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23화
[787년 1월 1일- 만취한 황태자와 리베르트 공녀가 사고를 치고, 황후궁에 찾아가 주정을 부리자, 황제께서 두 사람에게 3개월 금주를 명하셨다.]
새해부터 거하게 사고를 친 칼바도스와 나에게 황제가 금주령을 내린 지 한 달 반이 흐른 2월 중순, 아카데미 합격이 발표된 지 이틀이 지났다.
9년 만에 술을 입에 댔는데 그 결과가 금주령이라니.
황제의 명에 나는 조금 삐딱해져 있었다.
예전부터 황제는 이상한 벌을 자주 내렸다.
한 번은 몰래 사냥을 나간 나와 칼바도스, 루카스를 섬으로 유배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섬은 바로 황궁 호수에 위치한 인공 섬이었다.
그런 벌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건지 모르겠다.
‘3개월 동안 금주라니.’
칼바도스와 나란히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한 기념으로 금주령을 거둘 줄 알았건만. 황제는 명을 거두지 않았다.
‘망할 놈.’
열받는 것도 잠시, 다시 생각해 보니 황제가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궁 분수에다 칼바도스와 사이좋게 나란히 머리를 박고 토를 해 놨으니 말이다.
황후궁에서 벌어진 일은 더욱 가관이었다.
칼바도스와 함께 황후에게 선물이랍시고 건넨 뱀술의 뱀이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미친 듯이 뱀의 머리를 밟았지만, 이미 황후는 기절한 뒤였다.
덕분에 새해부터 황궁은 난리가 났다.
‘이 정도면 황제가 금주령을 내릴 만도 한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막 성인이 된 내게 3개월은 너무 길었다.
나는 황제를 향한 마음만큼이나 삐딱하게 앉은 채 서류 종이를 뒤적거렸다.
잠시 뒤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고, 갈색 종이봉투를 가지고 들어온 공작의 보좌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세를 지적했다.
“자꾸 그렇게 앉으시면 나중에 후회하실 겁니다.”
“휘어 버린 내 척추처럼 황실을 향한 충성도 조만간 휠 것 같은데.”
금주령의 내막을 잘 아는 보좌관, 세오가 살짝 웃더니 들어올 때부터 쥐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
“아카데미에서 온 거네?”
“공작님께서 맡기셨습니다.”
설마, 카인이 또?
……아니겠지.
익숙한 불안감이 발밑에서부터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안에 무슨 서류가 들었냐고 묻는 대신, 나는 바로 봉투 안에 든 서류를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구서였다.
힐끗거리며 내용을 살핀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카인 공자님께서 뭘 또 부수신 모양입니다. 이번엔 뭔가요. 기숙사 지붕? 아카데미 실험실?”
“……정문 앞에 세워진 동상.”
아카데미 3학년인 카인은 제 성질을 못 죽이고 이거저거 다 부수고 다녔다.
물론 나도 귀족 하나를 두들겨 팬 적이 있긴 했지만 카인보다는 피해 규모가 작았다.
과연 미래의 악역 마탑주다운 인성이었다.
‘왜, 이참에 아주 아카데미를 새로 하나 세우지.’
아카데미를 다 뜯어고치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공작가가 아니라 아카데미 보수 전문 업체인 줄 알겠다.
“그래도 이번엔 피해가 작군요.”
나는 세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기숙사 수리비를 부담하고 학생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일보다는 규모도 훨씬 작았고 처리하기도 쉬웠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책상 위에 자리한 다른 서류들을 본 그는 힘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내 얼굴이 찌푸려지기 전에 냉큼 방을 나섰다.
“동상은 갑자기 왜 부순 건지.”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초대 총장이 마법사들을 차별하고 탄압했다는 문서가 발견됐지.
이지를 잃게 만들어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실험도 진행했다고 한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럼 이건 카인 혼자 벌인 일이 아니다.
초대 총장의 윤리적 결함에 마법학부 학생들이 가장 분노했을 테고, 이들을 대표한 카인이 총대를 멘 것이다.
‘그래, 카인이 성격이 더럽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니지.’
조금 전까지는 역시 악역 마탑주 인성이라며 속으로 신나게 까댔으면서, 진상을 알고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이번만큼은 소설에 나온 카인의 설정보다, 9년 동안 카인을 지켜본 나를 믿기로 했다.
‘근데 이걸 꼭 우리 쪽에서 물어 줘야 하나?’
여론 때문에라도 철거했어야 할 동상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 줬으니 오히려 아카데미 쪽에서 카인한테 돈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에휴, 학생 투표로 새로운 동상 후보를 뽑은 다음, 동상이나 하나 지어 주고 생색을 거하게 내야겠다.
오후 약속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봄에게 제 영역을 내줄 준비가 되지 않은, 시린 겨울 날씨였다.
‘약속 장소를 저택으로 정하길 잘했어.’
개인 서재를 나서 복도를 걷는 내내 창 너머로 눈발이 흩날렸다.
‘처음 이 세상에 뚝 떨어졌을 땐 카인이 눈을 내려 줬었지.’
그 뒤로 내 인생은 꽤 순탄하게 흘러갔다.
얼마 전 내려진 금주령과 카인의 사고 수습, 나의 귀족 폭행 사건을 제외하면 말이다.
