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화
나는 메이와 함께 공작 부인의 서재를 찾았다.
공작이 엘렌시아가 쫓아낸 레이몬드를 공작 부인의 서재 관리인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가득한 이 서재에서, 공작 부인은 전장에서 쌓인 피로를 풀었다. 이곳은 로제니아 리베르트의 안식처였다.
인기척을 내며 서재를 꼼꼼히 둘러보았지만, 서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안 계신 모양이에요.”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리지 뭐.”
나는 메이가 빼 준 의자에 얌전히 걸터앉아 레이몬드를 기다리다가,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뒤, 뒤늦게 눈을 떴다는 사실을 자각한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몽롱해 고개를 들 기운이 없었다.
“메이. 내가 여기서 얼마나 잔 거지?”
“제가 지켜본 지 5분이 지났네요.”
아, 생각보다 별로 안 잤…… 어라?
메이의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옅은 회색 눈동자.
그 외관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몸 선이 얇고 그를 둘러싼 색조차 옅었다.
‘이 사람이 레이몬드 메릴.’
눈앞의 남자가 내 경계심을 낮추려는 듯이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떨기 꽃과도 같은 레이몬드를 보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미친…… 이슬만 먹고 살았나 봐.’
레이델의 회상에서만 언급되던 이 남자가, 이렇게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왜 작가는 독자들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인가?
‘일회성 캐릭터를 이렇게 예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레이몬드의 미모에 대한 감탄은 곧 작가를 향한 분노로 변했다.
“……또 저한테 화나신 일이 있습니까?”
하지만 살벌한 표정 탓에 레이몬드가 내 분노의 방향을 오해한 모양이다.
“레이몬드 님께 화가 난 게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한 저 자신에게 화가 난 거예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선생님께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예……?”
레이몬드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을 의심하는 대신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너무한 거 아니야?’
하지만 더 너무한 쪽은 엘렌시아였기 때문에, 나는 반응을 지적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지난날, 제가 레이몬드 님께 무례한 말을 했죠. 그 일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예……?”
아까부터 계속 같은 반응이다.
“……대체, 대체 공녀님이 왜 저러시는 거예요?”
레이몬드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메이에게 속삭여 물었지만 메이는 답해 주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냐니.
그는 후작의 배신자다. 공동의 적을 둔 그와 좋은 관계를 쌓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애써 차분함을 되찾은 레이몬드가 내 쪽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녀님께서 함부로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레이몬드의 말에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릎을 꿇은 이유는 어린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이미 레이몬드 님을 거절했고, 아버지께선 새로운 역사 교사를 구하셨죠.”
“그렇지요.”
“과거의 어리석은 제 선택으로 좋은 스승을 만날 기회를 놓쳤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내 말을 듣고 있던 레이몬드는, 정말 내 스승이라도 된 듯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높은 위치에 선 사람에겐 그만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니 공녀님께서 뱉으시는 말의 무게를 아셔야 합니다.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나는 내가, 과거의 엘렌시아가 뱉은 말을 줍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 결과로 리베르트 공작은 새 역사 교사를 구했고 레이몬드의 자리는 사라졌으니까.
‘깨진 화병도 다시 붙을 순 없지.’
여덟 살짜리 어린애의 폭언에 다친 레이몬드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의 내가 사과를 해도, 이전에 레이몬드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그 당연한 사실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레이몬드 님께선 이제 제 가정교사가 아니신데도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직책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깨달음을 주는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지요.”
그러게.
나이가 어리든 많든,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배울 수 있으면 모두가 스승이었다. 내가 자신의 사람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일깨워 줬던 칼바도스처럼.
방금 그는 내게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었다.
내가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몬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변하셨군요.”
“어느 쪽으로요?”
“좋은 쪽으로요.”
레이몬드는 마치, 반항기가 끝나고 철든 여동생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이상해.’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갑갑하다.
레이몬드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레이몬드의 말에 살짝 미소 지어 보인 뒤, 도망치듯 공작 부인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
레이몬드는 엘렌시아가 떠난 자리를 꽤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왜 메릴 가문 사람인 당신이 이 저택에 있는 거예요?’
