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7)화 (2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7화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 하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살폈다.

“공녀, 괜찮으십니까? 손이 떨리는 것 같은데. 추우신 거면…… 마법사를 부르라 할까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불안감에 손이 계속 떨렸다.

금주령, 칼바도스와의 약혼설, 셀레네의 문예창작학부 합격, 다른 빙의자가 존재할 가능성, 메이와의 연락 두절 등 얼마 전부터 신경을 긁는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불안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눈이 왜 저래.’

분명 눈을 다치기 전에 레이델을 구했는데, 그가 눈을 다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를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결과가 발생했다.

‘이게 우연일까?’

나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칼바도스를 죽이고 루카스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전개를 틀어도, 어떻게든 소설의 이야기를 유지하려는 ‘절대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가만, 그럼 셀레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셀레네는 역사학부가 아닌 문예창작학부에 입학했는데. 소설대로 셀레네가 역사학부에 갈만한 방법이…….

‘설마 전과하나?’

결국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 나는 원래대로 한쪽 팔이 잘린 채 교수대로 끌려가게 생겼네.’

아니지. 실명이 아니라 조금 긁힌 상처일 수도 있잖아?

아직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레이델한테 직접 물어보자. 그래야 이 불안함의 불씨를 꺼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레이델을 향한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새 단상에 오른 그는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아닌 황제 디에고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웰링턴의 수호자여, 사악한 괴수를 쓰러뜨리고 제국민들을 구한 용맹한 그대에게 ‘헤르트’라는 성을 내린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 그대가 걷는 길에 태양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무한한 영광입니다, 폐하.”

“에녹 헤르트. 제법 근사한 이름이지 않은가?”

황제가 공을 치하하자, 거리의 사람들이 환호했다. 황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레이델의 어깨를 격려하듯 가볍게 두드렸다.

“또한, 그대에게 아카데미에 입학할 기회를 주겠다. 이리 귀한 인재가 여유가 없어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니, 3년간 황실에서 장학금을 지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황제 폐하 사랑해요를 외쳤고, 나는 말없이 박수를 칠 뿐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벗겨야지.’

머릿속엔 레이델의 안대를 벗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황제의 뒤쪽에 서 있던 칼바도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헤르트 경이 머물 곳을 생각해 보았는데, 제가 가장 신뢰하는 친우인 리베르트 공녀에게 헤르트 경의 거처를 맡길까 합니다.”

칼바도스가 유독 친우라는 발음에 힘을 주었다.

잘한다, 친구야!

좋아하는 건 아니고, 적당히 사랑한다 친구야!

외간 남자를 약혼녀의 집에 맡길 리 없으니 나와 칼바도스의 약혼이 개소리라는 걸 어느 정도 보여 준 셈이다.

“……리베르트 공녀에게?”

“예.”

“흠, 그래. 그렇게 이르거라.”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바도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어떤가, 리베르트 공녀? 내가 그대에게 헤르트 경의 거처를 맡겨도 되겠는가?”

자애로운 황태자와 오랜 벗의 미소를 걸친 칼바도스가 내게 물었고,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전하의 믿음에 답하는 것이 친우이자 신하인 저의 역할입니다.”

나 역시 같은 미소로 답했다.

둘만 있을 땐 이 새끼야, 저 새끼야 하다가도 사람들 앞에선 황태자 전하, 리베르트 공녀 하며 점잔을 떨어 대는 사이였다.

서로의 가식에 질린다는 듯 미소 짓는 것도 잠시, 레이델의 눈을 확인할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

공작저에선 영웅 에녹에게 최고의 대우를 했다.

영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황태자가 직접 맡긴 손님이었으니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맞았다.

에녹이 공작저에 머문다는 연락을 받은 고용인들은 내가 지정한 방을 깔끔하게 정돈해 둔 상태였다.

“내가 직접 안내할게.”

나는 말없이 복도를 걸었고, 레이델 역시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영웅을 마주한 고용인들의 탄성과 수군거림만이 들릴 뿐이었다. 입학 전까지 레이델이 지낼 방에 도착한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섰다.

“여기가 레이몬드 님이 머무시던 방이야.”

레이델이 따라 들어온 것을 확인한 내가 문을 닫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레이델을 마주하자, 검은 안대가 눈을 사로잡았다.

깜깜한 게 꼭 내 미래 같았다.

“눈은 왜 그래?”

“별거 아닙니다.”

내가 담담하게 묻자 그 역시 담담하게 답했다.

별거 아닌 상처면 레이델이 안대를 낄 리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상태를 좀 봐야겠는데.”

