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7화
아버지 같은 게 없다고?
충격적인 루카스의 발언에 놀란 것도 잠시, 실실 웃으며 나와 칼바도스에게 벌을 내리는 황제의 낯짝을 떠올린 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웃기고 있네. 얼마 전에 황제 만나고 왔거든!’
졸지에 황제는 고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루카스의 사정을 아는 나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루카스 입장에선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내 생각보다 황제의 사랑과 관심을 포기한 시기가 빨랐다.
“그럼, 형이나 누나는 없고? 외동이야?”
위로 형이 하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형을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그렇게 물었다. 일찍이 단념한 소년의 얼굴에 미련 섞인 그림자가 비쳤다.
“……모르겠어.”
아니야,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황궁에 앙칼진 놈 하나 있을 거야.
밤중에도 불을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번쩍거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존재감을 뿜어내는 그 녀석을 모를 수가 없었다.
칼바도스의 생각만으로도 이 거리가 쨍쨍해지는 것 같아서 얼굴을 찌푸린 그때,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아가씨!”
리온과 함께 나를 따라 나온 체르티가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함께 달려온 리온과 그녀가 헐떡이는 숨을 고르는 것도 잊고 나를 살폈다.
멀쩡한 나를 본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비친 것도 잠시, 곧 엄격한 기사의 얼굴이 자리를 잡았다.
“이 아이는 누굽니까?”
“방금 새로 사귄 친구야.”
태연하게 답하자 체르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돌아가자는 체르티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가 다급하게 내 소매를 붙잡았다.
“집에 갈 거야……? 나하고는 안 놀고?”
나랑 놀고 싶은가? 하지만 밤중에 황자가 사라진 게 알려지면 황궁이 뒤집힐 거다.
나는 어렵게 루카스의 보드라운 손을 밀어냈다.
“어. 그러니까 너도 이제 집에 가. 늦었잖아.”
그나저나,
‘나하고는’ 안 놀고?
마치 내가 루카스 말고 다른 사람과는 놀아 줬다는 말투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루카스를 바라보자 루카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으로 땅을 찼다.
“그치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집에 안 돌아가면 너희 어머니가 걱정하실 거야.”
“……알겠어. 집에 가면 되잖아.”
어머니.
어린 루카스의 고집을 꺾은 것은 긴 문장이 아닌 하나의 짧은 단어였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 내민 것이 가엽게 느껴졌다.
‘감기에 걸려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끙끙 앓았다고 했던가.’
새하얀 입김이 까만 밤하늘에 잡아먹히는 듯한 광경에 나는 급히 붉은 망토를 벗어 루카스에게 둘러 주었다.
“이건 왜…….”
“감기 걸릴까 봐.”
나는 붉은 망토를 뒤집어쓴 루카스를 관람하듯 바라보았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못된 늑대를 만날까 봐 걱정이 되어서, 다시 망토를 빼앗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봐……?”
“너는 이름이 뭐야?”
루카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내 질문을 했다.
이름을 알면서도 물은 이유는 하나다. 루카스는 아직 나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나는 루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루루라고 불러.”
루루라니.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형의 목숨을 노린 독기 품은 2황자의 애칭이 루루라니!
‘너무 깜찍하잖아.’
미래의 모습과 대비되는 깜찍한 애칭과 현재의 귀여운 모습을 눈에 담은 내가 주먹을 움켜쥔 채 손을 떨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루카 너 말이야, 형이나 누나가 있냐는 내 질문에 왜 모르겠다고 답했어?”
루카스는 분명 아버지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형이 있냐는 내 물음에 그는 모른다고 말했다.
‘없다고 생각하면 그냥 없다고 답하면 그만일 텐데.’
황제에게 선을 긋는 것과 달리, 칼바도스에게는 선을 긋지 않은 듯한 발언이었다.
루루라는 애칭을 입에 담던 귀여운 미소도 잠시, 칼바도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축 처진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걸쳐졌다.
“나, 나만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떡해.”
그럴 리가.
적어도 내가 아는 칼바도스가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루카스는 눈가를 가린 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외숙부님이 화낼 거야. 나도 형이랑 놀고 싶은데…….”
나‘도’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내 얼굴을 아는 듯이 굴더니. 역시 루카스는 내가 칼바도스의 배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루카스의 외숙부라면, 레이몬드와 레이델의 아버지인 메릴 후작이다.
칼바도스와 루카스는 본인들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의 사정에 휘말려 버렸구나.