‘메릴의 사람에게서 배울 만한 게 있을 리가 없죠. 당장 제 방에서 나가세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제 눈에 띄지 말아 주세요.’
나이에 비해 영특한 공녀는, 영특한 만큼 성질이 더러웠다.
그렇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말하더니 자신을 찾아 서재까지 친히 걸음 하셨다.
타인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공녀가, 걸음에서 그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공녀님이 나한테 고개를 숙여 사과하시다니.’
레이몬드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공작님한테 혼이라도 났나?’
아니지, 공작이 딸을 혼낼 리 없었다.
‘그 아저씨가 딸을 얼마나 아끼는데.’
설마 다른 사람과 영혼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제 동생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유해지는 레이몬드는, 그새 철이 든 공녀가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동시에,
‘……레이델도 잘 먹었으면 공녀님만큼 키가 컸겠지.’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공녀와 달리 빼빼 마른 제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조금은 슬퍼지고 말았다.
*
레이몬드를 만나고 난 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막말에 대한 사과를 한 후 마음이 편해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레이몬드는 단순히 레이델의 각성을 위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숨을 쉬었고, 말을 했으며, 웃기도 했다.
레이델의 회상이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그것도 바로 내 눈앞에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한 말인가.
레이몬드의 속은 지나치게 맑아서 그 밑바닥이 다 드러나는 정도였다.
레이몬드는 좋은 사람이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은 맑고 올곧다.
레이몬드는 그저 배다른 동생을 아끼고, 동생을 위해 내부 고발을 감행하는 형일 뿐이다.
레이몬드가 살았으면 좋겠다. 그의 죽음이 동생의 각성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전까지 나는 레이몬드에게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나는 내 멋대로 그의 가치를 판단하고 멋대로 목숨값을 매겼는가.
그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주인공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도 잠시, 나는 빠르게 성찰한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미워해 봤자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를 돌아보는 대신 앞을 내다볼 차례다. 레이몬드의 고발을 성공시키면서, 그를 살릴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서슴없이 펜을 들었음에도 바로 글자를 적지 못하는 이유는, 방 안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 때문이었다.
엘렌시아의 충성스러운 하인인 메이가 숨을 죽인 채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순박한 얼굴을 한 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이는 왜 그렇게 엘렌시아에게 맹목적이었을까?’
아쉽게도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을 그저 아쉽다고만 느끼는 내가 조금 싫었지만, 그뿐이었다. 나를 싫어하기엔 내가 나를 너무 사랑했다.
“메이.”
“네, 아가씨.”
늪과 같은 어두운 녹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메이,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메이는 언제나 엘렌시아의 명령에 따랐다.
정보를 얻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저 여자에겐 죄책감이 없었고 그렇기에 망설임 또한 없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 여자는 엘렌시아만을 생각했다.
‘나는 엘렌시아와 메이,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해.’
소설에 두 사람의 자세한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고, 내겐 메이와의 기억 또한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건, 메이가 엘렌시아에게 충성했다는 것뿐이다.
“물론이에요, 아가씨.”
저 충성은 만족감보단 찝찝함을 안겨 주었다. 내가 저 맹목적인 충성의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를, 내 몫이 아닌 호의를 받고 있는 거기에.
나는 찝찝함을 뒤로 하고 메이에게 일을 지시했다. 지금 내 계획을 실행시켜 줄 이로는 메이가 가장 적절했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꽤 오래 공작저를 떠나 있어야겠네요, 저는.”
“그렇겠지.”
내가 지시한 일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메이는, 갑자기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인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그렇게 오랫동안 공작저를 떠나 있으면, 제가 아가씨 생신을 챙겨 드릴 수 없을 거예요. 혹시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세요? 말씀해 주시면 미리 두고 갈게요.”
이런 상황에서 선물이라니.
황당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남자 아이 시체 하나를 받고 싶어.”
시체의 용도를 파악한 메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메이에게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카인의 마법 주머니를 건넸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카인의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메이는 공작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