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3화
“죽으려면 얌전히 죽어야지. 지하실까지 태워 먹고, 아주 민폐가 따로 없구나.”
“그러게요, 형님.”
이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의 레이몬드였다면 고개를 푹 숙이고 울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우는 대신 일그러진 얼굴로 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눈에 담았다.
“레이몬드 너, 어디서 눈을 그런 식으로 뜨는 거냐?”
첫째 존이 성큼 다가와 레이몬드를 내려다보았다. 덩치가 크고 화가 나면 손이 먼저 나가는 형이었기에 레이몬드는 당장 사과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형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었다.
그때, 렘브로가 다가와 이를 막았다.
“그만하시죠, 큰형님. 이런 날 가족끼리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다른 날은 소란을 피워도 좋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레이몬드의 귀엔 렘브로의 가식이 같잖게 들릴 뿐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렘브로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불이 번져서 저택에 남아 있던 너까지 다쳤으면 어쩔 뻔했니.”
렘브로가 나서자 첫째 형이 꼬리를 말았다.
첫째 형에 의해 거칠게 밀쳐진 레이몬드가 휘청거리자, 렘브로가 어깨를 꽉 붙잡았다.
“안타깝구나.”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로 안타깝다고 말하는 모습이 참 뻔뻔했다.
레이몬드는 우물 같은 목구멍에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형님이 그러셨습니까?”
“그 녀석을 저택에 들이자고 아버지께 청한 건 나다. 내 손으로 저택에 들인 녀석을 내 손으로 죽이는 건 번거로운 일이지.”
몇 년 전, 레이델의 어머니가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었을 때, 갈 곳 없던 레이델을 후작저로 들이자 청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렘브로였다.
아끼는 아들인 렘브로의 갑작스러운 청에, 후작은 레이델에게 성을 주고 호적에 올렸다.
레이델을 저택으로 들인 렘브로의 선택은 레이몬드는 의문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렘브로는 번거로운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를 저택에 들여서 렘브로가 득을 볼 일이 뭐가 있지?
레이몬드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번거롭게 집에 들인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이는 것만큼 번거로운 일은 없다. 레이델을 죽여서 렘브로가 득을 보는 일 역시 없다.
‘그러니 렘브로가 레이델을 죽였을 리는 없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렘브로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몬드에게 있어 렘브로는 무섭고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대놓고 화를 내고 소리를 치는 첫째와 둘째보다 더 무서웠다.
렘브로는 그랬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멀리서 지켜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동생이 자살했다는 슬픔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불러온 자괴감에 레이몬드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때, 그의 귀로 낮은 목소리가 꽂혔다.
“레이몬드. 후작저로 돌아와라. 나는 네가 필요해.”
내가 필요하다고? 네가 뭔데…….
내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지기라도 한 것인지 레이몬드는 자신을 어깨를 붙잡은 렘브로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죽음 직전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던가.
고요하지만 위압적인 렘브로의 시선과 목소리에 겁을 먹는 대신, 레이몬드는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것이 레이몬드의 두 번째 반항이었다.
최초의 반항은 아버지를 등지고 공작의 손을 잡은 것이고, 두 번째 반항은 렘브로의 손을 뿌리친 것이었다.
레이몬드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첫째 존이 다니엘에게 말했다.
“난 처음에 레이몬드 저 녀석이 그 천한 놈을 데리고 도망친 줄 알았다.”
“그렇지만 형님, 레이몬드는 그 시간에 리베르트 공작과 함께 황궁에 있었잖아요. 시체도 있고요. 렘브로, 네 생각은 어때?”
쉽게 변하는 법이 없는 렘브로의 얼굴이 아주 잠시 일그러졌다.
레이몬드가 뿌리친 손을 바라보던 그는 생각했다.
‘정말로 죽은 건가?’
레이몬드가 레이델을 빼돌렸을지도 모른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시체 따윈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이몬드에겐 그런 일을 감행할 담력이 없다.
‘눈물만 많은 나약한 놈.’
레이몬드는 겁쟁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게다가 황궁에 있던 시간에 레이델을 데리고 도망친 것이라면, 저택 내에 협력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저택에 레이몬드의 사람은 없다. 그러니 레이몬드가 그랬을 리 없다.
그리고 렘브로가 의심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울던걸요.”
슬픔과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얼굴이 연기일 리 없었기 때문에.
레이델이 죽은 것은 확실하다.
렘브로는 언제나 레이몬드가 우는 것을 지켜봐 왔고, 그 모습은 오늘 또한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날 밤, 슬픔에 잠긴 레이몬드는 자살 시도를 했다.
그것이 레이몬드의 세 번째 반항이었다.
약물에 취하듯이 잠든 레이몬드를 안아 든 렘브로는, 레이델이 죽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
‘레이몬드 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저택엔 동생이 죽은 충격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자살 시도를 하신 모양입니다.’
