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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4)화 (1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4화

레이델은 글을 쓸 줄 모른다.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건 레이델을 만났다는 간접적인 뜻이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도 잠시, 상황을 판단한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와 달리 제법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신 말씀과 이 편지가 장난이 아니라면, 편지를 쓴 건 메이 양이겠군요. 지금은 메이 양 대신 루나 양이 아가씨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는 장기 휴가를 갔다는 핑계를 댄 메이의 부재를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곧 차분한 모습을 잃고, 레이몬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델은 어디에 있습니까?”

“위치를 알려 드릴게요. 단,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작이 언급되자 레이몬드가 살짝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얼마든지요.”

나는 레이몬드에게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건넸다. 그 나무가 자라는 곳은 남부에 있는 후작가의 영지다.

“레이델이 직접 고른 거예요.”

남부로 떠난 이후로 내내 레이몬드 생각을 하며 직접 고른 선물이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형제애였다. 굳이 마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레이델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레이몬드였다. 이야기가 빨랐다.

그가 돌려 묻지 않았기에 나 역시 바로 말했다.

“메릴 가문의 내부 고발자가 되어 주세요.”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으라는 말에 레이몬드가 아름답게 웃었다.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짓는 미소가 아니라, 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웃음이었다.

“저와 저의 또 다른 삶을 구해 주신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 저 레이몬드 메릴은 언제나 당신의 편에 설 것입니다.”

그런 레이몬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주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다고.

속 보이는 웃음을 꾹 참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고 있던 그때, 아주 약간의 원망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왜 저에게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미리 알려 주셨다면 제가-”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려나?

하지만 레이몬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제가 도울 수 있었을 텐데요.”

‘죽은 동생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

그 말이 나올 만한 타이밍이었음에도 어린 내가 놀랄 것을 염려해 굳이 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마음 여리고 마음 착한 그가 레이델에게 그 사실을 말할 확률 역시 0에 가까웠다.

*

레이몬드보다 먼저 웰링턴의 어느 작고 깔끔한 이층집에 도착한 나는 레이델과 2층 창문으로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창 너머로 어느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를 사랑한 신은 공주에게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힘을 선물했다네. 하지만 공주가 결혼을 거부하자, 신은 그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만들었지. 인간이 신을 사랑해도, 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신의 사랑을 받은 인간은 불행해진다네.”

“대체 누가 이 밤에 노래를 불러?”

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나무 밑에서 한 남자가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곁에 다가온 레이델이 대신 설명했다.

“매일 밤 저 나무 밑에서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쫓아 줄까? 잠 설칠라.”

제대로 된 음식을 챙겨 먹지 못한 레이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햇빛과 영양분을 오래 받지 못한, 작고 앙상한 나무가 내 옆에 심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잠까지 설치면 진짜 키 안 크는 거 아니야?’

내 눈에 어린 걱정을 읽은 모양인지 레이델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는 익숙해져서 자장가 같거든요. 그리고…… 꽤 잘 부르시잖아요?”

“그런가?”

레이델의 미소에 나는 남자를 쫓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네. 누군가는 힘을, 누군가는 꾀를, 누군가는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지고 태어났지. 이름을 알린 그들은 단명하고 말았다네. 아아, 신의 사랑을 받은 이들은 모두 불행해지고 만다.”

자세히 들어 보니, 조금 전 발끈했던 것이 잊힐 정도로 노래는 훌륭했고 가사 역시 인상 깊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

‘그러고 보니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예술가나 기사들 중, 신의 자녀가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수명이 짧은 건가?’

나는 조금 전 남자의 노래 가사를 곱씹었다.

‘이름을 알린 그들은 단명하고 말았다네.’

이름을 알린.

각 분야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신의 자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렇다면 명성을 포기한 채 신의 자녀임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까.

‘신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단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될 만한 업적을 세우고 이름을 알렸기 때문에 단명하는 거구나.’

긴 침묵에 내 눈치를 보던 레이델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찬란한 붉은 마나가 바닥을 휩쓸듯이 맴돌았다.

놀란 레이델이 흠칫하며 내 쪽에 달라붙었고 나는 그를 진정시키듯 말했다.

“너희 형이 왔나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인과 레이몬드의 모습이 드러났고, 매고 있는 가방이 무거웠는지 레이몬드는 방 안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형, 형아……!”

레이몬드를 발견한 레이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제 형에게 달려가 안겼다.

“……기다리고 있었어.”

“미안해, 형이 다 잘못했어.”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레이몬드는 동생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웰링턴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던 레이몬드는 레이델을 재우기 위해 침대에 눕혔다. 혹여 달빛이 동생의 잠을 방해할까 봐, 그는 꼼꼼히 커튼을 쳤다.

“잘 자, 레이델.”

“아니야, 형.”

단호한 레이델의 말에 레이몬드가 이불을 덮어 주던 손을 멈췄다.

“응?”

“에녹. 지금은 이게 내 이름이야.”

