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화
메이가 떠나고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 나는 공작이 붙여 준 검술 대련 상대와 목검을 맞부딪혔다.
땀이 나는 게 싫어 검술 수업을 때려치우고 싶었으나 때려치울 수 없었다. 엘렌시아는 검술에 재능이 있었고, 리베르트 가문 사람은 검을 들어야 하니까.
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련 상대는, 제법 친근한 검은 머리카락과 친근하지 않은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렇게 몇 번 검을 맞부딪혔을 때,
“아악!”
리온의 단단한 목검이 내 머리를 내리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아파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왔다.
“저런.”
아프다는 내 말에 미안한 기색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그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다정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검으로 내리치고, 눈물을 닦아 주고.
완전히 병 주고 약 주기였다.
하지만 내 지적에도 리온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느릿느릿 답했다.
“병을 드린 건 알겠는데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 약까지 드린 모양이네요.”
이놈은 방금 전 눈물을 닦아 준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한다. 나만 그의 친절을 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 참, 아가씨.”
리온이 자리로 돌아가려던 나를 불러 세웠다.
“드릴 게 있어요.”
“뭔데?”
그는 한쪽 구석에 놓아둔 제 재킷 주머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단검?
그보다 이놈은 왜 나한테 선물을 주는 거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선물에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왜 주는 거야?”
“그냥요. 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드리고 싶었어요.”
“단검을?”
“네. 그러니 저를 생각해서라도 꼭 가지고 다녀 주세요. 네?”
이걸로 누굴 찌르기라도 하라고?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간절한 그의 눈빛 탓에 나는 선물을 거절하지 못했다.
“알았어. 가지고 다니면 될 거 아니야.”
그제야 리온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 살가운 웃음을 뒤로한 채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옅은 바람 한 줄기에도 숨통이 쉽게 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단검을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팔이 언제 잘려 나갈지 몰라.’
칼바도스의 최측근이자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레이델 메릴.
그는 악행을 일삼던 엘렌시아의 팔을 자른 뒤, 이것은 선금이니 다음번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엘렌시아는 들을 척도 안 했다. 오히려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참…… 대단한 여자야.’
팔 하나가 사라졌는데 실실 웃기나 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한 나는 바람을 쐬며 왼손으로 오른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
나는 서재 책장의 가장 아래층을 정리하고 있는 레이몬드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팔을 쿡쿡 눌렀다.
관심을 달라는 내 요구에 귀찮은 기색 없이 레이몬드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1황자 궁에 가시지 않은 겁니까?”
“네.”
“사유는요?”
“개인 사정이요.”
개인 사정이라는 짤막한 사유 안에는 하나뿐인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아프다는 핑계가 더 좋았을 텐데요?”
“자기한테 옮을 수도 있으니까 다신 오지 말라고 내쫓을 녀석이라서, 개인 사정이라고 하는 게 나아요.”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요즘 서재에 자주 들르시는 것 같군요.”
책도 안 읽으면서 왜 오냐는 말처럼 들렸다.
“여긴 레이몬드 님의 직장일 뿐만 아니라, 제 어머니의 서재이기도 해서요.”
딸이 엄마 서재를 구경하겠다는데, 더는 이유를 묻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금 후련하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오자 레이몬드가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제니아 님을 뵙고 싶으신 겁니까?”
“어…… 그렇게 보고 싶진 않은데요.”
지금의 나에겐 그 사람과 함께 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표면적인 정보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크게 그립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레이몬드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와 달라고 편지를 쓰시면 당장 달려오실 겁니다. 한 달 걸릴 토벌전이 일주일로 줄어들지도 모르고요.”
토벌전에 참여한 사람한테 보고 싶으니까 빨리 오라고 편지를 쓰라니.
안 그렇게 생겨선 철없는 짓을 시키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는 레이몬드 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어머니가 그립지 않거든요. 무엇보다도 북부에서 바쁘신 분을 저 하나 때문에 수도로 모셔 오는 건 너무 민폐예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아니, 진짜 안 보고 싶다니까?
그리고 난 이미 어른이야!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게 싫었기 때문에 나는 대놓고 말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다음 주에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 기념 연회에 가신다고 들었는데, 레이몬드 님도 가시나요?”
“네. 공작님과 함께 갈 예정입니다.”
