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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28)화 (2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8화

“이거 물이거든. 나 멀쩡해.”

억울해진 내가 물이 찰랑거리는 병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리온은 본체만체했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발이 저렸다. 발바닥이 조금 찌릿한 것을 빼면 버틸 만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어지러움이 일어 몸이 휘청거렸다.

발을 헛디디기 무섭게 나를 제 품으로 당겨 붙잡은 리온이 귓가에 속삭였다.

“멀쩡하다니요.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연무장에서 리온에게 굴려지면서 체력도 좋고 튼튼한 몸을 가지게 된 나였다.

그래서 리온에게 안기듯 붙잡힌 이 상황이 묘하게 굴욕적이었다.

“그러게요. 평소에 안 이러시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휘청거리시니 더 큰일이죠. 방까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리온은 내 어깨에 걸쳐진 담요로 나를 돌돌 말았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리온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굳이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과한 부축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부축이 너무 과하지 않나?”

“휘청거리면서 걸어가시다가 토라도 하시면 큰일이니까요.”

“아니, 난 물만 마셨다니까? 경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담요 위로 팔을 뺀 내가 리온의 귀를 매만지며 작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뒤섞일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다.

거리를 의식한 내가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리자, 그걸 알아챈 리온이 살짝 웃으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네요. 술 냄새도 안 나고 좋은 냄새만 나요.”

“그럼 나 좀 내려놓지. 내 발로 걸어가게.”

“하지만 휘청거릴 정도로 어지러운 건 사실이잖아요.”

“안 다치고 잘 걸어갈 수 있어. 이건 과보호지.”

“저는 호위입니다. 과보호라고 욕을 먹어도 아가씨가 다치신 다음에 후회하느니 다치시기 전에 과보호를 하는 게 낫습니다.”

태연하게 답하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고집을 부린다. 아니, 이쯤 되니 고집을 부리는 게 나인지 리온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말이나 못 하면…….”

“제 말이 아가씨께 통했다니 다행입니다.”

저렇게 친절한 혓바닥을 가졌으면서 검술 훈련 시간마다 나를 굴리는 놈이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징그러울 정도로 다정함을 퍼붓는 병 주고 약 주기 신공이기도 했다.

결국 저항을 포기한 내가 리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출발. 흔들리면 죽일 거야.”

“네, 네. 침대처럼 아늑하게 옮기겠습니다.”

주방 쪽에 위치한 쪽문으로 들어온 리온은 약속한 대로 아늑하게 나를 옮겼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이런 건가 싶었다.

방에 도착하자 그는 나를 침대 위에 내려 두었다.

그사이에 몸이 아주 잠시 포개졌다가 떨어졌고, 리온은 양파를 까는 것처럼 나를 감싼 담요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바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몸이 차요. 밖이 추워서 그런가.”

그런가. 적당히 추워서 좋았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포근한 이불에 몸을 맡겼다.

“리온,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마침 잠이 안 와서 산책하고 있었죠.”

“지금은? 지금은 졸려?”

방에 혼자 있기 싫은데…… 안 가면 안 되나.

해가 뜰 때까지 같이 있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리온이 딱 적임자였다. 같이 대화를 하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를 테니까.

희한하게도 같은 곳에서 숨만 쉬어도 오해를 사는 칼바도스와는 달리, 리온과는 아무리 오래 붙어 있어도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벼운 언동을 자랑하는 리온이, 이상할 정도로 공작 부부의 묵직한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졸리면 자고 가라는 뜻인가요? 그럼 저는,”

“안 졸리면 여기 조금만 있다가 가란 소리였어.”

“기쁘게도 제가 기사단 내에서 잠 없기로 유명하거든요. 아가씨가 주무시면 그때 나가겠습니다.”

“……못 잘 것 같은데.”

아무리 애써 봐도 잠을 잘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러자 리온이 바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에 등을 기댄 그가 다정하게 물어 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사람 같지 않은 이질적인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냥 요즘…… 자꾸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라.”

하지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리온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아.’

고민을 털어놓는 주제에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짧은 상황 설명 같았기에 나는 설명을 추가했다.

“당연하게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막으려던 일이 기어코 일어났어. 그래서 그것들 때문에 앞으로 생길 다른 일들을 망치게 될까 봐 겁이 나.”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포기하실 건가요?”

“그건 아닌데, 그냥 불안해서.”

만약에, 내가 막으려던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이를테면 레이몬드의 죽음이라든가.

소설과 달리 레이몬드는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아직 후작가의 영역에 있는 그가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레이몬드가 소설 속 이야기대로 후작의 손에 죽게 된다면, 레이델은 형을 후작가로 돌려보낸 나를 원망하겠지.’

