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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7)화 (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화

아쉽게도 나는 몹시 속이 좁은 사람인지라, 연이은 패배로 속이 상한 남자 주인공을 위로해 줄 만한 성인이 되지 못했다.

남을 위로하는 것보단 내 의문 해소가 먼저였다.

시종이 문을 열었고, 나는 소파에 앉은 칼바도스에게 물었다.

“야, 너. 내가 싫다고 했지.”

칼바도스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싫어할 거면, 적어도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고 싫어해.”

“너는…….”

사람 하나를 미워하는 데에 있어 걸음걸이가 싫다더라 하는, 한없이 가벼운 이유라도 납득하는 시늉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말 정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칼바도스는 웃음소리 같은 사소한 이유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한 남주인공인 그가 나를 진심으로 싫어한다면, 나에게 미움 받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봐 불안했다.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칼바도스의 입이 열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너무 빨라.”

“뭐?”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칼바도스에게 네 속마음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칼바도스는 조금씩 제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너를 데려오신 이유는 내가 너를 넘어서는 걸 원하시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이긴 적이 없어. 늘 너한테 졌고, 오늘도 역시 너한테 졌지.”

내가 예상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칼바도스가 나를 시험하기 전부터 그는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 전 이유만으로는 내가 입궁한 첫날 칼바도스가 도망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석연치 않다는 내 눈빛에 칼바도스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너는 나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잘 알아.”

“어떻게?”

칼바도스는 내가 그를 잘 모를 거라 했지만 나는 그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었다.

내가 너를 아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알 수 있을까?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칼바도스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칼바도스를 더 잘 알 것이라고 말이다.

“너는 꽃 중에서도 제국민들에게 따스한 겨울을 선사하는 목화를 가장 좋아하고, 시몬 왕국어로 된 책을 줄줄 읊을 수 있지.”

나도 칼바도스가 좋아하는 꽃 정도는 안다.

‘해바라기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은데.’

태양을 사랑하여 태양만을 따르는 모습이 페르데니아 제국과 어울려 좋아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꺼낼 말이 아니란 것도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황제가 칼바도스한테 내 이야기를 했구나.’

도서관에서 만난 황제가 시몬 왕국어로 된 책을 읽어 보라 한 일이 떠올랐다. 뭐, 사이좋은 부자였으니 황제가 나를 만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왜 너를 잘 아냐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분이, 나를 보러 오실 때마다 네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야.”

칼바도스를 만날 때마다, 매번.

담담하게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의 끝에 무게가 실렸다.

말을 뱉어 낼 때마다 바닥이 푹푹 꺼지는 것 같았고, 차마 말로 이어지지 못한 칼바도스의 속마음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망할 황제 같으니.’

나는 이제야 칼바도스가 나를 싫어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나이에 제 또래에게 비교당하기만 하니, 그 또래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마른 입술을 매만질 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싫었어. 사실 내가 싫어해야 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멍청하고 한심한 나인데 말이야.”

칼바도스가 싫어하는 건 내가 아니다. 이건 칼바도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나는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다.

방 안이 너무나도 고요해서, 나는 좀처럼 시원하게 침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너를 싫어할 필요 없어.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너를 사랑하겠어.”

칼바도스의 학업 성취도는 이미 다른 스승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다른 또래 귀족들이 칼바도스가 공부하는 책을 본다면 읽을 수‘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칼바도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완벽한 군주가 되어야 해.”

“어떻게 될 생각인데?”

“일단 모든 분야에서 우수해야겠지. 그래야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테고.”

이미 충분히 굴려진 스스로를 더 굴리겠다는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뭔가,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이게 칼바도스가 추구하는 완벽한 황제인가?

소설에서 칼바도스는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멋진 남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결코 쉽게 얻은 능력이 아니었다. 어린 자기 자신을 갈고, 갈아서 얻은 힘이었다.

모든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진정한 군주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칼바도스는 끝없는 자기혐오의 늪에 빠질 것이다.

“꼭 아버지께 인정받아서-”

“이런 씨…… 야, 이 답답아.”

속이 꽉 막히고 답답한 마음에 짜증을 내듯 말하자 칼바도스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네가 생각하는 진정한 군주는 그런 거야? 뭐든지 다 잘하고 완벽한 사람?”

