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1)화 (21/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1화

슈아가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공작저에 익숙해진 나를 긴장하게 만든 소식이 하나 있었다.

“아가씨, 마님께서 돌아오셨어요!”

내내 북부에 머물던 공작 부인이 기별도 없이 공작저로 돌아온 것이다.

로제니아 리베르트, 앱솔룬 백작.

‘카인의 마나 폭주로 초토화된 북부 공작저에 머물며 사후 처리를 맡은 사람.’

직접 마수 토벌에 나선 북부의 철문이라 불리는 이 여자는, 나에게 있어 완벽한 미지의 인물이었다.

‘일단 카인의 행동을 보고 분위기를 파악하자.’

공작 부인과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없었으니 그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하인들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키 큰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커다란 키에 피에 절은 듯한 짙은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

그 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로지, 잘 지냈어? 별일 없었지?”

하지만 나와 달리 공작은 친근하게 공작 부인을 맞이했다. 아버지란 사람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실례일 수는 있지만, 공작의 모습은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개 같았다.

“북부는 평소랑 똑같지, 뭐. 사람은 고요하고, 자연은 요란하고.”

공작 부인은 그런 공작을 가볍게 끌어안아 등을 두어 번 두들긴 다음, 나와 카인에게 다가왔다.

내 손을 잡고 공작 부인의 앞에 선 카인이 물었다. 오늘따라 카인은 조금 들떠 보였다.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그래. 너희는 잘 지냈니?”

“아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때, 카인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나는 엉겁결에 카인을 따라 고개를 저었다.

‘우리 잘 지냈잖아……?’

설마 나만 잘 지낸 거야? 나만 잘 먹고 나만 잘 지낸 건가?

잘 지내지 못했다는 카인의 말에 공작 부인이 얼굴의 험악하게 구겨졌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설마…….”

공작 부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공작을 향했다. 나와 카인이 잘 지내지 못한 이유를 공작에게 따지려는 듯이.

억울한 공작이 항변하려던 때, 카인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없으셔서 잘 못 지냈어요.”

그제야 카인의 말이 농담이었다는 것을 안 그녀가 바로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 그럼 나도 답을 정정하마. 다시 물어봐 주렴.”

‘대충 이런 분위기구나.’

조금 전 상황을 통해 공작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나는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카인과 동시에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너희가 없어서 잘 못 지냈단다.”

공작 부인이 카인을 따라 답하자, 카인이 순하게 웃었다.

“우리 카인은 이번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네. 나중에 들려 드릴게요.”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공작 부인은 아들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어 준 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 엘리는 1황자의 배동이 되었다지?”

“네. 폐하께서 제안하셨어요.”

“그놈이 기어이…….”

미소도 잠시, 공작 부인이 사납게 읊조리며 이를 갈았다.

“그 황금 대가리의 낯짝 아니, 얼굴은 어떻더냐. 인물이 좋니 뭐니 하지만, 별거 없지? 그것도 다 젊었을 때 얘기다. 얼떨결에 황제가 되어 가지고 마음고생만 하다 폭삭 늙었지.”

황금 대가리…… 공작 부인의 맛깔나는 단어 선택에 나는 기절할 것 같았다.

낯짝이란 말을 얼굴로 정정하기 전에, 대가리라는 말을 정정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귀족치곤 가벼운 그녀의 언사에 의문을 가진 그때,

‘뭐야, 혓바닥 잘리고 싶어?’

엘렌시아의 대사 하나가 귓가에 울렸다.

‘영락없이 공작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소설 속 엘렌시아는 공작보다 공작 부인을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 역시 황금 대가리라는 말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건지 별다른 지적 없이 넘어갔다. 아무래도 공작 부인과 공작 사이에선 그 단어가 황제를 부르는 애칭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로지, 머리를 잘랐어?”

“불에 탔어. 갑자기 입에서 불을 뿜는 괴수가 나타났거든.”

네?

공작 부인은 태연한 얼굴로 어마무시한 말을 내뱉었고,

“어머니께서 이기신 거예요?”

카인은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 카인 네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머리도 가져왔단다.”

‘……미치겠네.’

나름 이 집 분위기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그냥 한몫 두둑하게 챙겨서 튈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우연처럼 카인이 눈에 들어와 가슴에 박혔다.

‘내가 떠나면 카인이 리베르트의 후계자가 되겠구나.’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면 카인은 마탑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황실 마법단과 달리 마탑에 들어가는 자는 다른 작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인은 마법과 탑을 사랑해.’

그럼 뭐,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열심히 배워서 작위를 잇는 수밖에.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도 있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을 믿지 않았지만, 오늘부터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칼바도스랑 루카스가 공작저에 오는 날인데…….

그날 밤, 나는 공작 부인이 칼바도스 앞에서 황금 대가리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기를 빌어야 했다.

*

“두 분 전하께서 방문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하나도 반갑지 않은 얼굴을 한 공작이 반갑다며 칼바도스와 루카스를 반겼다. 그게 웃겼는지 공작 부인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말없이 공작의 옆에 서 있던 카인의 어깨를 붙잡은 채 칼바도스에게 그를 소개했다.

“우리 오빠야. 이름은 카인 리베르트고 나보다 두 살 많아.”

