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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20)화 (20/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20화

고용인들은 저택에 도착한 슈아와 슈바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슈아와 슈바 딴에는 나름 구색을 갖추고 온 것이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내 앞에 선 분홍 머리 남매를 보곤 짧게 감탄했다.

“보기 좋네.”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두 사람 다 살만 붙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골골거리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슈바는 새 옷이 어색한지 어정쩡하게 서 있었고, 슈아는 머리를 넘겼다.

“아가씨, 슈아랑 슈바 식사가 준비됐대요.”

루나가 식사 준비를 알렸고, 우리 셋은 루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하자 나는 내 뒤를 따라오던 아이들에게 루나를 가리켰다.

“여기서부턴 루나를 따라가면 돼. 밥 맛있게 먹어.”

“……네.”

낯선 곳에서 입이 꽁꽁 얼어 버린 남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슈아와 슈바가 도착하기 전 점심 식사를 한 나는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루나가 물었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피아노 연습하러. 밥 먹은 다음엔 저택 안내를 해 줘.”

예전부터 피아노를 배워 보고 싶었기 때문에 피아노 교사를 들인 터였다. 너무 쉬운 곡은 아니고, 적당히 난이도 있는 곡 하나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하지만 원하는 곡을 연주하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쉬운 곡부터 연습해야 했다.

비어 있는 방 안에 검은 피아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어려움 없이 의자에 걸터앉은 다음, 하얀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위아래가 아닌 좌우로 손을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음의 높낮이를 찾다가, 검은 건반과 하얀 건반을 스치는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오늘은 안 틀리고 끝나려나? 이제 이 부분만 넘기면 끝-’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틀렸다.

손끝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의식해서 그런가.’

이번엔 절대, 절대 의식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연주를 시작했지만, 방금 전과 같은 부분에서 또 한 번 틀리고 말았다.

그다음도, 그 음도.

계속 같은 부분에서 틀렸다.

‘왜 자꾸 여기서 틀리는 거야?’

틀린 부분이 어렵기 때문은 아니었다.

해당 부분만 따로 연주하면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면 꼭 이 부분을 틀렸다.

시작 부분도 아니고, 끝부분에서 틀리는 것이 참 억울했다.

‘거의 다 왔는데.’

이 부분만 넘기면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데. 괜히 오기가 생겨서, 틀리지 않고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어려운 곡도 아니건만.

그런데도 나는 이 마의 구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었다.

‘음, 이거 좀 열 받네.’

피아노는 조금 짜증이 난다.

내내 잘 연주하다가도 한 번 삐끗하면 흉한 소리가 나서, 기분이 상하고 흥이 식어 버린다.

딱 한 번. 그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연주는 완벽해지지 못한다.

꼭 삶 같다.

백번 잘해도 한 번 실수하면 무너지는 것이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 백번 좋은 모습을 보여 줘도 한 번 실수하면 욕을 먹는 것과도 같았다.

실수를 하지 않으면 모를까, 실수를 하면 기분이 조금 울적해진다.

어려운 곡을 연주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만,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무례한 말에도 백번 천번 웃어 주다가, 선배의 선을 넘은 발언에 정색 한 번 했다고 욕먹은 날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프로그램에서 정색하는 모습이 움짤로 만들어져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기분이 되게 더러웠다.

‘역시 그때 그 새끼를 매장시켰어야 했는데…….’

얕은 우울에 발을 담글 뻔한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슈아가 서 있었다.

“벌써 저택 구경을 다 했어? 슈바랑 루나는 어디 가고 너 혼자야?”

“오빠가 열이 나서 루나 언니가 주치의 선생님한테 데려갔어요.”

열이 난다고?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아직 다 낫지 않은 건가?

조금 더 일찍 알아채지 못한 게 미안했다.

“슈바는 괜찮대?”

“그냥 감기래요. 옮을 수도 있으니까 저는 나가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네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서 있느냐고, 그렇게 물어보려 했지만 관두었다.

‘혼자 있기는 싫고, 이 저택에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여기로 온 거겠지.’

그나저나, 계속 저기에 있었던 건가?

‘그럼 내가 같은 부분에서 계속 틀리는 걸 다 듣고 있었겠네.’

여덟 번 연속으로 같은 부분에서 실수한 것이 떠올라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긴 피아노 의자의 왼쪽 끝으로 엉덩이를 옮긴 뒤 바로 옆자리를 두드렸다.

“슈아야, 여기 앉아 봐.”

슈아는 군말 없이 내 말에 따랐고, 나는 슈아의 손가락을 조종하듯 움직이며 계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제 너 혼자 쳐 봐.”

작은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맑은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좋았는지 슈아가 활짝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동안 함께 피아노 건반을 뚱땅거렸다.

“루나가 생각보다 늦네.”

슈바를 주치의에게 데려간 루나가 생각보다 늦었다.

그냥 주치의에게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이야기가 길어진 모양이다.

“제가 모셔 올까요?”

“아니, 너는 여기서 계속 연주해. 나는 주방 좀 털어 올게.”

나는 슈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자리에 앉힌 뒤, 주방으로 향했다.

*

“리타, 이 머핀 가져가서 먹어도 돼?”