이렇게 되면 과정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의 죽음과 레이델과 나의 갈등이 형성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레이몬드가 죽고 레이델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내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가만, 그런데 이건 엘렌시아 같은 악역이나 고를 법한 선택지 아닌가? 이래서야 소설 속 그 악당과 달라질 것이 없었다.

스스로가 던져 놓은 선택지에 실망하려던 그때,

“바꿀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변화를 확신하는 굳건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단순한 위로의 표현이라고 하기엔 그 눈빛의 깊이가 깊었다. 리온은 어느새 녹은 손으로 내 손의 끝마디를 붙잡았다. 그리곤 제 손의 온기만큼이나 따스하게 말했다.

“당신이 변했잖아요. 그럼 다른 것도 차차 바뀌겠죠.”

내가 변했다니, 리온은 그 누구보다도 나의 변화를 확신하고 있었다.

리온의 말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그가 말을 이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너무 겁먹지 말고, 포기하지도 마세요. 앞으로 아가씨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게 아가씨 뜻대로 될 테니까.”

헛소리만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리온이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한 리온이 언제나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사람을 홀릴 법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반하셨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헛소리 진짜 잘하는구나.”

“역시 반하셨구나.”

“어쩜, 개소리까지 잘해.”

정말 반했다는 듯이 박수를 치자 귓가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반했냐고?’

반했냐고 꼬치꼬치 캐묻지만 않았어도 반의반 정도는 반했을지도 모른다.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갑작스럽게 피곤함이 몰려왔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완전히 눈이 감겨 완벽한 어둠이 밀려오기 직전, 리온이 성스러운 목소리로 기도하듯 말했다.

“오늘 하루도 당신이 당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날 아침, 나는 생각보다 개운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오후 2시, 웰링턴에서 지내던 메이가 시즈와 함께 돌아왔다. 20대 초반에서 후반이 되어 돌아온 그녀는 오른쪽 팔에 붕대를 감은 상태로 그동안의 일을 보고했는데, 웰링턴에서의 생활은 지겨울 정도로 평범했다. 레이델이 사람들을 구하겠다며 검을 들고 뛰쳐나간 것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더 들을 필요가 없어 나는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시몬 왕국 쪽으로 정보원을 보낼까 하는데, 혹시 추천할 사람이 있어?”

후작가엔 이미 사람을 심어 뒀다. 이제 문제는 시몬 왕국 쪽이다.

셀레네의 행동이 변했으니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왕국 상황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메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오른손이 아닌 왼손의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었다.

“임무에 적합한 사람을 둘 알아요. 왕국어도 가능하고요.”

“그래?”

자세히 이야기하란 의미로 되묻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상인인데 이전에 정보원으로 일한 적이 있고, 남은 한 사람은…….”

“남은 한 사람은?”

“접니다.”

“네가 가겠다고?”

“네. 저를 보내 주세요.”

나는 잠시 동안 말없이 메이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오른팔에 길게 머물자, 그녀가 제 팔을 매만졌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금방 나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메이가 시몬에서 넘어왔댔지. 이상할 정도로 시몬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시몬에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아 결정을 미루고 말을 돌렸다.

“그 얘긴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고…… 혹시 레이델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줄 수 있어? 안대를 하고 왔던데.”

어쩌다가 눈을 다친 건지 레이델이 통 입을 열지 않아 답답했는데, 메이라면 솔직한 답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답답함도 해소되겠지.

나는 메이의 입에서 나올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시원하게 말했다.

“아, 수도에 오기 하루 전날 다래끼가 나서요.”

“?”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뭐가 났다고?”

“다래끼요. 그 모습으로 아가씨를 뵐 순 없다고 온갖 난리를 다 피우더니 어디서 안대를 하나 구해 와서는-”

“이런 미친놈…….”

“네?”

“미친 거 아니야?”

‘안대를 쓴 게 다래끼 때문이었다고?’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어제 내내 내가 한 고민은 도대체 뭐였는데?

간단하다. 쓰레기였다.

그래서 나는 어제 하루 동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레이델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찢듯이 열어젖혔다.

“공녀님……? 갑자기 여긴 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는지 셔츠 단추가 죄다 풀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다급한 손길로 옷을 여몄다.

회빛 눈동자를 가린 검은 안대를 보자마자 짜증이 났다.

“너 이 자식, 그거 당장 안 벗어?”

“예?”

안대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자, 레이델이 옷을 여미던 손을 놓고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안, 안 됩니다!”

레이델은 처절하게 외쳤지만 나는 그 외침을 무시하고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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