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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5)화 (15/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5화

바람이 불면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날이 추워졌을 무렵이었다.

실내에서 얌전히 떠드는 것이 지겨웠던 나머지, 추위에도 불구하고 나와 칼바도스는 바깥에서 공을 주고받으며 놀기로 했다.

공놀이를 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칼바도스와 나는 황자궁 근처를 함께 걸었다.

“저번에 봤을 땐 여기에 제비꽃이 피어 있었던 것 같은데.”

날이 추워 죽은 모양이다.

내가 비어 있는 땅을 툭툭 차자, 옆에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보라색이 싫어.”

“보라색도 너 싫어해.”

그렇게 답하곤 걸음을 계속하자, 칼바도스는 따라오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싫냐고 물어보지 않나, 보통?”

아.

‘나한테 이유를 말하고 싶은 거구나.’

나를 이유 없이 ‘그냥’ 싫어한다고 말했던 그가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꼭꼭 숨기면서 살던 칼바도스가 나한테 뭔가를 말해 주고 싶어 하고 있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보단 마음을 연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대로 몸을 돌리곤 물었다.

“왜 싫은데?”

“너는 내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너한테만 말해 주는 비밀이야.”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칼바도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뒤따르는 시종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사실 나는 가지를 엄청 싫어하는데, 가지 요리를 억지로 먹다가 토했거든. 그래서 보라색이 싫어졌어.”

가지 때문에 보라색까지 싫어졌다니. 그런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고 그런 이유도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봤다.

황당한 이유였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억지로 먹었다고?

물론 황족인 그가 대놓고 음식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억지로 먹고 토까지 할 이유가 있나? 칼바도스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을 만한 이유가…… 아.

“혹시 폐하랑 식사 중이었어?”

“어떻게 알았어?”

칼바도스의 눈이 커졌다.

“가지도 못 먹는 아들을 뒀다고 실망하실까 봐 억지로 먹은 거야?”

용한 점쟁이를 보기라도 한 듯, 칼바도스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이. 나는 파프리카를 안 먹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도 나한테 실망 안 했어.”

“리베르트 공작도? 공작은 엄청 엄할 것 같았는데…….”

“야, 내가 소수민족을 배척한 것도 아니고 샐러드에 든 파프리카 하나 골라냈는데. 고작 그거 가지고 나한테 실망하면 우리 아버지가 이상한 사람 아니야?”

공작은 그저 편식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네. 내가 아버지를 너무 의식하고 있었나 봐.”

칼바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황자궁 뒤쪽 뜰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은 저기서 던지자.”

“저기서? 그래.”

수풀이 거슬리긴 했지만 큰 실수를 하지 않으면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종들이 뒤를 따랐고, 내 손에 공을 쥐여 준 칼바도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얘, 도스야.”

내가 던진 공을 받은 칼바도스가 짧게 답했다.

“왜.”

“너, 황궁 밖에 놀러 나가 본 적 있어?”

“없는데. 왜?”

그럴 줄 알았다.

황제가 칼바도스를 황궁 밖으로 내보낼 사람이던가.

하긴. 메릴 후작이 2황자 루카스를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지금, 칼바도스가 바깥을 자유롭게 나도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냥, 우린 매번 황궁에서만 노는 것 같아서.”

“……그 말은, 공작저에 날 초대하겠다는 소리야?”

얘기가 그렇게 되나?

‘난 어디든 좋으니 밖에서 놀고 싶단 뜻이었는데.’

황궁이나 공작저나 실내라는 점에선 큰 차이가 없지 않나?

하지만 그럼에도 칼바도스는 조금 들떠 보였다.

황궁 밖에서 놀고 싶었나?

“뭐, 오고 싶으면 나중에 한 번 오든지 해.”

적선하듯 말하는 내 말에 칼바도스가 눈을 흘겼다.

“네가 황족인 나를 저택에 초대하는 입장이잖아. 조금 더 간절하게 말하란 말이야.”

