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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26)화 (26/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6화

금주령이 새해 액땜이라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오히려 액을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칼바도스와 약혼설뿐만 아니라 레이델의 신변 노출이라니. 전자는 최악이었고, 후자는 좋은 상황이라 볼 수 없었다.

[웰링턴의 수호자, 에녹!]

웰링턴에 나타난 괴수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을 지킨 레이델의 이야기가 제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다.

작고 고립된 마을에 나타난 괴수, 죽어 가는 마을 사람들과 괴물에 의해 파괴되는 마을. 용맹하게 칼을 뽑아 괴물과 맞서 싸워 사람들을 수호한 용사.

그냥 용사는 또 아니다. ‘젊고 잘생긴 평민’ 용사다. 그래서 제국민들이 더욱 환호했다.

그리고 황제는, 영웅인 에녹의 공을 치하하고 작위를 수여하겠다고 말했다. 제국민들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덕분에 숨어 살던 레이델은 아주 화려하게 꽃가루를 맞으며 수도에 입성할 예정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사실, 정말 잘한 일이긴 했다.

사람들을 구하고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막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메릴 가문이 건재하다.

후작가 쪽에선 레이델이 죽었다고 믿지만, 내내 레이몬드를 신뢰하지 못했던 렘브로가 영웅 에녹을 보면 이상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레이델이 살아 있다는 걸 들키면, 레이몬드는 다시 의심받을 거야.’

메이가 레이델과 함께 웰링턴에 함께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내 쪽에도 문제가 생길 테고.

나는 돌돌 말은 신문 하나를 손에 꽉 쥔 채 책상을 탁탁 내리쳤다.

얼마 전엔 셀레네의 성적을 보고 종이를 구긴 것 같은데, 오늘은 신문한테 괜한 화풀이 중이었다.

종이에게 화풀이하는 날이 늘고 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레이델이 웰링턴의 수호자가 된 덕에 나와 칼바도스의 약혼설이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왜 갑자기 그런 괴물이 튀어나왔지?’

소설엔 그런 괴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레이델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소설 속 레이델은 이런 정의로운 성격이 아니다. 칼바도스는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이었지만 레이델은 그렇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죽고 밑바닥에서 실컷 구른 레이델은 어느 정도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칼바도스와 달리 입도 조금 험했다.

칼바도스가 반듯하다면 레이델은 복수심에 의해 움직이는, 조금 삐뚤어진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의 칼바도스는 나에게 선하고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 주지 않지만 말이다.

“일단 레이델에 대한 건은 칼바도스랑 논의를 좀 해 봐야겠는데…….”

어차피 레이델이 작위를 받을 때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테니. 그날 칼바도스와 이야기를 나눠도 늦지 않았다.

*

영웅의 공을 치하하는 날, 나는 조금 일찍 황궁으로 향했다.

오늘도 평소처럼 말끔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칼바도스가 황태자궁에 쳐들어온 나를 보며 물었다.

“11시에 시작하는데 왜 벌써 왔어?”

“우리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그렇게 말한 뒤, 칼바도스의 옷을 세심하게 훑은 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칼바도스의 브로치와 내 브로치가 무척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칼바도스의 브로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브로치 바꿔라. 내 거랑 색이 겹치잖아. 디자인도 비슷하네.”

누가 보면 일부러 맞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자 칼바도스가 특유의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네가 바꿔.”

“나한테 더 잘 어울리니까 도스 네가 바꿔.”

“유감이지만 난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꾸기 싫거든. 그러니까 엘, 네가 바꿔.”

둘 중 하나가 브로치를 빼면 해결될 일이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머리가 못됐다.

대화가 유치해지기 시작하면서 둘 중 누가 브로치를 포기하냐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내 보석함은 공작저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바꿔. 네가-”

“내가 지금 하나 선물하면 되겠지.”

칼바도스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달칵, 하고 열린 상자 안에는 신비로운 느낌의 보라색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그가 내 쪽으로 상자를 들이밀며 징그러울 정도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의 성의를 봐서라도 네가 바꿔. 이런 황태자 없다.”

‘딱 봐도 자기가 보라색 싫어하니까 나한테 선심 쓰는 척 넘기는 거네.’

브로치 하나 차지하겠다고 선물까지 하는 게 어이없어서 결국 내가 브로치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 뭐…… 다시 보니 오늘 칼바도스의 의상에는 저 사파이어 브로치가 딱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브로치를 바꿔 끼웠고, 목표를 달성한 칼바도스가 흡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싱그러워서 짜증이 치밀었다.

‘재수 없는 새끼.’

내가 칼바도스를 째려보기 무섭게 그가 입을 열었다.

“자, 중대한 문제가 해결됐으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지. 영웅 이야기를 하러 왔다니?”

아, 그렇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레이델의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을 잊을 뻔했다.

“영웅 에녹에게 내리는 정확한 포상이 뭐야? 작위 말고는 통 알려진 게 없어서.”

행사 전까지 레이델을 만날 수 없었고, 작위를 제외한 다른 포상에 대한 정보를 알기 어려웠다.

“아카데미 특례 입학. 우리랑 동갑인데 입학시험을 안 쳤길래.”

