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9화
한 판만 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한 루카스는, 열세 번째 게임이 끝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딱 한 판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역시 이 카드는 아동의 손에 들어가기엔 너무 위험하다. 이 정도면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겨우 이성을 찾은 내가 제안했다.
“이번엔 다른 게임 하자. 저번에 했던 보드게임 아직 있어?”
“제국 관광 게임? 그래.”
칼바도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반대로 루카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세 명부터 할 수 있는 카드 게임이 끝났으니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칼바도스와 함께 게임판과 말을 세팅하며 말했다.
“다행이다, 루카스가 있어서. 이것도 세 명부터 할 수 있는 게임이거든.”
“맞아. 그러니까 다음에도 같이 하자.”
“……응!”
다음이라는 말에 루카스가 환하게 웃었다.
보드게임에서 이긴 뒤, 기분이 좋아진 루카스는 우리에게 비밀 장소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래 봤자 책상과 의자 위에 이불을 걸쳐 씌운 뒤, 그 이불 밑 공간에 들어가는 게 다였지만 칼바도스는 마냥 좋아했다.
그 공개적인 공간을 비밀 장소 삼은 칼바도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루카스, 너는 어쩌다가 엘렌시아한테 빚을 졌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카스가 내 눈치를 봤다.
말해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가 칼바도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다고 먼저 약속해 줘야 해.”
“알았어.”
제 형의 믿음직한 목소리에 루카스가 신뢰 가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
.
.
“호위도 없이 황궁 밖으로 나갔다고? 그러면 안 돼. 위험하단 말이야.”
나이는 어려도 형은 형이라고. 지난밤 있었던 일을 알게 된 칼바도스가 진지한 얼굴로 루카스를 훈계했다.
암, 그렇고말고. 위험하긴 위험하지.
다행히 그날은 루카스가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나는 칼바도스의 말이 옳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그 잔소리는 루카스에게서 나에게로 옮겨 왔다. 칼바도스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목소리가 내 몸 어딘가를 찌른 것 같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호위를 두고 가면 어떡해?”
아니, 왜 나까지……. 갑자기 나한테 튄 불똥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똥이 튀었는데 몸이 얼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진 형의 진심 어린 훈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한테 그 불똥이 튀니 진심 어린 훈계가 잔소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루카스는 다정하게 꾸짖더니, 나한텐 알 만큼 아는 녀석이 왜 그러냐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만약 네가 잘못됐다면 너를 수행한 사람들 모두가 처벌받았을 거야. 네가 그런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칼바도스에게 맞는 말로 혼난다는 사실이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길어지는 칼바도스의 잔소리를 흘려들었다. 그리고 잔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시작되는 타이밍을 노려 칼바도스의 말을 끊고 루카스의 손을 붙잡았다.
“아 참! 루카, 슈아랑 슈바라는 아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오기로 했어.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셨거든. 얼마 뒤면 공작저로 올 거야.”
“정말?”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루카스를 공작저로 초대할까?
정식으로 공작가의 초대를 받으면 몰래 빠져나오지 않고도 슈아를 만날 수 있었다.
루카스만 부르면 이상하니 칼바도스까지 함께 말이다. 나는 칼바도스를 공작저에 초대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 루카스는 형과 함께 놀러 나와서 슈아와 슈바를 만날 수 있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응. 루카, 너 슈아 좋아하지? 다음에 우리 집 한 번 와. 칼바도스도 오기로 했으니까 같이 오면 되겠어.”
슈아를 좋아하냐는 내 질문에 루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황자답지 않게 고개 하나는 끝내주게 잘 숙였다.
잠시 뒤, 꽉 다문 입이 살짝 열리더니 작은 목소리가 기어 나오듯이 새어 나왔다.
“……나 슈아 안 좋아하거든.”
“진짜?”
넌 슈아가 죽은 뒤에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모르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응…… 진짜, 진짜 안 좋아해.”
하지만 부정하기엔 얼굴이 너무 제철 딸기 같은데. 괜히 루카스의 옆에 있는 나까지 열이 옮아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슈아를 진짜진짜 안 좋아한다니.
괜히 오기가 생겼다. 동시에 어린 루카스를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디, 이래도 그렇게 나오나 보자.’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루카스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 루카 너는 나중에 나랑 결혼하면 되겠다. 볼살이 통통하고 귀여운 게 마음에 들어.”
“안 돼!”
“싫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바도스와 루카스가 소리쳤다.
‘아니 잠깐, 루카스는 그렇다 쳐도 칼바도스는 대체 왜?’
루카스를 골려 줄 생각이었는데. 칼바도스가 루카스보다 먼저 더 큰 목소리로 안 된다고 소리쳤다.
‘뭐야…… 자기 소중한 동생을 나한테 줄 수 없다는 건가?’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원래 세상은 뻔뻔하게 사는 놈이 이기는 법이니까.
자연스럽게 놀림 대상을 루카스에서 칼바도스로 바꾼 내가 칼바도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눈빛과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칼바도스 너, 나 좋아하는구나? 루카스 말고 네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다 티 나.”