초조해진 내가 손을 뻗자, 그는 내 손을 쳐 내는 대신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 흉할 겁니다.”

“치료는 했어? 의원에게 가 봤고?”

“보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망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구나.

‘미쳤어, 차라리 팔이 부러져서 돌아오지! 이 망할 놈아!’

차라리 팔이나 다리를 다쳐서 왔다면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 않았을 텐데.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레이델이 왜 하필 눈을 다친 건지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결국 레이델은 소설 그대로 눈을 다쳤고, 나는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그래. 억지로 벗기려고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나는 미련 없이 안대를 향한 손을 거두었다.

사과를 한 건 내 쪽이었지만 레이델은 꼭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레이델은 놀랐고 나는 사과했다. 사과받은 어린 레이델은 지금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갑자기 신문에 네 이름이 나와서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잘했어. 어쨌든 마을 사람들을 구한 거잖아.”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레이델은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상을 줄 때도 안 웃더니. 지금은 웃네.’

처음부터 이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델의 눈에서 신경을 끄자, 다른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로 높게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머리가 나보다 긴 것 같아. 왜 기른 거야?”

얘 장발 캐릭터 아닌데.

“……예쁘다고 해 주셨잖습니까.”

‘나는 그냥 네 머리가 장미 같기도 하고, 단풍 같기도 해서.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나 봐.’

‘장미가 피는 날에는, 단풍이 드는 날에는 그럼 제 생각이 나실까요.’

‘응. 그럴 거 같아.’

분명,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내 말 하나만으로 머리를 길렀다고?

“작년에는 장미가 피었고, 단풍이 들었습니까?”

“응.”

“그때, 제 생각을 조금은 해 주셨을까요?”

“물론이지.”

매달 메이에게서 보고가 들어오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후작가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레이몬드와 레이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레이델과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장미가 피었을 때도, 단풍이 들었을 때도, 나는 네 생각을 했어. 이제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영웅인 너를 기억할 거야.”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던 어느 날처럼, 레이델이 수줍게 웃었다. 그러다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무언가를 다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공녀님께서 저를 떠올려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푹 쉬어.”

나는 따라 나올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레이델의 방을 나섰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복도를 지나치며 레이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충분하다고?”

레이델은 내가 그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그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레이델은 눈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내 앞날을 걱정할 일도 없었겠지.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를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없는 내가 싫었고, 나를 걱정하기에 바빠서 다친 그를 순수한 마음으로 걱정할 수 없는 내가 싫었다.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하는데.’

어쩐지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불안감에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든 나는 ---같은 악몽을 꾸었다.

한쪽 팔이 잘린 내가 카인과 나란히 교수대 위에 선 꿈이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발밑이 허전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허공에서 버둥거리다 죽음의 경계에 발을 걸쳤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눈이 번뜩 떠졌다.

“에이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낮게 욕을 읊조리며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치웠다.

턱 끝까지 덮인 이불이 갑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목걸이를 꺼렸고, 목을 덮는 옷을 오랜 시간 입고 있기 어려웠다.

악몽 때문일까, 오늘은 유독 목을 스치는 머리카락까지 거슬릴 정도로 몸이 예민했다.

‘다시 잠들긴 글렀어.’

칼끝처럼 날카로운 시곗바늘이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겨우 잠들더라도 얼마 안 지나서 눈을 떠야 하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산책이나 할까…….”

조금 전부터 방 안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저택 밖은 춥겠지만 방 안에 혼자 있기 싫었다.

‘산책을 하면 정신도 맑아지겠지.’

결국 나는 커다란 담요 하나를 걸치고, 주방에서 물 한 병을 챙겨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어릴 적 카인과 뛰어놀았던 나무에 기대앉았다.

“오빠는 잘 지내려나.”

여기서 더 부수고 다니면 어머니가 화내실 텐데.

병을 열어 입안에 물을 가득 머금은 그때, 정원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이 느껴진 곳엔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리온?”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지?

“경.”

“리온.”

여러 번 불렀지만 리온은 나를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저게 사람을 투명 인간 취급하네.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 나랑 눈도 마주쳤으면서…….”

그러자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내 말이 투정처럼 들린 것인지, 리온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금주령도 아직 안 풀리셨는데, 여기서 이렇게 주정 부리시는 거 들키면 큰일 나요. 제가 망을 보고 있을 테니까 얼른 마저 토하고 들어가시죠.”

‘망할 놈아.’

투정이 아니라 주정인 줄 알았나 보다.

차라리 진짜 술을 마셨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황제의 명령까지 어기고 술을 퍼마신 주정뱅이 취급을 받으니 조금 억울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