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2)화 (12/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2화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면 공작저가 뒤집혔을 것이다. 카인은 공작저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레이델을 살폈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적던 레이델이 뒤늦게서야 내 시선을 의식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네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레이몬드 님을 생각하고 있었지?”

나를 보자마자 레이몬드의 이름을 부른 것도 그렇고. 레이델은 계속 레이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후작가를 벗어난 지금도 레이몬드를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레이델이 가장 사랑하는 그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곧 레이몬드와 똑같이 생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희 형을 아세요?”

“응. 내가 너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거든.”

정확히는 내가 레이델을 만날 날을 기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그날이 오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형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물에 빠진 지푸라기를 붙잡듯이 내게 물었다.

“……저를, 저를 버린 게 아니래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버리다니. 대체 누가 누굴?

레이몬드는 레이델을 위해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문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런 사람이 레이델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헛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레이델은 꽤나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은 열 밤 뒤에 온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열 밤을 지나도 형이 오지 않아서 버림받은 걸까 봐…… 저는 늘 아홉까지만 셌어요. 그렇게 아홉 번째 밤을 열 번 넘게 센 것 같아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아홉, 아홉…….

이미 레이몬드는 열 밤 뒤에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델은 어떻게든 그 약속을 부여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버렸을 거라는 불안감과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사이에서 말이다.

나는 레이델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내가 아는 레이몬드 님은, 다른 건 다 버려도 너를 버릴 사람이 아니야.”

레이몬드는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레이델을 구할 사람이었다. 아니, 버려서 레이델을 구했었지. 물론 나만 아는 이야기였다.

“형을 만나고 싶어요.”

애절한 레이델의 목소리를 겨우 떨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돼.”

“어째서요……?”

“레이델, 너는 오늘 죽은 거야. 정확히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네가 자살한 것처럼 꾸몄어.”

“……저도 알아요. 지하실에 저를 대신할 시체를 두고 왔잖아요.”

나는 레이델에게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보였다.

“네 장례식이 끝나고 열 밤 뒤. 그때 레이몬드님을 만나게 해 줄게.”

열 밤.

그 말에 레이델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한 번 열 밤이라는 말에 배신당했으니까.

“이번엔 아홉을 한 번만 세도 괜찮아. 열 번째 밤을 피하는 게 아니라, 열 번째 밤을 기다리게 해 줄게.”

열 밤이 지났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워 아홉만 여러 번 셌다. 열이라는 숫자를 알면서도 아홉에 멈춰 서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묻어나는 내 말에 레이델이 침을 꿀꺽 삼키고, 굳게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약속을 지켜 주신다면, 저는 모든 순간에 걸쳐 당신에게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모든 순간에 걸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냥 나중에 빚 한 번 갚으면 된다니까…….’

아무래도 레이델은 빚을 갚으라는 내 말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칼바도스나 레이델이나, 둘 다 쓸데없이 짐을 지려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레이델의 다짐을 쳐 냈다.

“그럴 필요 없어.”

애초에 레이델이 나에게 그런 조건을 달 필요는 없었다.

레이몬드에게 레이델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 레이몬드와 손을 잡기 수월할 것이고, 레이몬드와의 관계에서 내 쪽이 우위를 점할 수도 있으니까.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레이델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바깥바람을 쐬러 나간 메이가 떠올라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

나는 창에 가둬지지 않고 흘러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주 오랜만에 내 옆에 선 메이를 눈에 담았다.

“그동안 고생했어, 메이.”

“아뇨,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맡기신 일을 무사히 끝마쳐서 기쁠 뿐이에요. 그리고, 고작 이런 걸 무서워할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닌데요, 뭐. 예전에 하던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죠.”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데?

나는 엘렌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메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했다.

‘메이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엘렌시아의 기억이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남자 주인공이건 뭐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소설의 그 누구보다도 너를 알고 싶었다.

메이에 대한 엘렌시아의 기억이 남아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예전보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진심을 다해 그녀를 소중히 여길 수 있을 텐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길어질 것 같아서, 그 길어진 생각이 내가 완벽한 타인이란 사실과 이방인이란 사실을 상기시킬 것이 두려워서, 먼저 입을 열었다.

“메이, 잘 들어. 후작가에서 일을 정리한 다음엔 레이델을 데리고 웰링턴으로 가. 그리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진 수도로 돌아오지 마. 죽은 듯이 살아, 웰링턴에서.”

남부의 웰링턴.

한쪽은 산, 한쪽은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마을이다. 그리고 은퇴한 황실 부기사단장이 어부의 꿈을 꾸고 내려간 곳이기도 했다.

후작가에서 도망친 레이델은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레이델이 그 사람한테 검을 배웠지.’

어쩐다. 소설처럼 레이델이 다시 검을 들게 해?

