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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6)화 (16/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6화

그가 걸친 옷은 황족의 옷이 아닌 평민의 옷이었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칼바도스의 유년 시절을 다룬 에피소드의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으니까.

골목 쪽에 서 있는 사람은 엘렌시아의 약혼자가 되는 2황자 루카스였다.

‘황궁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 있지?’

“아, 아가씨!”

너무 놀란 나머지 루나의 손을 놔 버리고 인파를 헤치며 2황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발이 먼저 루카스의 뒤를 쫓았다.

“어?”

잠시 뒤, 루카스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나는 루카스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루카스는 한 여자아이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근처에 다가온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슈바 형이 아프다고?”

“응. 이마가 너무 뜨거워.”

윤기 잃은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다 오빠가 죽으면 어떡하지?”

슈바라고?

아.

지금 이게 어떤 장면인지 알겠다.

루카스는 어린 시절, 황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거리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루카스의 과거에 대해 짧게 서술되어 있었지.’

그래서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린 루카스가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위로하듯 말했다.

“내가 돈을 가지고 내일 또 올게.”

루카스는 오지 못할 것이다.

“그때 의원을 부르자.”

의원도 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럼 슈바 형도 금방 나을 거야.”

슈바 역시 낫지 못할 것이다.

감기에 걸려 앓게 된 루카스는 일주일 뒤에야 황궁을 탈출한다. 겨우 밖으로 나온 루카스가 여자아이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슈바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미안해, 내가 꼭 내일 올게, 응?”

“루카 너 이래 놓고 맨날 못 오잖아! 대체 어디 살아?”

“그게…….”

깊은 생각의 여백 사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어렵게 빠져나온 만큼, 자신이 황자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은 듯했다.

“크흠, 큼!”

보다 못한 내가 헛기침을 하며 모습을 드러내자, 루카스와 여자아이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돈이 필요한 거면 내가 빌려줄까?”

돈주머니를 루나에게 맡기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더듬듯이 바라보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알아?”

“아니, 처음 봐.”

거짓말이다.

틀림없이 어디선가 나를 본 적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황궁에서 나를 본 건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루카스가 나를 어디서 봤는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는지가 아니었다.

루카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꼭 갚을게. 그러니까, 제발 도와줘.”

*

잠시 뒤 우리 셋은 의원과 함께 아픈 슈바가 있는 집 안에 들어섰다. 방 안은 서늘했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밤이 되었음에도 등을 밝히지 않아 집 안이 깜깜했다.

그러나 밤이 아니어도 이 집은 어두울 것이다. 해가 떠도 해가 들지 않을, 외지고 창 없는 집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허름한 집 안을 돌아다녔고, 의원은 끙끙대는 슈바의 옆으로 다가갔다.

“까다로운 병에 걸렸구나.”

“그럼 형은 이대로 죽는 거야?”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죽음을 참 쉽게 입에 담았다.

갑자기 가라앉은 루카스의 얼굴에 그녀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니. 20년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살 수 있다. 의술이 발전했으니까.”

“정말? 의술이란 게 그렇게 대단해?”

밝아진 목소리에는 친구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뿐만 아니라 감탄 역시 담겨 있었다.

“의술은 신의 뜻과 싸우는 학문이지. 이보다 더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의원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묻어났고 루카스의 눈이 반짝였다. 신의 뜻과 싸운다는 말이 멋있었나 보다.

그는 의원의 손에 들린 약초를 보며 물었다.

“그 과일 이름은 뭐야?”

“이건 힐칸 열매. 이마가 뜨거울 때, 열을 내리는 데 써.”

“이거는? 이 풀 이름은 뭐야? 이건 어디에 써?”

의원은 귀찮은 척하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루카스의 눈동자는 아주 오랫동안 빛을 잃지 않았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의자에서 루카스를 바라보다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굽신거리는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

“제 이름은 슈아예요.”

그래, 슈아.

이름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소설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여자가 한 명 있었다. 2황자 루카스의 첫사랑이자, 루카스가 황제에게 대항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계기.

성인이 된 슈아는 어느 귀족에 의해 끔찍한 일을 당해 죽게 된다.

하지만 백작의 손자였던 그는 처벌받지 않았고, 루카스는 몹시 분노한다. 그래서 황후를 통해 백작의 사업을 저지하려 했지만, 황제 디에고가 관련 귀족 회의를 강제 해산시킨다.

칼바도스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황제의 비밀 자금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루카스는 디에고에게 크게 실망하고 만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 또한 없을 거라고 믿어 온 루카스는 평소에 황제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디에고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황위를 욕심내지 않고 조용히 살면, 언젠가는 바라봐 주실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루카스는 황제를 향한 모든 기대를 버린다.

