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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24)화 (2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4화

리온, 그리고 개인 수행원 시즈와 함께 작은 마차를 타고 끔찍하게 사랑하는 약혼자인 칼바도스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거지 같은 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은 둘째 치고,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소설 『달의 미로』에서, 셀레네는 수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왜 나랑 칼바도스가 공동 수석이지?’

나는 셀레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니 셀레네의 행보는 소설과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럼 변화가 칼바도스 쪽에 생겼다는 건데…….

‘허구한 날 놀기만 했는데 칼바도스의 성적이 더 올랐다는 건가?’

공부 시간은 줄었는데 성적은 올랐다.

‘루카스를 견제할 필요가 없어져서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걸지도 몰라.’

원래 초조할 때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시도하면 망하는 법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달라진 건가?

루카스뿐만 아니라 엘렌시아를 견제할 필요가 없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셀레네의 신입생 입학 선서 장면이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수석으로 입학한 셀레네가 단상 위에서 선서하는 그 장면은, 칼바도스가 처음으로 셀레네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수석에서 밀려난 거니까…… 차석인가.’

아니지, 나와 칼바도스가 공동으로 수석을 해 먹었으니 3등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성적을 확인해 볼까.

살짝 창을 열어 보니 수행원 시즈의 집 근처였다.

“집이 이 근처라고 했지? 여기서부턴 리온 경과 둘이 갈 거니까, 그냥 퇴근해.”

“정말요?”

여우 꼬리 같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시즈가 눈을 반짝였다.

저런 반응은 반칙이다. 퇴근하라는 말에 어찌나 눈을 반짝이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를 악덕 고용주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어. 그리고 내일 오전 중으로 시몬 왕국 공주의 아카데미 입학 성적 좀 알아 와.”

“네……? 시몬의 공주님요?”

“대놓고 공주 성적만 물어보면 이상하니까 아카데미 측에는 신입생들 입학 성적 목록을 요구하는 게 낫겠지.”

현재 내가 셀레네의 성적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아카데미에 그녀의 성적을 내놓으라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급격하게 낯빛이 어두워진 시즈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쪽에서 목록을 내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런데 내가 지금 알아 오라고 하잖아.”

“……아, 네!”

뒤늦게 말뜻을 알아차린 시즈가 마차에서 내렸고, 마차에는 나와 리온 둘만이 남았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시즈는 다 괜찮은데, 이런 데서는 참 답답하단 말이야.

이럴 때는 참 군말 없이 쓱쓱 해내는 메이가 그리워진다.

‘메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메이는 아직도 레이델과 함께 웰링턴에 머무는 중이었다.

후작가에서 레이몬드의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를 촌구석으로 요양을 보내 그의 고발이 훨씬 미뤄졌기 때문이다.

말이 요양이었지, 후작과 달리 공작저에 머문 레이몬드를 향한 의심을 버리지 못한 렘브로가 감시 목적으로 유배를 보낸 거다.

숨죽이고 살라는 말에 레이델은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좀 가엾긴 하지만 완벽하게 일이 끝날 때까지는 조용히 사는 게 낫지.’

레이델은 가엾다.

하지만 나는 레이델보다 메이와 레이몬드 쪽에 더 신경이 쓰였다.

소설과 달리 후작가를 무너뜨릴 사람은 레이델이 아닌 레이몬드가 될 것이고, 메이는 그런 레이델을 숨기며 살고 있으니까.

마차 벽면에 머리가 쿵쿵 부딪치는 것도 모르고 머릿속으로 메이의 얼굴을 그렸다.

어느 순간부터 투박한 손 하나가 내 머리를 감쌌다.

맞은편에 앉은 리온의 손이었다.

“여전히 금주령 때문에 속이 상하신 상태군요.”

“그것도 있고. 다른 일도 있고.”

사실 지금 터진 소문에 비하면 금주령은 티끌이었다.

“다른 일이라니요?”

“글쎄 나랑…… 아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주로 귀족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이라 리온은 모를 테니,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문을 알면 실실 웃어 대며 신경을 건드릴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귀족 남자 하나를 팼다는 이유로 꽤나 애먹었는데, 호위 기사를 팼다는 얘기까지 돌면 나한테 좋을 게 없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말아먹는 짓이었다.

“저는 빨리 아가씨의 금주령이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왜, 같이 마셔 주려고?”

“금주령이 끝나야 아가씨가 웃으실 테니까요. 대련으로 술값 내기할까요? 진 사람이 내는 걸로.”

“대련은 매번 내가 지잖아. 인간 맞아?”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앞으로 내가 두 번을 더 환생해서 그 생의 모든 시간을 검술에 투자해야 리온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 호위로만 남겨 두기엔 아까운 실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온은 내 호위로 남는 것을 고집했다.

늘 여유롭게 굴다가도 다른 보직을 권하면 하루 종일 매달려 대길래, 그냥 계속 옆에 두기로 했다. 공작 부인이 리온을 곁에 두라 권하기도 했고 말이다.