“만나서 반갑-”

칼바도스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이렇게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오시다니.”

카인이 미소 지으며 칼바도스의 손을 맞잡았다.

“……?”

스읍, 오빠.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

‘실수겠지?’

칼바도스가 손을 맞잡기 무섭게 카인은 손을 풀었다.

이상함을 느낀 칼바도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말실수한 거겠지?”

“아마도……?”

실수겠지. 충분히 헷갈릴 만한 말이잖아?

가볍게 카인의 말을 넘긴 나와 달리 칼바도스는 꽤 오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짧아야 좋을 침묵이 길게 이어지던 그때, 홀의 구석에서 둔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분홍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묶은 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아노 악보집을 떨어뜨린 슈아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루카가, 황자 전하예요?”

“슈, 슈아, 그게-”

루나를 시켜 슈아와 슈바를 불러온 뒤 루카스를 만나게 할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이 구렸다.

내내 자신이 황자라는 것을 숨겼던 루카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때,

“최고다! 내 친구가 황자님이래!”

슈아가 물에서 나온 생선처럼 팔짝거리기 시작했다.

“맞아! 나는 황자야!”

최고라는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루카스는 슈아와 마주 보고 신이 나서 양손을 마주 잡고 팔짝거렸다.

슈아의 옆에 있던 슈바와 시선이 부딪쳤고, 부딪친 시선이 떨어지기 무섭게 슈바가 입을 열었다.

“신은 이미 우리를 버렸어요, 아버지!”

갑작스레 짧은 대사를 던진 슈바는 나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그 장면이구나.

얼마 전부터 내가 가져온 대본을 열심히 읽더라니. 바로 상황을 판단한 내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건 나와 슈바의 놀이였다. 서로가 다짜고짜 대사를 읊으면 그에 맞춰 상대의 다음 대사를 읊는.

열정적인 슈바의 모습에,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연기에 맞장구쳐 주기 위해, 나는 그런 슈바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음 대사를 읊었다.

“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말하는 너는, 그간 무엇을 했느냐? 신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니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다.”

고지식한 아버지 역할인 나를 바라본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틀렸어요. 우리는 이제 신의 자녀를 찾아야 해요. 신이 아닌 신의 자녀가 우리를 지킬 거예요.”

그렇게 말한 슈바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절망과, 신의 자녀가 자신들을 지킬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녹아 있었다.

짝짝짝―

나는 슈바에게 박수를 선사했고, 이만 슈아와 함께 연습실로 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칼바도스와 루카스를 준비된 방으로 안내했다. 얼떨결에 나를 따라 박수를 친 칼바도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방금 뭐한 거야? 유비스의 ‘신과 인간’을 따라 한 거지?”

“어. 미래를 위한 투자야.”

“무슨 미래?”

“슈바 말이야, 멋진 배우가 될 것 같지 않아?”

“배우?”

아픈 척, 좋은 척, 슬픈 척. 다 잘한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척, 증오하는 척도 곧잘 하겠지.

‘벌써 슈바와 합의하에 활동명까지 정해 뒀다고!’

미소년인 슈바가 역변하지 않고 마의 16세를 무사히 넘기면 완벽하다.

이참에 소속사를 하나 차려 봐?

슈아와 슈바를 예술인으로 육성하면서 예술 쪽에 투자를 해도 괜찮을 것 같고……. 슈바는 아역 때부터 꾸준히 활동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나만큼이나 진지한 칼바도스의 작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책에서 봤어.”

“뭘?”

“귀족들의 정부 이야기. 챕터5, 배우를 정부로 삼은 귀족.”

“그런 책은 대체 왜 읽었어?”

당시 사람들이 수군거린 굵직한 스캔들 모음집이잖아?

역사책이나 문학책이나 읽을 것이지, 대체 그런 건 왜 찾아 읽는단 말인가.

“치우치지 말고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배웠어.”

모범생의 얼굴을 한 칼바도스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 그래.”

편식은 해도 편독은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새로 알게 된 설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칼바도스가 물었다.

“너도 그럴 거야?”

“치우치지 않는 독서를 말하는 거야, 정부를 말하는 거야? 독서 말하는 거지? 그렇지?”

“정부 말하는 건데.”

“제정신이야?”

우리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정부를 들일지 말지 고민해?

‘미쳤나 봐.’

황궁에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역시 황궁은 아이 교육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칼바도스가 걱정된 나머지,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두들겼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예정도 없어.”

“그래? 그럼 됐어.”

후련한 얼굴로 답한 칼바도스는 바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제 볼일 끝났다고 무정하게 나를 등진 그는 말없이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할 뿐이었다,

나 역시 칼바도스에게서 루카스로 관심을 돌렸다.

정부가 무엇인지 몰라 대화에 낄 수 없었던 루카스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채 복도를 둘러보고 있었다.

“왜 그래, 루카?”

“숨을 곳이 많아 보여서.”

우리 집에서 왜 네가 숨을 곳을 찾는데……?

하지만 그런 나의 질문보다 루카스의 해맑은 외침이 먼저였다.

“숨바꼭질하고 싶어!”

숨바꼭질?

결국 나는 페르데니아의 스 자 돌림 형제와 방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노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부터 숨바꼭질 시작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