레이몬드보다 이 상황을 더 빨리 받아들인 레이델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소개했다. 에녹은 메이가 ‘아는 동생’에게서 받아온 새 신분이었다. 레이델은 큰 비밀을 이야기하듯 레이몬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델은 지금 죽었잖아.”

메릴 후작의 다섯째 아들인 레이델 메릴은 건국제 날 지하실에서 불에 타 죽었다.

물론 레이델이 레이델이라는 이름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되찾기 위해서 숨긴 것이다.

“……그래. 네가 다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형이 열심히 해 볼게.”

그 뜻을 이해했다는 듯 레이몬드가 레이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바로 옆자리에서 슬픈 얼굴로 웃는 레이몬드를 지켜보았다.

마찬가지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열심히 하겠다는 레이몬드의 말에 레이델이 불안한 눈을 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뭘 할 생각이야, 형?”

“뭐든지.”

오늘부로 그는 부모 형제의 등에 칼을 꽂아 가문의 배신자가 되는 길을 걷기로 했다. 그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자신인 레이델을 위해서. 이미 한 번 동생을 잃은 뒤였기에 그는 이전보다 더욱 단단했다.

한참을 동생과 회포를 풀다가 레이몬드가 먼저 방을 나섰고, 나는 침대에 누운 레이델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처량한 눈을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더니 레이몬드가 덮어 준 이불을 헤집고 몸을 일으켰다.

“머, 머리는 왜…….”

“미안. 혹시 기분 나빴어?”

“아뇨. 그럴 리가요. 좋았는데…… 저는 그냥, 때리시는 줄 알고.”

사과를 한 쪽은 나였으나 오히려 레이델이 죄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너를 때려? 나는 그냥 네 머리가 장미 같기도 하고, 단풍 같기도 해서.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나 봐. 미안해.”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요.”

급하게 지어낸 말이었지만, 레이델은 수줍게 웃었다.

“장미가 피는 날에는, 단풍이 드는 날에는, 그럼 제 생각이 나실까요.”

“응. 그럴 거 같아.”

지금 레이델이 뱉은 말 때문에 그가 떠오를 것 같았다.

“저는 새벽마다 공녀님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왜 하필 새벽이야?

그렇게 물으려던 때,

“생각하지 마.”

갑자기 다가온 카인이 레이델의 이마를 꾹 눌러 강제로 침대에 눕혀 버렸다. 레이델이 억울하다는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왜 하면 안 돼요?”

“닳아.”

뭐가 닳아?

‘설마 내가?’

이건 뭐…… 여름이 되면 내가 녹을까 봐 걱정할 사람이었다.

카인의 말대로 내가 닳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키 작은 레이델이 새벽에 깨어 있어서 좋을 것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카인의 의견에 동의했다.

“새벽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자. 푹 자야 키도 크겠지.”

“쓸데없는 생각이라뇨……! 저 그럼…… 공녀님보다 키가 커지면, 그땐 새벽마다 공녀님 생각을 해도 되나요?”

“안 된다고. 넌 귀가 장식이야?”

자꾸만 카인이 끼어들자 레이델이 편을 들어 달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님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 왜 공자님이, 우읍……!”

“엘리! 집에 가자!”

그렇게 카인은 아주 쉽게 레이델의 입을 틀어막고는 나와 레이몬드를 데리고 공작저로 돌아와 버렸다.

*

레이델을 만난 뒤, 레이몬드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후작저로 돌아오라는 렘브로의 독촉과 후작의 연락이 있었기에, 그는 후작저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부 고발을 위해서도 그편이 낫지.’

레이몬드가 후작저로 돌아가는 날, 나는 도서관에서 그와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기 싫었는지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공녀님께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제 형인 렘브로 메릴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레이몬드 님의 셋째 형님이요?”

“네. 제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셋째 형님의 뜻이고요.”

렘브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그가 후작의 가장 큰 신뢰를 얻고 있으며 차기 후작이 될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칼바도스의 적이라는 것. 딱 그 정도다.

아, 새롭게 알게 된 설정이 하나 더 있다. 크게 티가 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는 레이몬드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되니 후작저로 돌아갈 레이몬드가 가여웠다. 나는 레이몬드를 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개의치 않은 듯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이몬드가 도서관을 나서기 위해 나를 등지고 문고리를 잡았다. 불쑥 생각나는 그의 결말에,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예.”

“그 누구도 믿으셔서는 안 돼요.”

사람 좋은 당신은, 믿었던 하인에게 배신당해 아버지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 말에 레이몬드가 살짝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공녀님도 믿으면 안 됩니까?”

믿어도 된다고 하면 믿을 거고, 믿지 말라 하면 안 믿을 건가? 그럼 결국 그는 내 말을 믿는 꼴이 되고 만다.

그 역시 바로 질문의 모순을 깨달은 것인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군요.”

“다음에 만나요.”

레이몬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서관을 나섰다. 나는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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