인간이 맞냐는 나의 물음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인간이지요, 틀림없는.”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이 조금 웃겨서 웃음을 삼키자, 리온이 눈을 맞추며 웃었다.

“너는 왜 웃어?”

“아가씨가 웃으시니까요. 그래서 아가씨 미소를 본 저도 따라 웃게 됩니다.”

웃음이 이렇게 전염되는구나.

리온은 나를 따라 웃었고, 그런 리온의 미소를 본 나는 리온을 따라 다시 웃게 되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두 눈 속의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칼바도스와의 약속 장소는 제법 외진 곳에 위치한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어릴 적 슈바를 치료한 의원의 집이었는데, 1층에는 치료소, 2층에는 의원의 집이 있었다.

머리가 큰 후, 의원의 제자로 들어간 루카스가 뭘 배우는지 궁금했던 나와 칼바도스는 학부모 참관처럼 치료소가 문지방이 닳도록 치료소를 들락날락거렸다.

그중에서도 2층은 나와 칼바도스가 전세를 낸 것처럼 이용했는데, 집주인인 그녀는 무척이나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칼바도스가 사람을 시켜 귀한 약재들을 선물하니, 나중엔 알아서 2층으로 모셨다.

리온이 문을 열었고,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인 나를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루카스였다. 자리를 비운 의원이 시킨 것인지 약재를 분류하고 있었다.

“어? 어서 와, 형수.”

아니, 저 자식이?

정정하겠다.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인 나를 가장 먼저 놀린 사람은 루카스였다. 가까이 다가간 내가 루카스의 어깨를 짓누르듯 쓰다듬었다.

“밤길 조심해라.”

“……미안. 나도 방금 형님한테 들었어. 그런데 누님이, 형님이랑, 큷, 크흑……!”

사과와 함께 눈을 내리까는 것도 잠시, 루카스의 입가가 꿈틀거리더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루카스를 한 대 칠 것 같아서, 웃음을 끊기 위해 칼바도스의 행방을 물었다.

“도스는?”

겨우 웃음을 가라앉힌 루카스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형님은 2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것만 정리하고 올 테니까 나랑 같이 올라가자.”

그렇게 말한 루카스는 지하실로 약재를 정리하러 내려갔고, 나는 돌아온 루카스와 함께 2층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칼바도스의 호위가 고개를 숙였고, 나는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는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어야 할 리온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두들겨 주었다.

문이 열리자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보였다.

“에휴.”

그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자동으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나와 눈이 마주친 칼바도스 역시 한숨을 내쉬더니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어 댔다.

나는 그런 칼바도스의 맞은편에 앉았고, 루카스는 내 옆에 앉았다.

이마를 짚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정략결혼이라고 소문이 났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그러자 칼바도스가 통탄스럽다는 듯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차라리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라고 해……. 이건 진짜 우리가 서로 좋아해서 약혼하는 것 같잖아.”

소문에서 가장 화나는 포인트가 이거였다.

사람들이 죄다 배동으로 입궁한 소꿉친구 사이의 알콩달콩 로맨스인 줄 안다. 정작 두 사람은 만나면 욕이랑 쓸데없는 소리만 주고받는데 말이다.

“있지, 우리 스승님이 그랬는데. 원래 다들 그렇게 안 사귄다고, 그런 사이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나중에는 청첩장을 돌린다더라. 혹시 알아, 누님이랑 형님도 이러다가 나중엔 청첩장 돌릴지.”

“아까 네가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내가 바깥에서 그 문을 걸어 잠갔어야 했는데.”

얌전히 루카스가 돌아오길 기다린 그 순간이 후회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농담이지……?”

든든한 아군의 얼굴을 한 칼바도스가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엘 식겁한 루카스가 나와 칼바도스의 눈치를 봤다. 나는 루카스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지금부터 네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달려 있고.”

그러자 입 다물 자신도 없고 용기도 없었던 루카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청첩장을 돌린다고? 하, 그럴 리가.”

천천히 루카스의 말을 되풀이한 칼바도스가 그 말을 비웃었다. 그리고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널 좋아할 일은 없어.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너를 내 등에 태우고 짐승처럼 네 발로 황궁을 기어 다닌다.”

그건 좀 재밌겠는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칼바도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너 지금 혹했지?”

서로 작정하고 속을 감추며 서로를 속이지 않는 한, 눈빛만 보고도 꿰뚫는 사이다.

칼바도스는 이미 내 속을 알아챘고, 나는 속일 이유가 없었기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1분만 나 좋아하고 황궁 기어 다니면 안 돼?”

“단 1분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서.”

“그거참 다행이네.”

다행이라는 내 말에 칼바도스가 동의하듯 웃었다.

어렸을 때, 칼바도스는 내가 싫다고 했다. 그 말에 아주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의 나는 나를 좋아할 일 없다는 그의 말에 안도한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칼바도스 이놈과는 방 안에 단둘이 알몸으로 있어도 카드 게임을 하거나 각자의 서류 작업을 할 것이라고.

칼바도스는 앞으로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미쳐도 칼바도스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종점 없는 이 관계가 선사하는 아늑함에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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