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8화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자 루카스는 침대 옆에 놓인 종을 울렸다.
“전하, 무슨 일이세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11시가 조금 넘은 밤, 조금은 허술한 시종인 시하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금 깼는데 잠이 안 와. 어머니한테 가자.”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잠이 안 온단 말이야……. 그리고 어머니는 지금 안 주무실 거야. 어머니랑 산책 한 번만 하고 오면 잠이 올 것 같아.”
루카스가 칭얼거리자, 곤란해하던 시종들은 황후궁에 연락을 넣기로 했다.
“황후 마마께서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주무시는 거예요. 알겠죠?”
“응.”
하지만 황후가 루카스의 방문을 거절할 리 없었기에 시종들은 연락을 기다리면서 황후궁으로 갈 준비를 했다.
잠시 뒤, 달빛 아래에 선 카밀라는 황후궁 정원에 도착한 루카스를 반겼다.
“어마마마께 태양신의 가오가 있기를.”
어른스러워 보이려 하는 모습에 카밀라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상냥하게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그럴 땐 가오가 아니라 가호라고 한단다.”
“그럼 둘 다 가지세요!”
귀여운 대답에 카밀라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을 안아 들었다.
루카스는 어머니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우리 루루는 어쩜 이리도 귀여울까. 그래. 나는 두 개 다 챙기마. 가오든 가호든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신의 가호라고 해야 한다, 알았지?”
“네.”
“그나저나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비밀이에요.”
길거리 친구들에게 배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카밀라의 질문이 길고 깊어지기 전, 루카스가 먼저 눈과 말을 돌렸다.
“어머니. 저요, 하고 싶은 걸 찾았어요.”
“그게 뭐니?”
카밀라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서렸다.
커서 강아지풀이 되고 싶다고 답한 적이 있는 어린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입을 꾹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엔 무슨 말을 할까?
카밀라는 개구리를 싫어한다. 하지만 루카스가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녀는 개구리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얼마 안 가 개구리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곧 루카스의 입이 열렸고 아들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카밀라가 귀를 기울였다.
어린 아들의 작은 입에서 커다란 꿈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저는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해 주고 싶어요.”
아픈 사람들을?
짐작하지 못한 아들의 꿈에 당황했으나 카밀라는 곧 자애로운 미소를 걸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루루는 의원이 되고 싶은 거구나.”
“네. 해도 돼요?”
해도 괜찮은 거예요? 루카스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카밀라는 루카스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루카스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루카스는 그런 어머니의 손이 먼지떨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먼지떨이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툭툭 두드리면 먼지와 같은 고민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같았다.
“물론이지. 네가 강아지풀이 되겠다고 하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강아지풀의 어머니가 될 것이고, 네가 의원이 되겠다고 하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의원의 어머니가 될 거란다. 가장 중요한 건, 너의 행복이야.”
“하지만 외숙부님이 화를 내면 어떡해요?”
“그 사람이 너한테 화를 낸 적이 있니?”
“…….”
루카스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밀라는 조심스럽게 루카스를 내려놓고 제법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루루.”
“그게요…….”
“루카스. 솔직하게 말하렴.”
카밀라의 굳은 표정은 루카스가 그동안 속에 담아 둔 두려움과 서러움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곧 녹음이 담긴 초록빛 눈에 작은 이슬 하나가 맺히는가 싶더니 눈에 띄게 이슬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 저는, 저는 형님이랑 놀고 싶었는데…… 1황자궁에 다녀왔다고 화를 내셔서어, 딸꾹-”
“1황자 궁에 다녀온 것을 네가 직접 말씀드렸니?”
“아니요, 한 번도 말 안 했는데에…….”
“미안하구나. 내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루카스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는데. 오라버니는 어떻게 그걸 알고 계셨을까?
‘2황자궁 시종들을 갈아치울 때가 됐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카밀라는 루카스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후작이 2황자궁에 출입할 수 없도록 지시해야 할 것 같았다.
아들까지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게 둘 순 없다. 그녀의 아들은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아들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지금 그녀의 아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1황자와 놀고 싶었다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루카스의 부탁을 쉽게 들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걸 어쩐담.’
갑자기 1황자를 찾아가서 자신의 아들과 놀아 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루루가 자연스럽게 1황자를 만나서 놀 수 있지? 1황자와 오찬 자리라도 마련해 봐?
하지만 그녀는 1황자와 무척이나 어색한 사이였다.
‘괜히 1황자를 독살하려 한다고 오해를 받는 건 아닌지 몰라.’
별생각 없이 한 행동으로 오만가지 오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열이 솟았다.
카밀라는 아주 어려운 숙제를 직면했다.