레이몬드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레이델과 함께 웰링턴으로 떠나기 전, 메이가 전달한 후작가의 소식이었다.
‘내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 형제에겐 서로가 전부라는 걸.
형은 동생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했고, 동생은 형의 복수를 위해 가문을 단죄했다.
성스럽기까지 한 두 형제의 사랑을 잊고 있었다.
다만 형과 동생에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레이몬드의 죽음에도 레이델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 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이몬드에겐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이몬드가 죽는 미래는 변하지 않는 건가?’
내가 어떤 것을 시도해도 소설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지금 칼바도스의 편에 서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레이몬드가 본래의 이야기대로 죽음의 문턱에 서자, 어쩌면 이 절대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지.’
메이는 나에게 자살 ‘시도’라고 말했다. 자살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거다, 레이몬드는.
일이 잘못돼서 정말로 레이몬드가 죽었다면, 레이몬드가 죽은 이유는 그와 계획을 공유하지 않은 내 실수 때문이다.
‘정말 죽기라도 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레이델을 구해 형제의 호감을 사고, 그를 이용해 레이몬드와 거래를 하는 꿩 먹고 알 먹기 작전은커녕, 레이몬드가 죽고 레이델의 반감을 사는 일만 생길 뻔했다.
‘꿩도 놓치고 알도 못 먹는 꼴이지.’
하지만 생각만큼 마음이 무겁지 않은 이유는, 레이몬드의 자살 시도가 내 쪽에 내준 것이 컸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이몬드의 자살 시도로 후작가에선 레이몬드가 레이델을 빼돌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 버렸을 거다.
동시에, 레이델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완전히 지워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메이에게 시킬 일은 하나뿐이다.
‘레이델에겐 절대로 이 사실을 알리지 말 것.’
그렇다면 레이델은 순식간에 나에게 분노의 칼을 갈지도 모르니까.
레이몬드는 절대 레이델에게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다. 후작가 내부에서도 쉬쉬하고 있는 분위기고. 그러니 내 쪽에서 입을 다물면 된다.
나는 그제야 후련한 마음으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뭐지?”
언제부턴가 방 안이 조금 어두워진 것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구나.
바람이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구름이 옮기자, 다시 햇빛이 방 안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따스한 햇빛을 쐬기 무섭게, 누군가가 나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나…… 레이몬드가 죽을 뻔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의 자살 시도가 계획을 완전하게 만들어 줬다는 이유로 기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남의 목숨을 수단으로 삼은 건가?
이런 건 소설 속 엘렌시아와 같은 악역이 할 법한 생각이지 내가 할 생각이 아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엘렌시아와 다를 바가 없다.
생각은 곧 행동이 될 거다. 지금의 내가 소설 속 엘렌시아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언젠가 엘렌시아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거다.
그렇다면, 엘렌시아의 최후대로 내 목에 밧줄이 걸리는 것 역시 한순간이다.
나는 살고 싶기 때문에, 죽지 않기 위해 살아, 반드시 엘렌시아와는 다른 삶을 살 거다.
이제 생각해 보니 왕에게 어린아이들이 보는 소학을 권한 옛 학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도덕책대로만 행동하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겠지.
누가 우리 집 창고에서 내가 초등학생 때 쓰던 도덕책 좀 가져다줬으면 좋겠다.
*
몸을 충분히 회복한 것인지, 레이몬드가 공작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마음을 아는 공작은, 그가 후작저에서 공작저로 빠르게 돌아온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반겼다.
공작은 레이몬드를 다독이며 충분한 휴식을 권했지만 레이몬드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을 해야 생각을 비울 수 있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슬픔을 잊기 위해 레이몬드는 복귀하자마자 공작 부인의 서재에 틀어박혀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웰링턴에 있는 레이델에게서 온 편지를 들고 공작 부인의 서재를 찾았다.
“오늘도 오셨군요.”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던 레이몬드가 내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었나?’
수척해진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니 양심이 찔렸다.
‘그냥 레이몬드한테도 말할걸.’
레이몬드가 공작에게 보고를 하든 말든, 레이몬드에게도 계획을 알렸어야 했다.
이건 내 잘못이다. 내 잘못된 선택으로 레이몬드가 상처를 받은 것이다.
레이몬드의 눈치를 보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레이몬드가 애써 미소 지었다. 그 미소의 끝에 애처로움이 가득 담겼다.
“공녀님께서 이렇게 제 걱정을 해 주시다니. 정말 제가 죽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그는 어떻게든 죽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괜히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죽으려는 사람 같았다.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나는 레이몬드에게 편지 하나를 건넸다.
“레이몬드 님, 이거 받으세요.”
레이델이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동시에, 레이몬드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을 눈에 담자, 상실감으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고요해졌다.
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위로해 주시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 아이는-”
“글을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제 소중한 하인이 옮겨 적었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몬드의 회색빛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