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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25)화 (25/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5화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시즈가 가져온 아카데미 신입생 입학 성적 목록을 본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몇 등이야?’

소설에선 전체 수석을 차지했던 여주인공 셀레네의 성적이 뚝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에서 48등? 이거 진짜야?”

“네…… 그렇더라고요.”

나와 칼바도스가 공동으로 수석을 했으니 셀레네의 이름은 3등의 위치에 적혀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 셀레네의 이름은 첫 번째 페이지가 아닌 두 번째 페이지에 실려 있었다.

48등이라니…… 말도 안 돼.

“시즈, 아카데미 입학할 때 몇 등 했어?”

“저는 14등이요.”

에헴, 하고 시즈가 가슴을 폈다.

비록 5년 전이긴 하지만 우리 시즈 경이 14등을 했다. 그런데 조연도 아닌 여주인공인 셀레네가 48등이라니.

‘설마 밀려 썼나?’

아니면 공부를 안 했다거나.

하지만 아예 손을 놓은 성적은 아니었기에 애매한 성적이었다.

문제는 셀레네의 성적만이 아니었다.

문예창작학부?

“이게 무슨…….”

믿기 힘든 현실에 종이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적뿐만 아니라 셀레네가 지망하는 학부 또한 달라졌다.

‘셀레네는 칼바도스와 같은 역사학부 신입생이어야 해.’

하지만 지금, 종이에는 전혀 다른 학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종이 한 장을 지나치게 오래 응시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시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여주인공 성적이 뚝 떨어졌어. 우리 공주님이 내 생각보다 공부를 안 하셨나 봐. 그리고 역사에 흥미를 잃으셨나 봐. 그 공주님은 역사를 내던지셨으니 미래도 없으실 거야, 아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시즈에게 고개를 저으며 이만 자리로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시즈는 구석에 있는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고, 몇 번이고 셀레네의 성적을 보다가 심란해진 나는 결국 명단을 접어 버렸다.

‘왜 이렇게 됐지?’

나는 셀레네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 셀레네의 행동은 소설과 아무 변화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셀레네는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달라졌지?’

그 순간,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설마 누가 셀레네 몸에 빙의했나?’

지금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말은 틀렸다.

나도 빙의했는데 다른 사람은 못 할 게 또 뭐란 말인가.

셀레네에게 빙의한 게 아니면, 셀레네의 주변 인물로 빙의한 누군가가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거나.

셀레네는 주변 사람의 입김에 약한 캐릭터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셀레네가 다른 선택을 하도록 유도했을 수도 있다.

‘설마 진짜 다른 빙의자가 있나?’

그래서 내가 아는 정보에 혼선이 생긴 거고?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만약 나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 그 사람을 찾아내서 없애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는 정보가 줄어들고 지금처럼 예상 못 한 변수가 생길 테니까.

셀레네의 입학시험 성적도 낮아졌고, 지망 학부도 달라졌다.

그 결과 남주인공인 칼바도스가 셀레네의 모습을 각인하는 장면도 사라졌고, 같은 학부에서 생기는 알콩달콩 이벤트도 완전히 사라졌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셀레네의 변화에 대해 나름대로 여러 가설을 세워 봤지만, 나는 명확한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영역이 등장하면서, 보이지 않는 불안함이 내 안에 제 존재를 각인시키듯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셀레네의 성적 하락 말고도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메이에게서 연락이 없어.’

레이델과 함께 웰링턴에 머무는 메이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메이는 그동안 한 번도 착오 없이 일을 해냈다. 작은 일로도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내가 직접 가 볼까? 아니면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거나…….

하지만 마차를 타고 웰링턴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래서 저택에 이동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가 필요한데.’

슬프게도 계절학기 수강생인 카인은 겨울에도 아카데미 기숙사를 사용하는 중이라 저택에 없었다.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의 상황은 이렇다.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황실 마법단에 소속되어 있고, 귀족가나 황실 휘하 기관에 취직한다. 그리고 나머지가 마탑에 가는데…… 최근엔 재정난인 마탑 쪽에서 황실에 빚을 진 상황이라 독립 기관이었던 마탑마저 황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현재 공작저에 남아 있는 마법사 인력이 없다는 것이다. 북부에 문제가 생겨서 죄다 그쪽으로 보냈다.

‘급한 대로 황실 쪽 기관이라도 가야 하나?’

하지만 황실 기관을 통해 이동 마법을 쓰면 기록이 남는다.

마법사와 기록관은 누가, 어디에, 왜 방문하는지 그 외 모든 것을 철저히 기록한다.

공녀인 내가 후작가의 영지인 웰링턴에 방문할 이유는 없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누가 들어도 수상하다.

‘에이씨…… 황실 놈들 더러워서 진짜.’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는 게 좋았지만, 그게 어려우니 돈을 주고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공작저에 웰링턴 쪽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어?’

바로 그때, 구석에 앉아서 극단 관련 서류를 보는 시즈의 모습이 기적처럼 눈에 들어왔다. 쉽게 예전 기억을 되살린 내가 물었다.