답을 듣자마자 표정이 구겨졌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습관처럼 미간 주름을 꾹꾹 눌러 폈다.

‘특례 입학이라니…… 애초에 걔가 시험을 왜 안 쳤는데!’

포상 후 웰링턴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아니고, 아예 레이델이 수도에 머물게 생겼다.

이참에 레이델을 꽁꽁 숨겨 둔다는 계획을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왜, 숨겨 둔 연인이라도 돼?”

우리 만나는 사람 생기면 서로 가장 먼저 말해 주기로 하지 않았나? 일그러진 얼굴을 한 칼바도스가 그렇게 덧붙였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그 녀석은 왜?”

칼바도스는 아직 에녹이란 영웅이 메릴 후작의 막내아들인 ‘레이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차피 칼바도스와 레이델이 만나게 된 거, 지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리 어렸을 때, 메릴 후작저에 화재가 났던 거 기억해?”

“당연하지. 건국제였잖아. 그때 화재 사고로 죽은 게 후작의 막내아들이었고. 이름이 레이델 메릴…… 우리랑 동갑이었지.”

정확히는 레이델이 제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한 것으로 위장했다. 하지만 후작가에선 단순한 화재 사고로 일을 덮었다.

아.

짧은 탄성 끝에 칼바도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9년 전 화재 사고를 언급하자마자 답을 찾은 거다.

“……하, 말도 안 돼.”

상황을 파악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네가 그 녀석을 웰링턴에 숨긴 거야? 하지만 우린 그때 여덟 살이었잖아.”

정확히는 너만 여덟 살이었다.

나는 칼바도스와 반대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 레이몬드님이 공작저에서 일하고 계셨잖아. 사생아인 동생을 가여워하셨고, 나랑 거래를 했어. 내 쪽에서 레이델을 보호하는 조건으로 그분께선 내부 고발을 약속한 거야.”

“레이몬드 메릴을 박쥐라 부르는 사람들이 알면 기절하겠군.”

사람들은 후작을 배신하고 리베르트 공작의 편에 선 레이몬드를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라 부르곤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후작저로 돌아간 레이몬드를 ‘박쥐’라고 불렀다.

아까보다 차분해진 칼바도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확실히. 자식이 부모의 비리를 고발한 뒤 작위를 계승한 사례가 있었지. 작위를 강등당하긴 했지만.”

대표적인 사례가 ‘사샤의 고발’이었다.

딸 사샤가 부모님을 비리를 고발한 뒤 작위를 계승한 것이다. 같은 사건을 생각한 것인지 칼바도스가 물었다.

“넌 레이몬드 메릴을 제2의 사샤로 만들 생각이지?”

“아니. 사샤는 내부 고발 후 독살당했잖아.”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발만 성공했다고 끝이 아니니까. 레이몬드는 그의 선한 이미지를 강조하며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했다.

“그럼 이 기회에 에녹이라는 영웅을 적절하게 써먹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어. 이번에 있었던 레이델의 활약은 메릴 가문 재건에 도움이 될 테니까.”

처음엔 레이델의 신변 노출에 당황한 나였지만, 점점 생각이 변했다.

‘어차피 노출됐고 꽁꽁 숨겨 두긴 글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예쁘게 포장해서 사람들 앞에 선보이자.’라는 심보였다.

레이몬드가 내부 고발을 한다면, 후작가는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레이몬드 혼자 후작가를 뜯어고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레이델의 존재가 필요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레이델이 괴물을 죽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작가에서 레이델의 생존을 눈치채는 건 둘째 치고, 레이델의 얼굴이 공개된 마당에 써먹을 건 다 써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친김에 황태자의 최측근으로 만들어 버리자.’

황태자가 촌구석에 살던 평민을 최측근으로 거두었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출생의 비밀이 있다네?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했다고?

그런데 박쥐 같은 레이몬드가 그 동생을 숨겼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내부 고발까지 했다고?

황태자와의 순수한 우정, 형제애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거다.

잠시 뒤 시종의 노크가 들렸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칼바도스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말했다.

“그럼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그 녀석의 거취 문제는 너한테 맡기는 게 낫겠다.”

“그래. 내 쪽에서 환영이지.”

“그렇다고 너무 환대하지는 말지. 샘나니까.”

라고, 공작저에 올 때마다 천대받는 칼바도스가 말했다.

“이만 가자. 시간 다 됐어.”

칼바도스는 장난처럼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후려쳤다.

*

포악한 괴물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한 에녹을 위해 거리는 평소보다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사람들의 볼이 붉었다. 추위 탓에 붉은 것인지, 한껏 들뜬 탓에 붉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행사에 참석한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단상 위 의자에 앉았다.

미리 공지된 대로 저 멀리, 황실 사람들과 함께 말을 타고 들어오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타오르는 듯한 자신의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기절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뭐야, 쟤 왜 저래?’

소설 속 외눈 검사 레이델은 형제들의 학대로 왼쪽 눈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레이델이 학대로 눈을 다치기 전에 그를 구했다.

하지만 지금,

‘왜 눈을 다쳤지?’

의젓한 모습으로 말 위에 오른 레이델은 그의 왼쪽 눈에 안대를 두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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