“너 정말 미쳤어? 악!”
발끈한 칼바도스는 자기가 책상 밑에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다가 머리를 찧었다. 많이 아팠던 건지 칼바도스의 눈매 끝이 붉어졌다. 그리고 고장 난 것처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나는 너 안 좋아해! 정말이야! 정말 안 좋아해! 나는 그냥…… 그냥 너같이 못된 애한테 내 동생을 넘겨줄 수 없다는 뜻이었어!”
“그래, 그래.”
역시 그 이유였구나.
이유는 알고는 있었지만, 놀렸을 때 나오는 반응이 일품이었다.
나는 씩씩거리는 칼바도스에데 대충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자신을 지키려는 칼바도스의 마음을 안 루카스가 감격한 얼굴로 칼바도스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칼바도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재미있었는데.
별것도 아닌 걸로 애틋하게 끌어안은 형제의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함께 놀며 사이가 좋아지길 바란 건 맞지만…… 이건 꼭, 나를 공공의 적으로 돌리면서 우애가 깊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카인이 보고 싶어졌다.
스 자 돌림을 쓰는 페르데니아 형제는 조금…… 아주 조금 짜증 났다.
*
잠시 뒤, 오후 일정이 있었던 루카스가 1황자궁에 아쉬움과 기대를 남긴 채 돌아갔다. 나 역시 슬슬 퇴궁 시간이 다가왔다.
시계를 흘끗 본 칼바도스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너 일부러 루카스를 여기로 오라고 한 거지? 괜히 협박까지 하면서.”
예리한 척하는 어린 목소리에서 확신이 묻어났다.
부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참 협박을 잘하는구나.”
‘그러고 보니까 나 칼바도스도 협박했구나.’
칼바도스와 나는 서로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미로 정원에 숨어 있는 그에게 함께 황자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황제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옛 기억을 떠올린 칼바도스는, 그날이 재밌는 추억이라도 된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질문을 이었다.
“왜 루카스를 부른 거야?”
너는 네 동생과 놀고 싶어 하고, 네 동생은 너랑 놀고 싶어 해서.
그런데 둘 다 어른들 눈치를 너무 많이 봐서.
‘너희 둘의 사이가 원만하게 유지되고 슈아가 그 끔찍한 죽음을 피한다면, 루카스가 황위를 노리는 일이 사라질 테니까.’
슈아가 내 곁에 있는 한, 루카스는 내 손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칼바도스의 편에 선 나는, 그렇게 루카스를 죽이지 않고도 루카스라는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길었던 생각과 달리 입 밖으로 나온 답은 짧았다.
“늘 우리 둘이서만 노니까 셋이서도 놀아 보고 싶었어. 넌 오늘 재미없었어? 난 재미있었는데.”
“재미있었어.”
제 나이다운 천진한 목소리와 수줍은 미소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칼바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딱 루카스까지만이야. 더 늘리지는 말자.”
“아, 그래.”
그럼 여기가 네 집인데 내 마음대로 뭘 어쩌겠니.
배동인 내가 칼바도스의 수락 없이 황자궁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면 그건 실례였다.
‘루카스는 예외였지.’
나는 칼바도스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칼바도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똑똑―
칼바도스의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돌아가실 시간이 됐습니다.”
“이만 가시죠, 아가씨.”
바깥에서 칼바도스의 시종과 체르티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나가 겉옷을 입혀 주었다.
방 안을 떠나기 전, 나는 칼바도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초대장 쓸게. 다음에 보자.”
“응. 기다릴게.”
언제나 먼저 몸을 돌렸던 칼바도스는, 언제부턴지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는 루나, 체르티, 리온과 함께 황자궁을 나서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차에 오르자 맞은편에 앉은 리온이 내 손에 들린 리본을 번갈아 보았다.
1황자궁에서 목 주변의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풀어 헤친 리본이었다. 셔츠 단추 두 개는 진작 푼 뒤였고.
손이 심심했던지라 리본을 매만지고 있자, 그걸 본 루나가 물었다.
“이건 왜 푸셨어요? 다시 묶어 드릴까요?”
“아니. 목이 너무 답답해서 풀었어.”
“죄송해요, 너무 세게 묶었나 봐요.”
마차가 덜컹이는 순간, 손에서 리본이 툭 떨어졌다.
리본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숙인 리온이 내 손에 리본을 쥐여 주며 물었다.
“전생에 교수형을 당하면 그렇다는데. 못된 짓 하셨죠?”
“그럴 리가.”
체르티가 리온에게 핀잔을 주기 전, 나는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비웃듯이 답했다.
전생에 교수형을 당하다니. 그럴 리 없다. 나는 교통사고로 죽었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엘렌시아는 목이 매달린 채 죽었지.’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두 번째 생이, 사형당한 엘렌시아의 두 번째 인생이라면.
이 속박에 가까운 실체 없는 갑갑함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으리라.
승차감이 나쁜 마차가 아닌데, 오늘따라 마차가 덜컹거렸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평온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리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슈아는 나와 약속한 대로 슈바와 함께 공작저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