주방에 방문한 나를 반갑게 맞이한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몇 개 담아 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슈아는 방금 밥을 먹었는데…… 후식을 먹을 공간은 남겨 놨겠지?

나는 슈아의 위장을 믿고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음…… 세 개. 핫초코도 있어? 슈아랑 같이 마실 거야.”

“네! 이건 위험하니까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고마워.”

리타는 작은 머핀 세 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두 개를 트레이에 올렸고, 나는 그녀와 함께 피아노 연습실로 돌아갔다.

내 음식에 들어가는 파프리카는 골라내기 쉽게 크게 썰거나, 아예 넣지 말아라. 그런 말을 덧붙이며 걷고 있던 때였다.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내가 연주하던 곡이었다.

‘내가 틀린 부분까지 똑같이 틀리고 있잖아?’

이상함을 느낀 리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지금 혹시 도련님께서 피아노를 치고 계신 거예요?”

그럴 리가. 카인은 작은 별밖에 못 치는데?

두 사람 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쪽보다 합주를 하는 쪽이 더 멋있을 거라며 바이올린을 고른 카인이다.

그러니 카인일 리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내가 틀렸던 부분에서 똑같이 틀리고 있잖아?’

설마…….

지금 피아노 연습실에 있는 건 딱 한 사람뿐이다. 연이은 내 실수를 들은 것도 딱 한 사람뿐이고.

피리 부는 사나이를 만난 것처럼 피아노 소리에 홀려 버린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 벅찬 마음으로 연습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드넓은 연습실에서 나를 반긴 사람은,

“오셨어요?”

맙소사.

커다란 검은 피아노 앞에 앉은 작은 슈아가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뒤늦게 도착한 리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지금 봤어?”

“듣고 보고…… 다 했어요.”

슈아는 나와 리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슈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물었다.

“혹시 피아노 배운 적 있어?”

없을 것이다.

피아노는 구경도 못 해 본 아이가 어떻게 피아노를 배웠겠는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아서 물었다.

내 반응에 당황한 슈아가 눈치를 보며 답했다.

“아뇨…… 오늘 처음 쳐 봐요.”

그럼 혹시 아버지 성함이 모차르트야? 아니면 악마랑 계약이라도 했어?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다른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한 거야?”

“그냥 되던걸요…….”

문밖에서 들은 것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다시 연주해 줄 수 있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슈아는 다시 한번 피아노를 연주했고 나는 입을 다무는 것을 잊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고, 그 광경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그대로 끌어안은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슈아 너, 피아노 배워 볼래?”

“그래도 되나요?”

“너만 좋다면 얼마든지.”

피아노와의 첫 만남부터 깊은 우정을 나눈 슈아가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슈아를 보며 속으로 외쳤다.

동네 사람들…… 우리 애가 천잰가 봐요!

*

피아노 교사는 이틀 뒤에야 공작저에 오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 슈아에게 테스트를 진행했다.

건반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비슷한 수준의 곡을 연주한 뒤, 슈아가 따라 치게 하는 것이었다.

다섯 번만 더 들려 달라고, 그러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한 슈아는 다른 곡 역시 훌륭하게 연주했다.

그 뒤로도 슈아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를 매만졌다.

“슈아야, 너는 피아노가 재밌어?”

“네.”

“어떤 점이?”

“소리가 다 예쁘지만, 이 음이랑, 이 음을 같이 치면 예쁜 소리가 나요.”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맑은 음처럼, 슈아가 맑게 웃었다.

“그런데 이 소리들을 같이 누르면…….”

콰광―

넓은 방 안에 천둥과 같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주 괴상한 소리가 나지. 그게 재밌다고?”

“네. 소리 하나하나가 꼭 사람 같아요!”

소리가 사람 같다고?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건반 하나하나가 사람인데…… 이렇게 만났을 때 고운 소리가 나는 건, 사이가 좋은 사람끼리 만난 거고.”

나는 조금 전 슈아를 따라 하며 한꺼번에 여러 건반을 짓누르듯 무게를 실어 눌렀다.

“이런 못난 소리가 나는 건 사이 나쁜 사람이 만났다는 거네? 내 생각이 맞아?”

“맞아요!”

내 해석이 정확했는지, 슈아는 영혼이 빠져나올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악기로 같은 음악을 연주하는데, 너는 나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구나.

‘그런데 나는 왜…….’

아니지.

이제 생각해 보니 피아노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던 거지, 내 생각이 더 못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급하게 생각을 정정했다.

다만, 슈아를 보고 든 생각 중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슈아야. 너, 방금 엄청 주인공 같았어.”

“네?”

피아노를 사랑하고,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주인공.

만약 이렇게 피아노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있다면, 슈아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서민 여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슈아를 좋아하는 재벌 2세 서자 남주인공으로 그려질 것이다.

‘나는…… 슈아의 재능을 질투하는 부잣집 악녀 역할이겠지.’

기꺼운 마음으로 길에서 주워 온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줬더니, 그 주워 온 아이가 피아노를 훨씬 잘 연주해서 질투하는, 그런 못된 역할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그저 내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목표를 이루고, 성과에 만족할 거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가 지칠 때면 슈아의 연주를 들으면서 맛있는 쿠키를 먹을 거다.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슈아를 보며 웃었다.

슈아의 등 뒤에 있던 창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 별것도 없는 하늘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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