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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8)화 (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8화

그래, 칼바도스는 아직도 내가 진 얼굴이 보고 싶구나.

어이없는 바람이었지만 그런 걸로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칼바도스가 어울리지도 않는 얼굴로 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나는 시무룩함과 분함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봤어? 나는 지면 이런 얼굴을 해. 그러니까 똑똑히 봐 둬.”

보란 듯이 패배자의 표정을 지어 주자, 칼바도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보고 싶단 말은 아니었어. 그리고 그 표정은 너무 가짜 같아.”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보여 주고 싶었어.”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황자라서?”

‘응.’

정확히는 네가 황제가 될 사람이며,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교과서 같은 답을 꺼냈다.

“나는 네 친구잖니.”

“……하지만 넌 아버지 명령에 나랑 친구하는 거잖아.”

“그럴 리가!”

황제는 내게 명령이 아닌 제안을 했고, 나는 선택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 같은 제안으로 어쩔 수 없이 나와 친구가 된 칼바도스와는 달랐다.

나는 격하게 부정하며 양손으로 칼바도스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야. 그리고 배동이 아니었어도 미래의 나는 너랑 친구가 됐을 거야.”

딱히 배동이란 선택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가까운 미래에 남자 주인공인 칼바도스의 아군이 되기를 자처했을 테니까!

“아, 알겠으니까 손은 놔아!”

귀가 익은 듯이 붉어진 칼바도스가 내 손을 뿌리쳤다.

저 앙칼진 녀석, 어떻게 지금까지 저런 성격을 숨기고 살았지?

‘그래도 열일곱 살부터는 괜찮아지려나.’

지금은 이래도 시간이 지나면 곧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나는 다시 칼바도스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있지, 우리 한 가지만 더 확실하게 하자.”

“뭐를?”

“내가 싫은 이유는 아까 그거뿐이지? 이제 더 없는 거지?”

“없어. 그건 왜?”

질문의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건지 칼바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내가 웃는 게 싫다거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잖아.”

“싫다고 하면 고치게? 아니, 고친다는 말은 이상하네. 내가 싫다고 하면, 행동을 바꾸기라도 하게?”

행동을 고친다는 말이 아니라 바꾼다는 말에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답할 수 있었다.

“완전히 바꾸는 건 무리고, 네 앞에서 최대한 자제할 수는 있지.”

“멍청이.”

눈에 띄게 얼굴을 찌푸린 그의 입에서, 못된 단어 하나가 튀어나왔다.

멍청이?

내가 바보라고 할 땐 그렇게 화를 내더니, 나한테는 멍청이라고?

모순적이기 짝이 없는 그의 행동을 지적하려던 때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웃고 말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내 앞에 인형을 앉혀 두지, 뭐 하러 시간 내서 너를 만나!”

제법 날이 선 말투에 나는 말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선을 넘는 사람의 행동을 싫어하는 거지, 선 안의 행동을 억지로 바꾸게 할 생각은 없어. 너는 내 사람이지 내 것이 아니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사람을 당기는 힘은 이런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말이어도 남자 주인공이 하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인가?

거 되게 배알 꼴리네…….

만약 그런 특별한 힘이 남자 주인공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면, 나는 지금 당장 작가에게 달려가 이 부당함에 대해 따질 것이다.

*

오전 9시 30분.

문학 수업을 담당하는 블리안이 물었다.

“공녀님. 지난 시간에 배운 시몬 왕국의 작가 카타나의 4대 희극에 대해 기억하시나요?”

“네. 까마귀와 수치, 안나의 사랑법, 고양이가 바라본 하루, 잃어버린 세계예요.”

다행히도 여덟 살 엘렌시아의 인간관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식들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고작 여덟 살 먹은 엘렌시아가 그동안 이 수업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엘렌시아의 지식이 아니었다면 칼바도스의 질문에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을 거야.’

칼바도스보다 뛰어난 엘렌시아의 학업 성취에 발목을 잡히기도 했지만, 아는 게 없는 쪽보단 많은 쪽이 나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참 이상하지? 그 기억만 사라졌다는 게.’

꼭 누군가에 의해 지워진 것처럼 말이다.

‘엘렌시아와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라는 뜻일까.’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려던 순간, 블리안의 설명이 이어졌고 나는 수업에 귀를 기울였다.

“이 카타나라는 작가는 아들이 바론 전쟁에서 사망한 후 완전히 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데요, 저는 역사가 아닌 문학 교사니, 바론 전쟁에 대해서는 간단히 설명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전후로 달라진 작풍에 대한 설명을 마지막으로 길고 긴 문학 수업이 끝나고, 다음은 역사 수업이었다.

‘이왕이면 바론 전쟁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할까?’

블리안이 설명해 준 내용만으로는 부족했으니 다음 교시에 들어올 역사 교사에게 설명을 요구할 참이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음에도 역사 교사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왜 안 오지?’

혹시 시간표가 바뀌었나?

아니면, 과목 아래 적힌 ‘레이몬드’라는 이름을 가진 선생님이 수업 시간을 착각했거나.