칼바도스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나는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 용맹하고 똑똑하고, 무엇이든 잘하는 남자와 미숙한 남자. 이 둘이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 누가 승자였을 것 같아?”

“당연히 뭐든지 잘하는 남자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에선 아니었다.

“틀렸어. 그리 용맹하지도 않고, 검을 잘 다루지도 못했던 미숙한 남자가 승자였어.”

“어째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든지 잘하는 남자는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거든. 늘 자기 자신의 판단만을 믿었지. 반면에 미숙했던 남자는 훌륭한 인품을 지녀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곁에 뒀어.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승자가 된 거야.”

나는 천천히 칼바도스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고 칼바도스는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비되는 우리의 두 눈동자에 서로만이 담겼다.

“잘 들어, 칼바도스. 네가 검술 실력이 부족하다면 검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온전한 네 사람으로 만들면 되고, 네가 시몬 왕국어가 미숙하다면 시몬 왕국어가 유창한 사람을 온전한 네 사람으로 만들면 될 일이야.”

칼바도스는 정말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배웠듯이, 군주는 단순히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잖아?”

“…….”

“그러니까, 너 혼자서 모든 걸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런 생각은 지금 당장 밖에 내다 버리는 게 좋을걸.”

누군가가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칼바도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돌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내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자, 칼바도스가 내 새끼손가락을 살짝 붙잡은 채 물었다.

“그치만…… 너는 다 잘하잖아. 왕국어도 잘하고, 문학 공부도 잘하고, 검술도……. 너는, 왜 다 잘해? 대체 뭘 위해서?”

지금의 칼바도스에게 나는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모든 걸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그가 의문을 가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공부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너의 아군이 되고 싶어서.’

도중에 하차하지 않고 결말까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남자 주인공의 충신 역할이 되고 싶었다.

나는 칼바도스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답했다.

“언젠가 황제가 될 너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를 눈에 담던 칼바도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듯이 웃었다.

“지금도 내가 싫어?”

그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싫지 않아.”

‘좋다’가 아닌 ‘싫지 않다.’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좋다는 말보다는 싫다는 말을 명백하게 부정하는, 싫지 않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 대답이면 충분하지.’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칼바도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자 칼바도스가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칼바도스, 조금이지만 네가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해 줄까?”

“뭔데?”

듣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나 목화 안 좋아한다? 목화는 그냥 어른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고른 답이었어.”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햇빛을 받은 호수가 이런 느낌일까, 아니면 태양이 반짝이는 하늘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나도.”

“너도 그렇다고? 뭐가?”

작은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바도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나도 해바라기 안 좋아해. 씨앗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게 징그럽잖아. 하지만 아버지가 물어보셨을 때 제국을 상징하는 해바라기가 가장 좋다고 거짓말을 했어.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황자다운 답변이었거든.”

‘해바라기를 안 좋아한다고?’

소설에서 칼바도스는 해바라기를 좋아한다고 나왔는데?

그게 거짓말이었다니.

생각보다도 그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신경 쓰면서 타인을 속이고,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서술도 속여서, 독자인 나도 속아 넘어간 거고.

고작 그 사실 하나를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칼바도스는 후련한 얼굴을 했다.

어쩌면 소설에 나왔던 칼바도스의 다정은, 타인의 눈을 위해 학습된 다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바라기가 아니면, 너는 무슨 꽃을 가장 좋아하는데?”

내 질문에 칼바도스가 머뭇거렸다. 마치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꼭 황자답고, 특별한 답을 하지 않아도 돼. 거창한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지. 지금 여긴 우리 둘뿐인데 뭐 어때?”

“……장미. 거창한 이유는 없어. 그냥 나는, 분홍색 장미를 보자마자 내가 장미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래.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지. 나는 장미가 가장 좋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바도스가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물었다.

“너는? 너는 어떤 꽃을 좋아해?”

“음…… 나는 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고르자면 민들레? 홀씨 부는 게 꽤 재미있었거든.”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린 칼바도스의 두 다리가, 둥실거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 내가 진 얼굴이 보고 싶어?”

“너는 내 사람이라며. 네가 지면 내 손해야.”

든든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주제에, 그는 어울리지 않게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며 내 눈치를 봤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한마디를 바닥에 내려놓듯 툭 내뱉었다.

“……조금은 보고 싶다고 말하면 화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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