대외적으로 레이몬드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공작에게 붙은 배신자다. 그러니 레이몬드가 공작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와, 좋겠다. 저는 아직 어려서 못 가는데.”
사실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가족분들도 모두 연회에 참석하시나요?”
“셋째 형님만 빼고요.”
셋째라면 후계자로 임명된 렘브로 메릴인가?
그나저나 렘브로를 제외한 전원 참여라니, 틀린 말이다. 후작가에선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나는 갑작스레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얼굴을 하곤 물었다.
“어? 그런데 셋째 형님뿐만 아니라 레이몬드님의 동생도 못 가지 않을까요? 저랑 동갑이잖아요.”
무심코 제 동생을 빼고 전원을 운운한 레이몬드의 손에서 책이 툭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책을 주웠다.
“……그렇지요.”
“그럼 다음에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저는 친구가 필요하거든요.”
“1황자 전하가 계시잖습니까?”
“그 녀석은 너무 앙칼져서 상대하기 지쳐요.”
피곤함이 가득 우러난 내 말에, 레이몬드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참 입꼬리를 매만지던 그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도 정말 제 동생을 소개하고 싶지만. 그 아이는…… 몸이 좋지 않아서 밖에 나오지 못합니다.”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후작가에서 들어간 순간부터, 도망치는 순간까지. 레이델은 후작저에서 나온 적이 없다. 작은 다락방에서 죽은 듯이 지내다가 형제들의 심기가 불편한 날이면 흠씬 얻어맞은 뒤 지하실에 갇혔다.
후작가의 모두가 후작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를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후작은 밖에서 살고 있는 레이델을 데려와 그에게 성을 주었는가?
하녀는 레이델을 밖에서 조용히 키웠다. 레이몬드는 하녀가 죽은 뒤, 아버지의 명으로 레이델을 저택으로 데려왔을 뿐이고.
‘하녀가 죽었다 해도 후작이 레이델을 저택으로 불러들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대체 왜지?
의문이 남았으나 레이몬드를 앞에 두고 길게 생각할 순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를 연기하며 레이몬드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나중에 건강해지면 꼭 만나게 해 주셔야 해요! 자, 약속!”
잠시 머뭇거리던 레이몬드의 얇고 기다란 새끼손가락이 얽혔다.
“예. 그날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겠습니다.”
소개해 줄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레이델을 직접 찾아갈 거니까.
그날을 간절하게 기다리겠다는 레이몬드의 말에서, 나는 동생을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셋째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황궁으로 향한다고?
이건 레이델을 구할 수 있는 다시없을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년까지 레이델은 그 집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황실 건국 축하연에는, 공작과 레이몬드만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아직 연회에 참석할 수 없는 나이인 나와 카인은 저택에 남는다.
내가 후작가를 방문한다는 걸 공작이 허락할 리는 없으니, 공작이 없을 때 일을 질러야 했다. 그리고 레이델을 무사히 빼내기 위해선 카인의 힘이 필요했다.
서재를 나선 나는 바로 카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야, 오빠.”
문에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바로 문이 열렸다.
마법으로 문을 연 카인이 나를 보자마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쪼르르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내 침울한 표정은 카인에게 제대로 먹혔다. 내가 바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자 카인이 내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주변을 살피자 카인이 나를 방 안으로 당긴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방음 마법을 썼다.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테니 말해 봐.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도울게.”
카인 리베르트의 삶은 엘렌시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 카인 리베르트는 자신의 삶이 제 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달가워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는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어서 하인을 시켜 그 애에 대해 알아보게 했어.”
“내가 얼굴을 바꿔 준 하인을 말하는 거구나. 그런데?”
“그 친구가 많이 아파.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계속 아플 거야.”
카인과 나에게 있어 ‘집’이라는 장소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장소다.
하지만 우리 남매와 달리 레이델은, 집에서 벗어나는 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다.
말뜻을 이해한 그가 물었다.
“너는 그 친구를 구하고 싶은 거지?”
“응. 도와줄 거야?”
살짝 눈치를 보자, 섭섭함이 가득 우러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눈치를 봐?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할 리 없잖아.”
카인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 고민 없이 냉큼 제안을 수락했고, 나는 카인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명을 마치자 카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리.”
“응?”
계획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네가 친해지고 싶다던 그 친구, 남자애야? 그럼 어머니, 아버지한테도 말씀드려야 하는데…….”
안절부절못하는 카인의 모습을 본 나는, 아주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