“예. 미천한 저희 집에 귀한 발걸음을 해 주십쇼, 제발.”

“영혼이 안 담겨 있잖아.”

황족이라서 그런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절차나 제도 얘기를 꺼낸다 싶더니, 이번엔 간절함과 영혼의 유무까지…… 하여간 따지는 게 많은 녀석이었다.

“오기 싫으면 말아라. 난 오빠랑 놀면 되니까.”

“……싫다곤 안 했어! 그리고 나도 너 없으면 내 도, 동ㅅ-”

오지 말라는 말에 당황한 탓일까. 칼바도스가 공을 놓쳤고, 그 바람에 칼바도스의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공이 칼바도스의 손에 맞아 튕겨져 나오는 바람에 공이 굴러간 곳은 내 쪽이랑 더 가까웠다.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더 둔해질 것 같았기에, 나는 시종이 공을 주우러 가기 전 칼바도스에게 말했다.

“내가 주워 올게.”

나는 망설임 없이 수풀 쪽으로 발을 뻗었고, 수풀 한가운데에 떨어진 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방금까지 누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바람도 불지 않는데 저 안쪽 수풀이 살짝 흔들린데다가, 수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향이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떠난 지 오래된 것인지,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 향이 지나치게 옅은 탓에 긴가민가했다.

이상함을 느낀 내가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칼바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찾았어?”

“찾았어. 지금 가!”

나는 공을 주워 칼바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2황자 루카스는 달렸다.

갑자기 제 쪽으로 떨어진 공에 놀란 루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황자궁으로 달렸다. 세찬 바람에 통통한 두 뺨이 붉어져 있었다.

잠시 뒤, 체력이 떨어진 루카스가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형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지?’

좋겠다.

나도, 나도 형님이랑 놀고 싶은데!

루카스는 칼바도스와 황궁 탐험을 나선 날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외숙부인 메릴 후작의 꾸지람을 들은 뒤로는 좀처럼 칼바도스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루카스가 자신을 피하니 칼바도스 역시 주변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다.

그렇게 루카스는 칼바도스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은 너무 놀라서 도망쳤지만…… 내일은 나도 같이 놀면 안 되냐고 물어볼까?’

어쩌면 외숙부님 몰래 셋이서 같이 놀 수 있을지도 몰라.

루카스는 작은 기대감을 품었고, 그 작은 기대감은 루카스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궁으로 돌아온 루카스를 반긴 것은 루카스가 반가워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전하,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지금 후작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외, 외숙부님이 오셨다고?”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 냈다. 루카스는 비명을 토하는 것은 물론, 먹은 것을 모두 토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외숙부를 마주했다.

“어디에 다녀오셨습니까?”

형님과 놀고 싶은 마음에 1황자궁에 다녀왔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루카스가 말을 얼버무렸다.

“어…… 그게, 바람을 쐬러…….”

“설마, 또 1황자궁에 다녀오신 겁니까?”

“…….”

그걸 어떻게 아셨지?

대답하지 못하는 루카스의 표정에서 긍정의 뜻을 읽어낸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전하께선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다른 곳에 마음을 두셔선 안 됩니다.”

“저는 그냥 갑갑해서-”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전하를 보는 제가 더 갑갑합니다!”

큰 목소리에 놀란 루카스가 숨을 들이켰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내쉬는 방법을 잊은 그는, 외숙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들이마신 숨을 머금고만 있었다.

외숙부인 메릴 후작이 떠난 뒤, 예절 선생이 들어와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업 내용은 루카스의 흥미를 잡지 못했다.

예절 선생의 점잖은 목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루카스는 다른 생각을 했다.

‘나도 형님이랑 놀고 싶은데.’

하지만 형님을 만나면 외숙부님은 오늘처럼 화를 내실 게 분명해.

얼마 전에는 어머니께 화를 내셨잖아. 나중엔 어머니를 찾아가서 화를 내실 테지.