“시즈, 고향이 웰링턴이라고 했던가?”

“아, 네!”

무대에 선 배우처럼, 시즈의 머리 위로 밝은 조명이 켜지는 것만 같았다.

‘잘됐다.’

이동 마법으로 시즈를 직접 웰링턴에 보내서 메이와 레이델의 근황을 확인하면 된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목구멍에서 아주 다정하고 고운 목소리를 꺼냈다.

“고향이 그립지는 않아?”

그러자 시즈가 아주 해맑게 답했다.

“저는 고향이 싫어서 수도로 온 거라서요. 하나도 그립지 않아요! 향수병 같은 거 안 걸리니 걱정 마세요!”

시즈의 걱정을 한 게 아니었다.

“집에 가서 부모님 좀 뵙고 오지 그래? 고향에 안 간 지 꽤 되지 않았나? 내가 기관 쪽에 연락해서 이동 마법으로 보내 줄게.”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요……. 그래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즈를 신경 쓴 것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곱게 보낼 여지를 주지 않고 철벽 방어를 자랑했다.

‘저게 진짜…… 곱게 보내려고 했더니.’

“됐으니까 그냥 가.”

“네…….”

고향도 싫고 부모님과 사이도 나쁘다는 것이 사실이었는지 시즈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도 어쩌나. 이런 일을 시키려고 고용한 수행원이니 돈 주는 만큼은 일을 시켜야 했다.

안 하면 그게 직원인가, 도둑이지.

손을 까딱이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시즈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조금 전 아카데미 성적 목록을 건네주었을 때와 같은 자리에 서서 물었다.

“……웰링턴에 무슨 일이 있나요?”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 그 마을에서 지내고 있는데, 매달 오던 편지가 뚝 끊겨 버렸어. 지금 사는 곳을 알려 줄 테니까 잘 지내는지 확인 좀 해 줘.”

“소중한 사람이요?”

시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연락 하나 끊겼다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몰래 사람까지 보내서 살피는 게 알려지면 엄청 쪽팔릴 것 같아. 내가 웰링턴에 직접 가는 것도 이상하지. 그러니까 기관 쪽엔 네가 고향에 방문한다고 하고 다녀와.”

어차피 시즈는 메이를 모르니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공녀님께 소중한 분이라니…… 제가 잘 확인하고 올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분명 잘 지내고 계실 거예요.”

나는 시즈에게 메이의 외양과 집 위치를 알려 준 뒤, 메이와 레이델에게 줄 물건을 가득 들려서 웰링턴으로 보냈다.

얼마 뒤, 웰링턴으로 시즈에게선 메이의 상황을 설명하는 연락이 왔다.

[소중한 분이 여자였어요? 난 또……. 음, 산에서 사냥 중 구르셔서 부상을 입으셨는데, 의식이 없으셔서 연락을 못 하셨나 봐요. 오늘 아침에 겨우 눈을 뜨셨어요. 지금도 붕대를 칭칭 감고 계십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래요. 그런데 이분께서 자꾸 공녀님께 직접 편지를 쓰겠다고 노려보시는데요…… 저 너무 무서워요. 아, 참! 말씀하신 에녹이란 이름의 남자분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메이가 크게 다친 게 아니라는 말과 메이와 레이델이 잘 있다는 소식에 안도한 것도 잠시, 다음 날 도착한 소식에 나는 머리를 싸맸다.

시즈가 메이를 만난 바로 다음 날, 웰링턴에 괴수가 나타난 것이다.

*

남부의 웰링턴에 괴물이 나타났다.

소의 얼굴을 하고 인간의 몸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 갑자기 바다에서 솟아오르듯 나타나 인근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마을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순간,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등장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 남자가 바로 레이델이었다.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감춘 그는, 괴물의 발뒤꿈치를 공격하여 괴물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눈을 공격한 뒤, 괴물의 목을 잘랐다.

그래, 여기까진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그다음이었다.

나는 책상 위를 꽉 채운 신문들을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각기 다른 신문사였지만 하는 이야기는 모두 비슷했다.

[충격! 웰링턴에 괴수 출몰……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어.”]

[절체절명의 순간, 영웅 등장!]

[괴물과 맞서 싸운 청년 ‘에녹’. 그는 누구?]

망할 레이델.

펼쳐 보는 신문마다 레이델의 이야기와 그를 향한 찬사가 가득했다.

‘예. 죽은 듯이 조용히. 그렇게 살겠습니다.’

올해 초, 레이델은 그렇게 내 지시에 대한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카데미 입학시험도 응시하지 않은 그였다.

“이 자식 이거, 조용히 살겠다더니…….”

포부와는 다르게 세상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에녹, 영웅의 숨 막히는 뒤태와 아찔한 복근]

“이건 또 뭐야…….”

성인이 된 레이델의 모습이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이렇게 접하긴 싫었다.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펄럭거리던 나는 곧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이상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웰링턴에 괴수가 나타나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없었던 일이 생기고 있다.

새해 첫날에 내려진 금주령부터, 모든 일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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