이상함을 느낀 나는 문 앞에 서 있던 메이를 불렀다.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메이는 내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메이. 역사 선생님은 왜 안 오셔?”

“아가씨께서 꼴도 보기 싫다고 쫓아내셨잖아요. 잊으셨어요?”

내가 선생을 쫓아냈다고?

아니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엘렌시아가 한 짓이다.

“그랬지, 참. 그 꼴도 보기 싫은 놈.”

평온한 얼굴로 답했으나 속은 평온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엘렌시아의 인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공작이 다음 주부터 새로운 역사 담당 교사가 온다고 말했지.’

내가 그 사람의 수업을 거부했기 때문에, 새로운 교사가 오는 것이다.

레이몬드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들리는 걸 보면 그는 소설에 등장한 인물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회상으로만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몬드, 레이몬드라…….

‘그 이름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다.

‘악역이었나?’

하지만 소설의 악역은 엘렌시아와 카인, 루카스, 황후를 포함한 메릴 가문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악역 하면 루드비코 메릴 후작이지.’

그는 꼭두각시처럼 자란 제 누이를 억지로 황후 자리에 올리고, 외조카인 2황자 루카스를 지지하여 칼바도스에게 시련을 준 악역이었다.

물론 후작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엘렌시아였지만, 지금의 내 입장에선 후작이 제일 나쁜 사람이었다.

내가 그놈을 얼마나 욕했던가.

후작은 자신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레이델’이 형제들에게 학대당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그리고 레이델은 후작가에 복수하기 위해 칼바도스의 최측근이 되는 역할이었지.’

중요한 등장인물인 레이델이 후작가의 다섯째 아들이니까…….

후작의 첫째 아들이 존, 둘째가 다니엘, 셋째가 렘브로. 넷째는.

아, 드디어 기억났다!

‘레이몬드 메릴.’

메릴 후작의 넷째 아들 레이몬드 메릴.

후작의 넷째 아들인 그는, 칼바도스의 부하이자 주인공조의 한 명인 외눈 검사 레이델의 형이다.

아버지를 배신한 레이몬드는 저택을 떠나 인연이 있는 케이든 리베르트 공작의 밑에 들어갔다.

세간에서 레이몬드 메릴의 이미지는 단순했다.

‘아버지를 배신한 불효자.’ 그리고 ‘메릴의 수치.’

하지만 리베르트 공작의 밑에 들어가라 지시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메릴 후작이었다.

‘완벽하게 공작의 편이 되어 공작가의 정보를 가져와라.’

그것이 후작이 레이몬드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아버지를 배신한다. 그는 리베르트 공작에게 후작의 계획을 모두 알린 뒤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그를 안쓰럽게 여긴 공작은 레이몬드를 딸의 스승으로 들였다.

그렇게 레이몬드는, 후작의 앞에서 그의 성실한 아들을 연기하며, 뒤에서는 그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후작가의 배신자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작가에서 학대당하는 막내 레이델을 구하던 중, 믿었던 하인의 배신으로 모든 사실을 들키고 살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레이몬드의 죽음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칼바도스의 최측근인 레이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후작가에서 도망쳐서 숨어 살던 레이델은 시간이 흘러 칼바도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진실 된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러다 2황자 세력을 몰아낸다는 칼바도스의 계획을 알게 된 레이델은 칼바도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칼바도스와 사이좋게 후작을 몰아내며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더 중요한 사실은, 레이델이 작중에서 엘렌시아와 끊임없이 다투고, 소설 후반부에서는 엘렌시아의 오른팔 하나를 시원하게 잘라 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때 당시엔 속 시원하게 읽었지만, 막상 내가 엘렌시아가 되고 나니 하나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나는 찝찝함과 불안함을 뒤로한 채 레이델이 아닌 레이몬드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아직은 레이몬드가 살해당하기까지 시간이 꽤 남았네.’

더 이상 학대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레이몬드가 레이델을 데리고 도망치다 살해당하는 사건은 앞으로 2년 뒤다.

‘그냥 원래대로 죽게 내버려 둬야 하나?’

레이몬드의 죽음은 레이델이 각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야기대로 그가 죽음을 맞이하면, 레이델은 칼바도스를 만나게 될 것이고 복수 역시 성공할 것이다.

‘칼바도스와 레이델이 알아서 후작가를 멸문시킬 테지.’

딱히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리베르트의 대립 세력이 사라진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너무 많이 바꾸는 건 나한테 도움이 안 돼.’

이야기를 바꿀수록 변수가 늘어날 테고, 내가 아는 미래 또한 바뀔 테니까.

하지만, 레이몬드가 있으면 후작가를 더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미래와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 정도의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이 존재한다.

소설에서 후작가는 멸문당했다.

‘하지만 내부 고발이면 멸문이 아니라 재건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을지도 몰라.’

후작가와 관계 개선 후 마정석 거래를 할 수도 있겠지.

계산해 볼수록 레이몬드가 죽지 않는 게 내 쪽엔 이득이 된다.

그러니 그는 본래의 이야기와 다르게 살아남아서,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는 후작가의 배신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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