어머니는 마음 약하신 분이야. 외숙부처럼 무서운 사람이 황후궁을 찾아가 화를 내면 어머니의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형님을 찾아가지 말자.

형님에겐 친구가 생겼어.

그러니 형님은 나를 잊으셨을 거야.

그 사람이 부럽다.

하지만 괜찮아.

난 어차피 공도 잘 못 던지고…… 검도 잘 다루지 못하니까……. 설령 형님이 나를 기억한다 해도, 나랑 노는 건 재미없어할 거야.

‘슈아랑 슈바 형을 만나러 갈까?’

루카스는 대신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황궁을 빠져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은 어린 루카스를 참 즐겁게 했다.

하지만,

‘……형님이랑도 놀고 싶은데.’

친구와 가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루카스는 멀리 사는 친구보다는 가까운 곳에 사는 형과 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

타인에 의해 마음을 접었으니, 이제 미련이 생기지 않게 그 마음을 다시 펼쳐 보지만 않으면 된다.

가슴 속에 무거운 돌 하나를 올려놓고, 다시는 그 마음을 펼쳐 보지 않으리라.

여섯 살 루카스는 굳게 다짐했다.

*

복사 후 붙여 넣기를 한 것과 같이 똑같은 날들이 꽤 오랜 시간 반복되자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간단하게 아침 운동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수업을 듣고 점심 식사를 한다. 식사 후 산책을 하고 다시 검술 수업을 가는,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으…….”

내가 책상에 앉아 끙끙거리자 문학 선생 블리안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공녀님이 찾으신 『오시세이』와 그에 대한 다양한 평론들이에요. 흥미로워하실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쿵.

결국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어지고 말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공부하기 싫을까요? 창문 깨고 뛰어내리고 싶네…….”

아, 뛰어내리면 카인이 마법으로 받아 주려나.

이 정도로 공부하기 싫었던 날은 없었던 것 같은데.

“뭐, 공부하기 좋은 날도 있으면 싫은 날도 있는 법이죠.”

나는 고개를 들어 블리안이 가져온 책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요청한 것이었지만 문득 그 책들을 모두 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상태를 판단한 블리안이 치료법을 권하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야시장이 열린다는데, 공작님께 말씀드려 보시는 건 어때요?”

“야시장이요?”

반쯤 감긴 눈이 말똥거렸다.

재밌겠다, 야시장.

이곳에 온 뒤로 고정된 활동 범위를 벗어난다는 사실부터가 마음을 붕 뜨게 했다.

야시장이라는 치료약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을 안 블리안이 냉큼 수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리온과 체르티, 루나를 데리고 부푼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

거리에 도착하자 메이 대신 나를 담당하게 된 루나가 물었다.

“아가씨,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아, 아가씨께선 처음이실 테니까 일단 제가 추천-”

“매운 거.”

“네?”

“매운 걸 먹고 싶어.”

공작저 음식은 훌륭했지만, 나에겐 자극적인 음식이 필요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거리 음식을 고르고 고르다가, 나는 루나와 함께 닭꼬치를 해치웠다. 가장 매운 소스를 발랐다는 닭꼬치 두 개를 달달하게 먹어 준 뒤, 거리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을 봐 주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런 걸 믿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가뜩이나 사람이 많던 거리에 사람이 더욱 붐비고 있었다.

“이따 근처에서 공연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유명한 배우가 온다던데.”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잃어버릴 것이 염려된 모양인지, 내 손을 붙잡은 루나가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려 애썼다. 조금 떨어진 뒤쪽에 서 있던 리온과 체르티 역시 예상치 못한 인파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정말 우연처럼 골목에 서 있는 한 소년이 내 시선을 낚아챘다.

“……뭐야.”

지금 이 시간에,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눈알이 튀어나올 뻔한 감각을 느낀 동시에, 시각이라는 감각을 녀석에게 완전히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그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은, 조금 전의 닭꼬치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그러니 저 소년은 밥도둑이 아니라 시선 도둑이라 불려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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