양쪽 눈을 지켜낸 소설 속 외눈 검사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 그 녀석이 검을 잡게 만들지 마. 차라리 바늘을 들게 해.”

“바늘이요?”

“응. 뭐…… 자수라도 놓게 하든가…….”

언젠가 검을 든 레이델이 내 팔을 잘라갈 것이 걱정돼서, 그런 시답잖은 이유 때문은 아니다.

애초에 레이델이 엘렌시아를 공격한 이유는 온갖 악행을 일삼던 엘렌시아가 죽은 형을 모욕한 일로 벌어진 결투 때문이잖아?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을 거고, 레이몬드를 모욕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레이델이 날 공격할 일은 없다.

무엇보다도, 레이델은 칼바도스의 아군이 될 것이다.

‘그럼 나랑도 한편이지.’

부기사단장에게 레이델을 맡기면 예정보다 일찍 남주인공의 기사를 훈련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이델이 검을 들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어쩌면 기사가 된 그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이델은 형을 죽인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렇게 그는 복수와 분노의 노예가 되었다.

레이델에게 있어서 검은, 복수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분노를 담아낼 거울이었을 뿐이다.

‘너는 기사였지만, 검을 손에서 놓고 싶어 했잖아.’

레이델을 움직이게 만든 건 칼바도스를 향한 충성보단 복수와 분노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후작가가 무너진 후, 레이델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분노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새로운 분노의 대상을 찾았다.

‘그게 엘렌시아였지.’

그렇다면 엘렌시아가 죽고 이 소설에 해피엔딩이 찾아왔을 때, 분노의 방향을 잃은 너는 다시 방황했을까?

아니면 칼바도스와 셀레네의 옆에서 웃었을까?

아쉽게도 엘렌시아가 죽은 이후의 기억은 내게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검을 든 레이델이 반드시 불행해질 거란 확신 역시 없다.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칼바도스를 향한 충성심으로 살아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복수와 분노가 삶의 원동력이 되는데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자가 삶의 끝에서 행복을 외칠 수 있을까?

레이델이 검을 들어서 행복해질 가능성보단,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럼 이번에는 손에 굳은살이나 물집 잡힐 필요 없이 레이몬드 옆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라지 뭐.’

사실, 레이델 대신 후작가를 처리할 레이몬드가 살아 있는 지금, 레이델의 가치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레이델은 레이몬드를 얻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럼…… 레이델 님이 스스로 검을 선택하신다면, 그땐 어떻게 할까요?”

만약에, 복수와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새로운 마음으로 검을 선택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어쩔 수 없으려나. 열심히 하라고 해.”

그런다면, 이번에 칼바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레이델은 틀림없이 행복해질 것이다.

주연 말고 조연의 행복에도 신경을 써야겠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을 때, 메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를 기다려 주실 건가요?”

“당연하지.”

엘렌시아를 향한 메이의 마음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 됐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기쁠 거예요.”

당연하다는 내 말에, 메이는 지금까지 내가 봤던 미소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선사했다.

*

‘형, 나 두고 가지 마.’

레이델이 그렇게 부탁한 횟수는 딱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레이델과 시간을 보내던 레이몬드가 후작저로 돌아갈 때.

두 번째는 저택 밖에서 레이델을 키우던 레이델의 어머니가 강도를 만나 죽었을 때.

세 번째는 후작저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하지만 후작저에 들어온 후, 힘없는 레이몬드의 처지를 깨달은 레이델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추운 건 이제 괜찮아. 깜깜한 것도 이제는 안 무서워. 하지만 혼자 있는 건 너무 싫어. 나는 그냥…… 엄마랑 같이 살던 집으로 가고 싶어.’

‘……열 밤 뒤에 올게. 조금만 기다려 줘.’

레이몬드는 동생을 앙상한 손목을 꽉 붙잡고는 떼어 냈다. 그때였다. 동생이 목소리가 다시 들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진 건.

‘형, 나 두고 가지 마.’

‘가지 마.’

‘열 밤 뒤에 온다고 했으면서.’

‘왜 안 왔어?’

‘거짓말쟁이.’

불에 타 한쪽 얼굴이 녹아 버린 동생이 다가와 속삭였다.

미안, 미안해……. 레이몬드는 꿈속에서 울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그의 동생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동생과 눈을 맞추고 동생을 안아 주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아……!”

숨이 트이며 해방되는 느낌이 들더니, 눈이 번쩍 떠졌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새벽빛이 스며드는 창문 사이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깼네, 레이몬드.”

악몽인가.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모양이다.

렘브로, 증오하는 나의 형. 그가 여기 있다니.

렘브로가 레이몬드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눈을 굴려 방 안을 살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방 한쪽에 마련된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한참 동안 검은 옷을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다가 울기 시작했다.

오늘은 레이델의 장례식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