루카스는 디에고가 가장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순간을 떠올렸고, 얼마 안 가 결론을 내린다.

칼바도스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는 것.

그렇게 된다면 디에고는 절망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

결국 루카스는 외숙부인 메릴 후작을 찾아가고, 훗날에는 엘렌시아와도 손을 잡게 된다.

‘미치겠네.’

뒷이야기를 현실로 직접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태연하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오빠랑 둘이 사는 거야?”

“아뇨, 원래 한 달에 한 번씩 아빠가 오시는데…….”

한 달에 한 번?

“이번 달에는?”

“편지만 왔어요.”

“읽어 봤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기셨대?”

그러자 슈아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글씨 모르는데…….”

“내가 읽어 봐도 될까?”

나는 슈아의 허락을 받은 뒤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펼쳤다.

잠시 뒤, 짧은 편지를 정독한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유서잖아.’

다시 내용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유서였다.

도박장에서 모든 돈을 잃어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고. 그래서 나는 이제 죽을 거라고. 너희에게 빚을 남기지 않았으니 나는 이 바닥에서 꽤 좋은 아버지였다고.

그렇게 적혀 있었다.

‘미친놈 아니야?’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놈이 있을 수 있지?

큰일 났다. 내 생각보다 편지의 내용이 심각했다.

솔직하게 편지의 내용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바쁘셔서 꽤 오래 못 오실 것 같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슈아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슈아가 울음을 터뜨리기 전 냉큼 말을 걸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셔?”

“엄마도 그랬어요. 바빠서 못 온다고 했는데 아직도 못 왔어요.”

역효과였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작은 얼굴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한 번 울음을 터뜨리면 그칠 때까지 달래 줘야 하는 나이의 아이다. 그럴 자신이 없어 대신 나는 계속 말을 걸었다.

“있잖아. 그럼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자. 혹시 슈아 너는 잘하는 게 있어?”

슈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쉽게 찾지도 못하는 법이다. 잘하는 것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면 더더욱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 슈바는?”

“오빠는 ‘척’을 잘해요.”

“척?”

“아픈 척, 불쌍한 척, 좋아하는 척, 맛없는 걸 먹으면서도 맛있는 척…… 그런 걸 잘해요.”

“오…… 그거 굉장히 쓸만한데?”

비꼬는 게 아니다. 척을 잘한다니. 그건 정말로 쓸모 있고, 좋은 재능이었다. 눈을 뜬 슈바의 모습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두 사람을 저택으로 데려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

데려갈 방법을 떠올리던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있잖아.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아버지께 부탁해서 너랑 슈바를 우리 집으로 부를게.”

약속.

공작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슈아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슈아는 바로 손가락을 걸었다.

*

슈바의 치료가 끝난 뒤, 나는 일행에게 돌아가기 위해 슈아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나를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누님, 누님은 귀족이지?”

바로 루카스였다.

걸음을 멈춘 내가 루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날카로워 새침한 구석이 있는 칼바도스와는 반대로, 그는 순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정말 황제를 하나도 안 닮았네.’

황후만 쏙 빼닮은 건가?

내 시선을 느낀 루카스가 순진하게 물어왔다.

“왜 그렇게 봐?”

“그냥 귀엽게 생겨서 봤어.”

네가 주인공이었어도 나는 이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고.

귀엽다는 말보다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칼바도스와 셀레네, 레이델이 아닌 루카스 네가 주인공이었다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황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슬픔을 느끼고, 아버지의 권력에 저항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에서 네가 승리할 수 없었던 건, 네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야.

이 세계의 주인공이 루카스였다면, 악역은 황제였을 것이다.

소설에선 디에고가 하룻밤 실수를 저질렀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터놓고 말하면 머리가 술에 절어 버린 그가 아랫도리를 잘못 놀린 것이다.

디에고는 가여운 남자로 그려진 건 그가 남주인공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며, 이 이야기가 세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눈을 떼려 했으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여운에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그런 나를 향해 루카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다시 물었다.

“내가 귀여워?”

“응. 귀여운 척하는 거야, 아니면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거야?”

“귀여운 척 안 했는데…….”

“타고났구나.”

그렇게 읊조린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참 후에도 등 뒤쪽에서 루카스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자꾸 따라오는 거지?’

호위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루카스가 사라진 걸 알면 황자궁에 난리가 날 게 뻔했다. 어쩌면 벌써 들켰을지도 모르지.

짧은 생각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랑 아버지가 걱정하실 텐데. 이제 집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황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며 친절하게 귀가를 권유하자,

“난 아버지 같은 거 없는데.”

나이에 맞지 않는 우울함을 입꼬리에 걸친 루카스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황제의 부고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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