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22화
칼바도스와 함께 숨을 곳을 찾던 루카스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난 어디에 숨지?’
루카스와 같은 곳에 숨어서 좋을 건 없었다.
홀로 남아 다급해진 칼바도스는 술래인 엘렌시아를 피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발견한 유리 온실로 이끌리듯 발을 들였다. 칼바도스의 눈앞에 녹음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은 누군가를 본 칼바도스는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저 사람은…….’
엘렌시아의 어머니, 로제니아 리베르트였다.
아까 공작의 옆에서 함께 인사했었다.
칼바도스를 본 로제니아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온화한 미소를 걸친 채 물었다.
“온실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나는 숨으려고…….”
어머니의 얼굴을 단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칼바도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낯설었다. 처음 사귄 친구의 어머니는 더더욱 어색했고.
어색했다.
황후와 시녀장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만남의 목적이 정해져 있었고, 대화의 내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칼바도스가 할 말을 고르던 그때, 로제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숨바꼭질 중이시군요. 술래가 누구인가요?”
“……엘렌시아.”
“괜찮으시면 테이블 아래 숨으시지요. 엘렌시아가 찾으러 오면 모른 척해 드리겠습니다.”
혹하는 말이었다.
‘공작 부인이 거짓말을 해 주면 엘렌시아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엘렌시아가 시간 내에 나를 못 찾으면 내가 그 녀석을 이기는 거지.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처럼 붉고 화려한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올렸고, 계산을 마친 칼바도스는 그 아래 몸을 숨겼다.
곧, 딸이 주변에 없는 것을 확인한 로제니아가 칼바도스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딸과 친구가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황자를 발 밑에 둔 이 상황에 적절한 주제는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내가 저 녀석의 친구가 되어 준 게 아니라, 저 녀석이 내 친구가 된 거다.”
테이블 밑에 쭈그리고 앉은 칼바도스가 테이블보의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전하와 저는 지금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맞나요?”
“맞다.”
“전하께서 제 말을 듣지 않고, 전하께서 제 말에 답하시지 않으면 이건 대화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칼바도스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도 마찬가집니다. 혼자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엘렌시아가 전하를 친구라고 생각해 봤자, 전하께서 그 아이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친구가 아닙니다.”
로제니아는 칼바도스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전하께선 제 딸을 친구로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려 주세요.”
‘……친구.’
칼바도스는 제 두 번째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계속. 계속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좋은 친구로만 계셔 주시면 좋겠군요.”
디에고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좋은 친구로만.’
로제니아가 그 부분에 힘을 실었다.
‘좋은 친구로 있어 달라고?’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엘렌시아가 변절하지 않는 한, 칼바도스는 좋은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에 칼바도스는 쉽게 답했다.
“알겠다.”
“약속하셨으니 믿겠습니다.”
어린 황자의 진중한 대답에 로제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
나는 방 안 소파에 기대앉은 채 칼바도스와 루카스를 찾아 나설 때를 기다렸다.
“루나, 지금 몇 분 지났어?”
“5분이요. 이제 찾으러 가시면 될 것 같은데요?”
제한 시간 15분. 본관의 1층이나 3층에 숨은 두 사람을 찾아야 했다.
나는 바로 방문을 열었고, 시계를 든 루나가 내 뒤를 따랐다.
‘루카스는 단순하게 술래인 나한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쳤을 거야.’
여기가 3층이니까 1층으로 갔으려나.
‘칼바도스가 3층에 숨었다면 루카스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을지도 알겠지.’
먼저 루카스를 찾은 뒤 칼바도스의 행방을 묻는 게 나을 것 같았기에 나는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에 도착한 나는 응접실로 향하려던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슈아가 저기서 악보를 떨어뜨렸지.’
설마 슈아랑 슈바가 있는 곳으로 간 건가?
루카스는 연습실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몸이 그쪽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뒤 연습실 문을 열어젖힌 나는,
“그럼 슈아 넌 이것도 연주할 줄 알아? 형은 이걸 다 외웠고? 대단하다!”
“응. 내가 가르쳐 줄까?”
꺄르륵거리며 웃고 있는 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루카 너, 설마 지금 이게 숨은 거야?”
“응? 숨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아, 맞다……! 나 숨었어야 하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숨바꼭질은 본인이 먼저 하자고 했으면서, 슈아와 슈바를 보자마자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까먹은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루카스는 슈아랑 슈바를 보러 온 거였지.’
처음부터 루카스와 칼바도스는 방문 목적이 달랐다. 루카스를 데리고 칼바도스를 수색하는 것보단 본래의 방문 목적대로 루카스를 여기에 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너는 그냥 슈아랑 슈바랑 같이 여기 있어. 혹시 칼바도스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모르겠어…… 아, 그런데 같이 1층으로 내려왔어!”
“그래? 고마워.”