내게는 굵직한 배우들이 여럿 소속된 극단도 있고 말끔한 백화점도 하나 있다.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국적 취득 여부를 숨길 수 있는 먼 나라의 국적도 하나 얻어 놨다.
현명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 놓는다는데, 인간인 내가 굴 하나 더 파 둔다고 해서 문제될 거 없다는 심보였다.
*
약속 상대는 라티아.
라티아는 현재 내 극단에 소속된 배우이며,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제국을 사로잡았다.
오랜만에 시몬 왕국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라티아와 공작저에서 점심 약속을 잡은 참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요. 공녀님과 단둘이 식사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고요.”
우리는 짧게 인사를 마친 뒤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극단 사업을 시작한 뒤로 꽤 자주 극단에 드나들며 얼굴을 트고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나와 라티아는 꽤 가까운 사이였다.
“시몬은 어땠어?”
“미남도 많고, 미녀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제 눈이 쓰레기였나 봐요. 이게 다 공녀님 때문이에요.”
눈이 마주치자 레몬처럼 싱그러운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 예쁜 거 나도 잘 알고 저기 저 땅끝 마을에 사는 세 살짜리 꼬마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공연은 잘 끝마쳤다고 보고받았어. 반응도 좋았다며.”
“네. 이거 보세요. 부모님 몰래 제 공연을 보러온 관객이 편지랑 같이 선물로 보낸 거예요.”
라티아가 뿌듯하게 웃으며 오른쪽 가슴 쪽에 단 브로치를 자랑했다.
초승달 모양의 브로치는 딱 봐도 비싸 보였는데, 시몬 왕국의 귀족이 보낸 것 같았다.
“그런데 저보단 제 언니 쪽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더라고요.”
“언니 쪽에?”
“네. 저희 언니 책을 재밌게 읽었나 봐요.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라티아의 언니인 벨라는 작가였다.
이번에 라티아가 왕국에서 공연한 극은, 베스트셀러인 벨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극이었다.
‘벨라가 이번 연극 대본 집필에도 참여했었지.’
나는 흐릿해진 벨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안에 고기 조각을 밀어 넣었다.
“아, 너무 제 얘기만 했네요. 오면서 공녀님 소식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라티아는 무엇을 축하하는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카데미 수석 입학에 대한 축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응. 고마워.”
“사실 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답니다.”
“정말?”
내가 수석으로 입학할 걸 알고 있었다고?
아부다, 아부.
매력적인 눈웃음을 선사하던 라티아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내 왼손에 시선을 두었다.
“그럼요. 제가 눈치가 좀 빠르거든요. 반지는 아직인가요?”
수석 입학이랑 반지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대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내가 물었다.
“반지라니?”
“약혼반지 말이에요.”
‘약혼반지?’
약혼반지는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나 끼는 거다. 약혼자도 없는 내가 뭐하러 약혼반지를…….
하지만 나보다도 내 약혼을 확신하는 라티아의 모습에, 나는 표정에 드러난 당황과 황당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약혼해? 대체 누구랑……?”
“황태자 전하랑 약혼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미쳤어? 밥맛 떨어지게 무슨……!”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약혼이 진행되고 있어?
내 약혼인데 나만 모른다. 아, 아마 칼바도스도 모를 거다.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는 약혼이라 당사자들도 모르는 건가?
야무지게 입안에 든 음식을 삼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새해 첫날 밤에 황태자 전하랑 사고 치셨다면서요? 입국한 뒤로 제가 연회에서 가장 먼저 들은 공녀님 소식이 그거였어요.”
사고 쳤다고?
“그 사고가 그 사고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
황제가 말한 ‘사고’는 나와 칼바도스가 황태자궁 분수에 사이좋게 토하고 황후궁에서 주정 부린 걸 한 단어로 압축한 표현이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그날 밤을 단어 하나로 압축하지 않으면 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티아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새해 첫날 밤, 사고.
그래,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미혼의 황태자와 공녀의 성적인 교류를 생각한 모양인데…… 나와 칼바도스 사이엔 냉기가 넘쳐서 그럴 일이 없었다. 둘 다 더운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지라 여름에 냉기 마법을 쓰지 않은 채 살이 닿으면 욕을 주고받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속은 타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새해 첫날의 숙취가 지금에서야 몰려오는 것 같다.
칼바도스 그놈도 이 소식을 알고 있을까?
식사를 멈추고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을 때, 하얀 편지 봉투를 든 루나가 다급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몸을 낮춰 앉아 있는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씨, 황태자 전하께서 방금 보내신 서신이에요. 건네주신 분께서 긴급한 사안이라고 하셔서…… 바로 가져왔어요.”
칼바도스가?
나는 맞은 편에 앉은 라티아에게 동의를 구한 뒤 바로 서신을 펼쳤다.
[너 혹시 나랑 약혼해?
당사자들만 모르는 이 약혼에 불만이 있다면, 늘 만나던 곳에서 내일 오후 8시.]
‘이놈도 방금 알았구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꾹꾹 눌러쓴 게 티 났다.
허! 하고 어이없다는 소리를 연발해 대며 썼을 게 뻔했다.
‘환장하겠네, 진짜.’
내가 왜 이런 놈이랑 약혼을…….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더욱 열이 솟아서, 결국엔 입 밖으로 욕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