“외숙부님이 무서워서 형이랑 못 놀겠다는 거야?”
“응…… 외숙부님이 어머니한테도 화내면 어떡해.”
“그럼 너희 어머니도 똑같이 화내시겠지.”
훌쩍이던 루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화 안 내.”
너는 네 어머니를 잘 모르는구나.
‘나도 처음엔 카밀라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물론 황후 카밀라는 아주 유약하고, 평생을 메릴 후작에게 휘둘리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휘둘리기만 하던 그녀는 자유를 빼앗기고 황후 자리에 올랐다.
시간이 흘러, 제 품에 안긴 어린 루카스를 본 카밀라는 맹세했다.
이 아이에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자유를 주겠다고. 그러니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게 해 주겠다고.
약하고 겁이 많았던 카밀라는, 루카스가 태어난 순간부터 강해졌고 용감해졌다.
소설에서 카밀라는 황제가 되겠다는 루카스의 뜻을 지지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그녀가 루카스의 뜻을 지지한 이유는 간단했다.
루카스가 그걸 원하니까.
그래서 카밀라는 무엇이든지 했다.
루카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루카스의 존재는 카밀라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루카스가 칼바도스와 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카밀라는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고 후작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후작과의 연을 이어온 이유는, 언젠가 루카스가 원하는 것을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 줄 수 없을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밀라와 루카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와 레이델이 떠올랐다.
카밀라와 레이몬드 둘 다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뒤 용감해졌으니까.
‘참 신기하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그렇게 헌신할 수 있다는 게.’
아마 난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을 거야.
그런 자조 섞인 생각을 접고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갚을 돈이 있지.”
의원을 부른 돈은 슈아가 아닌 루카스가 갚기로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루카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망토도 돌려줘야 하고.”
망토에 잡아먹힌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어. 난 내일 오후 3시에 1황자궁을 찾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 돈이랑 망토를 직접 돌려주러 와. 네가 직접 돌려주지 않으면 나는 네가 도둑놈이라고 소문을 낼 거고, 황자인 네가 몰래 황궁 밖에 나다니는 것도 일러바칠 거야. 알아들었어?”
“진짜 못됐다…….”
협박하는 나를 원망하던 것도 잠시,
“아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어떻게? 왜 알면서 말 안 했어?”
루카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너도 내가 네 형의 배동이라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했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나는 원래 다 알아. 그러니까 다른 비밀 안 들키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응!”
협박이었는데. 순진한 루카스는 영혼이 빠져나오기 직전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루카스와 다음 만남을 기약한 나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
“휴우.”
비밀 통로를 이용해 들키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 루카스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땀을 식혀야 했기에 루카스가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자신을 협박한 사람이 건넨 망토를 벗어 서랍 안에 숨겼다.
‘추워.’
생각보다 땀이 빨리 식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던 루카스가 몸을 떨며 창문을 닫았다.
‘오늘도 안 들켰나 봐.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루카스가 포근한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취침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으나, 루카스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망토를 돌려주기 위해 형님의 궁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아까 의원이 보여 준 풀이 무슨 풀이었지?’
시간 개념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호기심 때문이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일전에 카밀라가 루카스에게 물었다.
카밀라는 ‘황제’라는 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 질문엔 루카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루카스가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었다.
어느 날은 지루한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 허름한 거리에서 또래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들은 루카스와 달랐다. 아파도 쉽게 의원을 부를 수 없었다.
‘친구들이 안 아팠으면 좋겠어.’
식사 중 우연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후작은 루카스가 훌륭한 황제가 될 거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후작은 루카스가 무슨 말을 꺼내도 황위와 연관 지었다.
외숙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루카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앉는 의자는 무서웠다.
의자를 향한 높은 계단을 오르다가, 의자에 채 앉기도 전에 미끄러지고 말 것이다.
어찌어찌 그 자리에 앉는다 해도, 그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루카스는 두 번 다시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뱉을 줄은 모르고 삼키는 법만 안다는 듯이 꾹꾹 밀어 넣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의술은 신의 뜻과 싸우는 학문 학문이지. 이보다 더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아?’
황제가 아니어도 제국의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황제와 달리 그들을 직접 살피고,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머니. 저는 오늘 그 답을 찾은 것 같아요.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닌데 루카스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른 길을 향해, 새로운 길을 향해, 더 좋은 길을 향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이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그 길이 쭉 뻗은 직선이든, 굽이굽이 휜 곡선이든.
그가 선택한 길은 틀림없이 그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행복을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