하지만 그런 카밀라의 걱정과 다르게 루카스는 칼바도스가 있는 1황자궁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내일, 1황자 궁으로 돈과 망토를 돌려주러 오지 않으면, 황궁을 몰래 빠져나간 사실을 일러바칠 거라고 협박한 아주 무서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오후 3시 5분.
1황자궁의 편안한 소파에 걸터앉은 나는 묵묵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시계만 봐? 혹시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시계를 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루카스가 언제 오려나. 3시에 입궁한다 했으니까 곧 찾아오겠지?’
망토와 돈을 빌려 간 루카스가 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꾸만 시계를 바라보자 칼바도스가 먼저 물었다.
“밖은 추우니까 오늘은 안에서 놀자. 뭐 하고 놀래? 책-”
“저번에 했던 카드 게임 할까? 한 판만 하려다가 열다섯 판 한 그 게임.”
칼바도스의 입에서 책 읽자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말을 끊었다,
이전번엔 칼바도스가 함께 책을 읽자고 하기에 어떤 재미있는 책을 가져올까 잔뜩 기대했더니 시종이 샌드위치보다 두툼한 철학책 한 권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는 못 놀아.’
현대 문물의 검은 액정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남자 주인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
카드 게임을 하자는 말에 칼바도스가 직접 서랍 안에서 카드를 꺼내 왔다.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펼친 뒤, 나와 칼바도스는 마구잡이로 카드를 섞었다.
우리가 열심히 카드를 섞던 그때, 바깥에 서 있던 시종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전하, 2황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루카스가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루, 루카스가?”
태연한 나와 달리, 칼바도스의 손에서 섞이고 있던 카드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루카스가 찾아왔다는 시종의 말에 칼바도스는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들떠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황자다움에 집착하는 그는 방정맞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루카스를 들여보내라는 허락의 말을 꺼내려던 것도 잠시, 칼바도스가 나를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들어오라고 해도 돼?”
너도 가끔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지, 도덕 교과서를 2회독은 한 친구구나.
칼바도스와의 첫 만남을 되짚어 보니, 먼저 온 손님인 나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기꺼울 지경이었다.
“당연하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루카스는 칼바도스가 아닌 나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니까.
잠시 뒤 시종이 문을 열었고, 루카스가 어색하게 방 안에 들어섰다. 칼바도스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누님한테 이걸 돌려줘야 해서…….”
오랜만에 칼바도스를 만난 것인지, 어색함에 루카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꼬았다. 그 모습이 꼭 꽈배기 같았다.
“네가 이 녀석을 어떻게 알아?”
설마 자기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실망한 건가?
칼바도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고,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루카스 대신 내가 입을 열었다.
“전에 따로 만난 적이 있어.”
말이 길어질 것을 걱정한 루카스가 내 손에 돈주머니와 망토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럼 나는 이만……!”
아니 그냥 가려고?
‘네가 이대로 가면 안 되지!’
내가 왜 너를 협박해 가면서까지 1황자궁으로 불렀는데!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서 루카스가 1황자궁을 찾게 만든 뒤, 칼바도스와 붙여 놓기 위함이었다.
나는 루카스가 이대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고, 칼바도스도 루카스가 돌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루카스 역시 칼바도스와 함께 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돌아가려 하는 이유는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모두 원하는 상황을 자리에 없는 사람 때문에 피할 이유는 없었다.
루카스의 팔을 붙잡은 내가 테이블 위의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올 줄 알고 세 명부터 할 수 있는 게임을 준비했는데, 이대로 가면 곤란하지.”
“맞아. 이건 세 사람부터 할 수 있는 게임이야. 네가 있어야 해, 루카스.”
칼바도스가 가세했다. 의외로 이런 면에서 칼바도스와 호흡이 잘 맞았다.
그렇게 나와 칼바도스는 두 명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게임을 두고 세 사람부터 할 수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꼭 못된 형과 누나가 가여운 동생을 괴롭히는 모습 같기도 했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기세에 얼어붙은 루카스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딱 한 판만 하고 갈게.”
‘딱 한 판만 하고 간다고?’
딱 한 판이라니.
‘그건 불가능하지.’
딱 한 판이라는 루카스의 말을 들은 나와 칼바도스의 시선이 부딪혔고, 우리 둘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루카스가 남는다는 기쁨에 우리 두 사람은 비열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미리 짠 것처럼 행동을 맞췄다.
“그래, 그러자.”
“그럼 일단 저기 앉아.”
나는 루카스를 꾹꾹 눌러 앉혔고, 칼바도스는 다시 한번 카드를 섞었다.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기나긴 노름의 길을 되돌아보면, 한 판이 두 판이 되고 세 판이 되는 미래가 우스울 정도로 뻔했기 때문이다.
루카스, 넌 오늘 집에 못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