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1화
건국제 날, 공작의 마차가 황궁으로 떠난 것을 확인한 나와 카인은 후작가로 향했다. 카인이 건네준 망토를 챙기고서.
카인은 짧은 기간 동안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투명 망토를 만들어 냈다. 레이델이 있는 후작가 지하실의 정확한 좌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바깥에서 망토를 쓰고 잠입한 후, 이동 마법을 이용해 메이가 마련한 임시 거처로 돌아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망토를 두르자,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투구를 쓰고 메두사의 목을 자른 영웅 페르세우스가 떠올랐다.
“여기가 그 개구멍인가 봐.”
덤불 사이로 정보원이 말해 둔 개구멍이 보였다. 먼저 개구멍을 통과한 카인이 내가 쉽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멍을 통과하는 나를 잡아 주었다. 경비원들이 없는 시간대에 개구멍을 무사히 통과한 나는 저택 내부로 들어갈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 이 근천데.’
정보원이 건넨 안내도에 표시된 곳이라면 조금 더 구석으로 가야 했다.
‘아, 찾았다.’
붉은 향초가 놓여 있는 창가. 그곳이 정보원이 마련해 둔 입구였다.
9시 정각에 맞춰 창문이 열렸고, 주변 경비와 정보원의 얼굴을 확인한 내가 망토의 모자를 벗었다.
“메이.”
“아가씨!”
후작저에 잠입해 정보를 전달한 정보원, 메이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성공적인 잠입을 위해 카인의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그녀가 안쪽에서 나를 들어 올려 저택 안 빨래방으로 들였다.
“오랜만이야, 메이.”
“그리웠어요, 아가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메이의 퉁퉁 부르튼 손이었다.
공작저에서 나의 시중을 드는 것이 주요 업무인 메이는, 빨래나 설거지로 손이 부르틀 일이 없었다.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얼른 레이델을 데리고 메이랑 카인이랑 돌아가야지.’
내가 제 손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안 메이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시키시는 일을 해내는 것이 제 기쁨이에요.”
카인도 그렇고 메이도 그렇고. 갑자기 속 한구석이 쓰렸다.
나는 이 사람들을 모른다. 이 사람들이 친절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닌데…….
맹목적인 이들의 호의에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죄책감만을 느끼는 건 내 정신건강에 나빴다.
‘내가 그만큼 더 잘해 주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이제 와서 엘렌시아의 진짜 영혼을 찾으러 갈 순 없었다. 엘렌시아가 돌아왔을 경우 내 영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살고 싶다. 그냥 목숨만 부지하며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나 혼자 행복하지 말고 주변 사람의 행복도 잘 챙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주변 사람 중에서도 메이와 카인이 우선적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메이는 엘렌시아의 명을 따르다 죽었고, 카인은 동생의 뜻을 함께하다 죽었으니까.
“……메이, 너는 내가 나중에 꼭 호강시켜 줄게. 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할 거야. 월급도 잘 챙겨 주고, 보너스도 주고, 유급휴가도 주고. 줄 수 있는 건 다 줄게.”
“이미 그러고 계시잖아요?”
“그랬던가.”
멋쩍게 웃는 나를 보며 메이가 따라 웃었다.
“이제 그 방으로 안내할게요. 오래 계시면 위험할 테니까요.”
카인이 메이에게 여분의 망토를 건넸고, 우리는 모두 레이델을 구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페르세우스가 되었다.
*
나와 카인은 메이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실에 도착했다. 미로 같은 지하실이었지만 길이 익숙한 메이가 있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제가 이번 달 저녁 식사 담당이라 잘 알아요. 이쪽이에요.”
메이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며 속삭였다.
“오늘 낮에 둘째 놈이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상태가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덜컥―
서늘한 지하실의 쇠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본 공간은 사람이 머물 곳이 아니었다.
침대나 이불 없이 다 낡아 빠진 담요 하나, 테이블 없이 차가운 바닥에 놓인 밥그릇. 심지어 그 안에 담긴 건 쓰레기인지 음식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점심 당번이 조셉이라는 하인인데요, 그놈은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다준 적이 없어요.”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속으로 실컷 욕을 퍼붓고 나서야 방구석에 쓰러져 있는 한 아이가 보였다. 나는 투명화 마법을 푼 채 아이가 있는 구석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에 윤기를 잃은 붉은 머리카락.
눈앞에 있는 이 초라한 남자아이는 칼바도스의 든든한 기사, 레이델 메릴이었다.
‘눈은 괜찮은가?’