결국 나는 루카스를 남겨둔 채 루나와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같이 1층으로 내려왔다고?
‘그 녀석이 다시 3층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일단 1층부터 찾아보자.
‘성격상 주방으로 가진 않았을 것 같고, 유리로 된 온실은 들키기 쉽다는 느낌에 가지 않았을 거야.’
본래 향하려던 응접실과 1층에 위치한 다른 방들을 살폈지만, 칼바도스를 찾아볼 순 없었다.
남은 시간은 5분.
‘3층으로 다시 올라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1층에 모든 걸 걸어?’
지금 3층에 있는 모든 방을 다 뒤져볼 순 없었기 때문에 나는 1층에 더 머물기로 했다.
‘집이 참 쓸데없이 크고 넓네.’
아.
온실에 가 볼까?
유리로 되어 있어 사람이 숨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해 칼바도스가 숨어 있을 가능성을 지운 곳이었다.
하지만 칼바도스라면 오히려 이 점을 역이용해 온실에 숨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온실로 가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내가 온실에서 마주친 사람은 칼바도스가 아닌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짙은 초록색 표지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공작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이었다.
혹시 독서를 방해하는 걸까 싶어 나는 최대한 조곤조곤 물었다.
“어머니, 혹시 칼바도스가 어디에 숨었는지 보셨어요? 숨바꼭질 중인데 제가 술래라서요.”
“글쎄, 못 봤는데.”
못 봤다는 말과 달리 공작 부인은 사악하게 웃으면서 테이블 아래를 가리켰다.
‘아.’
칼바도스를 숨겨 준 공작 부인이 그의 위치를 고발하고 있었다.
“어쩌죠. 빨리 찾아야 하는데…… 루나, 이만 가자. 3층에서 찾아봐야겠어.”
나는 일부러 큰 발소리를 내며 온실을 떠나는 척했고, 그렇게 칼바도스가 안심하고 방심했을 때를 노려 바로 테이블보를 들췄다.
“찾았다!”
“너, 어떻게-!”
화려한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테이블 아래에 쭈그려 앉은 칼바도스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냥 나가려다가 테이블 아래로 네 옷자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길래, 그걸 보고 알았지.”
나 숨바꼭질 잘해.
나는 그렇게 덧붙이며 웃었다.
두 사람의 원만한 신뢰 관계를 위해 공작 부인의 고발은 묻어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런 데서 혈연의 힘을 보여 줄 필요는 없지, 암.
연고주의의 맛을 보기엔 이르다.
“자, 잡아.”
발이 저릴 것을 걱정한 내가 칼바도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칼바도스는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루카스는 찾았어?”
“응.”
“그럼 네가 이겼네. 이제 루카스가 술래인가?”
“아니…… 걘 우리 같은 거 잊어버린 지 오래야.”
자주 만날 수 있는 나와 칼바도스와 달리, 루카스는 슈아와 슈바를 만나기 어렵다. 그러니 반가움에 우리를 잊어버린 것도,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루카스를 두고 칼바도스와 둘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앉아 있던 소파에 걸터앉은 칼바도스가 나를 꽤 오래 바라보았다.
쉽게 무시하기 어려운 시선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봐?”
“난 네가 너희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넌 너희 어머니를 더 닮은 것 같아.”
내가 공작 부인을 더 많이 닮았다고?
평소 공작을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일까. 공작 부인을 닮았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게 들려왔다.
“어디가?”
“혓바닥.”
짧게 답한 칼바도스가 제 손가락으로 살짝 내민 혀를 가리켰다.
……하고 많은 곳 중 혓바닥이 닮았다니. 이게 칭찬인가, 욕인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 표정을 본 칼바도스가 덧붙이듯 설명했다.
“말하는 느낌이 비슷해.”
“혹시 우리 어머니가 너한테 나쁜 말 했어?”
황금 대가리라고 했다거나……. 어젯밤 내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 건가?
그럼 혓바닥이 비슷하다는 건 칭찬이 아니라 욕이다, 욕.
하지만 그런 나의 우려와 달리 칼바도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그런 게 있어.”
답을 피한 칼바도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
며칠 뒤, 루카스는 황위 계승을 포기했다. 황후는 루카스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메릴 후작이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후작의 소식이 들려온 바로 다음 날, 입이 귀에 걸린 리베르트 공작은 파티를 열었다.
어찌나 신이 났냐면, 나와 카인의 이름으로 신전에 기부를 하고 아카데미에 새 건물을 지어 줄 정도였다.
이쯤 되면 제국 사람들도 다 안다, 공작의 유치한 성미를.
그 뒤로 칼바도스가 황태자가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칼바도스는 루카스를 아꼈으며 루카스는 칼바도스를 잘 따랐으니까.
그렇게 우리 셋은 황궁 안에서 소소하게 우정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와 칼바도스는 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