 아이니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마땅하지.”

그건 윗사람인 황제가 물어뜯겨 본 적이 없어서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미 어릴 적 물리적으로 팔을 물어뜯겨 본 칼바도스는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디에고와의 대화 끝에, 아버지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칼바도스는 디에고가 챙겨 보낸 온갖 선물들과 함께 공작저에 방문하게 되었다.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갑자기 찾아온 황태자를 익숙하게 맞이했고 선물을 옮겼다. 선물 중 귀한 술 몇 병이 보였다.

‘금주령을 내리셔 놓고, 술을 선물하시면 어쩌자는 건지.’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며 미쳐 날뛸 게 뻔했다.

새해 초, 아버지로부터 같은 병을 받은 칼바도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선물을 다시 살폈다. 그 사이로 아주 오래전,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쳐졌다는 목걸이가 보였다.

칼바도스는 한숨을 쉬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엘은 목걸이 싫어하는데.’

늘 목이 갑갑한 게 싫다며 연회복을 성가셔했고, 목도리도 두르지 않았다. 셔츠 단추 몇 개를 풀기도 했다. 그러니 저 목걸이가 엘렌시아의 목에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황제가 준 것을 함부로 차기 아깝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서랍에 고이 넣어 두겠지.

뒤이어 하인들이 나르고 있는 보라색 원단이 보였다.

‘저건 꽤 잘 어울리겠네.’

칼바도스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칼바도스는 얼굴이 익숙한 하녀 하나에게 친우의 행방을 물었다.

“공녀는?”

“에녹 경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다고 합니다. 응접실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모셔 오겠습니다.”

“마침 에녹 경과 함께 셋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머무는 곳을 알려 주면 내가 직접 가지.”

머뭇거리던 루나의 입에서 레이델이 머무는 방의 위치가 새어 나왔고, 칼바도스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의미 없는 벽지 모양에서 의미를 찾으며 복도를 걷던 칼바도스가 이윽고 레이델이 머무는 방 앞에 다다랐다.

노크는 무시하고 바로 문을 열려던 그때였다.

“왜 안 벗는데! 내가 벗으라잖아! 넌 내 말이 우습지?”

“그게 아니라! 공녀님 일단 진정하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익숙한 친구의 목소리 하나.

그리고 낯설지만 얼마 전 들어 본 영웅의 목소리 하나가 문틈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설마.

‘엘렌시아가 레이델 메릴을…….’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로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칼바도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쟤, 쟤가 드디어 사고를 치는구나!’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정체를 숨기고 평민으로 살아가는 레이델이 공녀의 명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오랜 친구의 부정한 행동을 막기 위해, 칼바도스는 망설임 없이 난장판에 끼어들었다.

*

“그만! 거기까지만 해!”

“네가 뭔데 그만하래? 아니, 넌 대체 언제 왔어?!”

갑자기 문을 열고 쳐들어온 칼바도스가 뒤쪽에서 내 양팔을 붙잡았다.

“……뭐야, 벌써 벗겼어?”

레이델의 상체 노출에 칼바도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안대를 벗기기 위해 붙잡힌 팔을 빼내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칼바도스가 힘을 주어 나를 제압했다.

“네 인성 바닥난 거 내가 잘 아는데, 여기서 바지까지 벗기면 진짜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무슨 개소리야, 넌!”

등 뒤에 선 칼바도스가 나를 들어 올렸고, 그 바람에 공중에 두 발이 붕 떴다.

“이거 안 내려놔?”

“그럼 그만, 윽……!”

나는 그 상태로 한참을 버둥거리다 칼바도스의 허벅지를 여러 번 걷어찼다. 그제야 나는 칼바도스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바지를 벗긴다니……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어젠 리온에게서 술주정뱅이 취급을 당했는데, 지금은 칼바도스에게 난봉꾼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칼바도스의 어깨를 밀었고, 옅은 신음을 내며 허벅지를 매만지던 그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밀려났다.

“나를 무슨 개망나니 취급하고 있나 본데…… 네 발로 직접 걸어 나가고 싶으면 나 볼일 끝날 때까지 응접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나는 힘을 실어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문을 닫았고, 칼바도스의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개망나니 맞잖아……! 넌 지금 황족을 발로 찼어.”

“제발 꺼져!”

내쫓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건지, 문밖에서 칼바도스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허벅지를 얻어맞은 것과는 별개로, 문 앞을 떠나는 칼바도스의 걸음 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일정하면서도 차분한 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차분해지면서 주변이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본 것이 셔츠 사이로 드러난 레이델의 몸이었다.

‘……와.’

피그말리온이 조각했나?

몸이 제법 망측했다.

아주 오래전, 내가 피그말리온에게 의뢰한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해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어렸을 땐 빼빼 말랐던 것 같은데.’

웰링턴에서 관리를 잘한 것 같았다.

어떻게 관리한 거지? 나도 좀 물어볼까?

내 집요한 시선 탓에 레이델이 멋쩍게 몸을 가리자, 나는 뒤늦게 내 실수를 자각했다.

“너는 빨리 옷이나 마저 벗, 아니, 입어.”

뚫어져라 쳐다본 것이 민망해 괜히 레이델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레이델은 나를 등진 채 셔츠 단추를 허겁지겁 잠그기 시작했다.

천천히 해, 천천히.

등을 지고 있었지만 팔이 위아래로 급히 움직이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읏차, 나는 의자 하나에 걸터앉은 채 레이델을 기다렸다.

“메이한테 다 들었어. 그냥 다래끼라고 하지, 뭐 하러 나한테까지 이런 걸 숨겨?”

그랬다면 어제 하루 동안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일은 없었을 거다.

괜히 걱정되게. 그렇게 덧붙이자 레이델이 연회색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당연하지.”

물론, 레이델의 걱정뿐만 아니라 내 걱정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걱정했다는 말에 감동한 것인지 레이델은 순순히 안대를 내주었다.

왼쪽 눈이 심통이라도 난 것처럼 부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눈이 퉁퉁 부어서, 안대를 벗으면 못생겨 보일까 봐 그랬습니다.”

“뭐라고?”

못 들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묻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는 거니까, 조금이라도 고와 보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타고나길 잘난 얼굴은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런데 하필이면 수도에 오기 하루 전날 다래끼가 났습니다. 여기서 더 못생겨지면 공녀님이 싫어하실까 봐…….”

‘저게 잘난 얼굴이 아니라고?’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레이델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겸손한 척은 아닌 것 같고.’

정말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미 자기 얼굴이 잘난 것을 알고 있는 칼바도스와 리온만을 봐 온 탓에, 이런 반응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누가 너한테 못생겼다고 했어?”

있으면 내가 패 줄게.

“옛날에 첫째 형님과 둘째 형님께서-”

“그 사람들은 눈이 발에 달려 있으니까 그 사람들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나중에 목이 떨어질 사람들이니 굳이 먼저 찾아가서 패 줄 필요가 없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충분히 예뻤어. 지금도 그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곱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할 필요 없어.”

“네. 공녀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믿겠습니다.”

레이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안 믿네.’

믿겠다고는 말했지만,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애써 위로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진짜니까 믿어 달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가 얼마나 잘난 얼굴인지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나는 레이델을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순간, 붉은 머리카락이 손끝을 스쳤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끝이 상해 있었다.

“머리끝이 상한 것 같은데, 조만간 미용사를 부를게. 단정하게 입학해야지. 안 그래?”

“예. 공녀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레이델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아까 봤겠지만 새로운 볼일이 생겼거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칼바도스를 만나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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