부러질 듯 얇은 팔다리를 뒤로한 채 나는 그의 눈을 살폈다.
소설에서 레이델은 첫째 형의 괜한 화풀이로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직 눈은 다치지 않았구나.’
양쪽 눈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 그가 외눈 검사라 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외눈 검사라는 칭호를 얻는 것보단 양쪽 눈을 챙기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레이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눈 좀 떠 봐, 레이델.”
지하실에 사는 쥐가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모두의 침묵을 깨고 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몬드 형아?”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형을 부르는 레이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레이델은 이곳에서 내내 레이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물이라도 먹이자. 카인이 가져온 주머니에 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오빠.”
역시 남매는 통하는 걸까.
딱히 물을 달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카인은 주머니에서 물을 꺼냈다.
하지만 물을 마시게 하려는 내 의도와 다르게, 카인은 레이델의 얼굴에 물을 뿌려 버렸다.
‘이 인간이!’
인성을 집에 두고 왔나!
“쿨럭!”
잠시 뒤 조금 전보다 정신이 맑아진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델이 물었다.
“……신?”
“나는 신이 아니야.”
물벼락을 맞아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다친 건가? 여기서 나가면 의원부터 불러와야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레이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여기서 도망치자, 레이델.”
답은 즉각 나왔다.
“……꿈이라도 좋아. 도망치게 해 줘.”
레이몬드와 같은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레이델 역시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도망치겠다는 레이델의 말에 메이는 품 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냈다.
카인이 손가락을 튕겨 불을 지르자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하나를 꺼내 지하실 문 쪽에 내려놓은 뒤 나와 레이델이 있는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레이델에게 망토를 둘러 주었다.
“업히세요, 레이델 도련님.”
“엠마……?”
자신이 후작가에서 도망칠 수 있게 돕는 사람이 후작가의 하녀라는 사실에 놀란 레이델이 메이의 거짓 이름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레이델이 자세한 설명을 들을 때까지 기다릴 정도로 친절하지 못한 카인 리베르트는 무덤덤한 얼굴로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길 뿐이었다.
따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고, 어느새 우리 넷은 메이가 마련해 둔 임시 거처에 도착해 있었다.
“엠마, 여긴 어디야……?”
낯선 곳에 도착한 레이델이 유일하게 익숙한 존재인 메이를 붙잡고는 물었다. 하지만 메이는 이곳이 어디냐는 그의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고개를 저으며 ‘엠마’라는 이름에서 벗어나려 했다.
“레이델 도련님. 저는 엠마가 아니에요.”
메이의 말에 레이델이 메이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럼 너는 대체 누구야? 왜 나를 도왔어?”
레이델이 질문한 이는 메이였으나, 메이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할지 말지 결정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내가 대답을 허한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그제야 메이가 레이델의 질문에 하나씩 답했다.
“제 이름은 메이이고, 도련님을 도운 이유는 제 주인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주인.
그 말에 레이델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요해서 몸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왜, 왜 나를-”
앙상한 다리로 바닥을 디디며 내 쪽으로 걸어오는 레이델을 카인이 막아섰다.
“거기서 말해.”
“……제 형은 버릇처럼 말했어요. 이득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고.”
레이델에겐 네 명의 형이 있었으나, 그중 레이델이 ‘제 형’이라 부를 만한 이는 레이몬드 한 명뿐이었다.
“네 형의 말이 맞아, 레이델.”
지금 내가 너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도, 레이몬드를 살려 후작가를 쉽게 무너뜨리기 위해서니까.
“그럼, 왜 저를 구하셨어요? 저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그를 구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칼바도스의 최측근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의 형인 레이몬드가 레이델을 구하다 죽기엔 아까운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답해 주기 싫기도 했고, 스스로를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레이델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그럴 리가.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어.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어서도 가치를 남기기도 해.”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왜 저를 구하셨어요? 저는 아무 쓸모 없는데.”
조금 전까진 제 가치를 운운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쓸모에 대해 운운하고 있었다.
“그 말도 틀렸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직 자기 자신이 제대로 쓰일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모든 사람은 가치도 있고 쓸모도 있다는,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내 말에 레이델이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를 왜 구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빚이야.”
“빚이요?”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고 갚아. 그거면 돼.”
그래. 이건 빚이다. 미리 빚을 만들어 두면, 언젠가 칼바도스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겨도 레이델이 내 오른팔을 잘라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구해 줬는데, 설마 팔을 자르겠어?’
한 번 정도는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을까.
나는 레이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내 소중한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조만간 이름도 지어 줘야겠다.
나는 소중한 것이 생기면 꼭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