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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6)화 (6/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6화

배동 3일 차.

나는 칼바도스의 옆이 아닌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두꺼운 역사서가 놓인 테이블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생기 넘치는 눈으로 책을 읽던 칼바도스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바로 눈빛이 바뀌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눈알을 바꿔 끼운 것이 틀림없었다.

“왜 그런 눈으로-”

“탄티의 난에 대해서 설명해 봐.”

왜 그런 눈으로 보냐고 따지려던 때, 칼바도스가 책을 덮었다.

‘탄티의 난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이렇게 갑자기?’

배동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는 건가?

갑작스러운 칼바도스의 질문에 당황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인간관계를 제외한 여덟 살 엘렌시아의 기억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력 117년에 프로드 영주의 횡포로 영지민들이 난을 일으킨 사건. 9일 만에 진압당했지만.”

이걸 잘 기억하고 있는 영특한 엘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으나, 내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칼바도스가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 뻔했기에 꾹 참았다.

‘그러고 보니 칼바도스는 어렸을 적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지.’

그럼 지금 이 순간은, 남자 주인공에게 나를 어필할 수 있는 무대나 다름없었다.

“자, 이번에는 칼바도스 네가 대답할 차례야. 215년, 7황자 로티에를 중심으로 구성된 귀족파의 이름은?”

“샤피루.”

“오, 맞아. 그럼 샤피루가 와해된 이유와 그 이후 새롭게 등장한 세력의 이름은?”

연이은 나의 질문에 칼바도스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 아니었나?”

“아, 깜빡했다. 네가 이 문제를 맞힌 다음에 나한테 두 번 연속으로 질문해. 그럼 됐지?”

“흥, 네가 대답해 봐. 네가 모르니까 나한테 묻는 거 아냐?”

내가 두 번을 질문하든 세 번을 질문하든, 아는 문제였으면 신이 나서 바로 대답했을 것 같은데. 칼바도스는 답을 말하는 대신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혹시 모르나?’

퉁명스러운 칼바도스와 달리 마음 착한 나는 다정한 목소리를 꺼내들었다.

“모르면 문제를 바꿀게.”

그러자 작은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듯 덮은 칼바도스가 칭얼거리듯 말했다.

“아직 거기까진 안 배웠단 말이야아…….”

허…….

‘그럼 그냥 아직 안 배워서 모른다고 하면 되지 않나?’

곧 죽어도 모른다는 말은 안 할 녀석이었다.

7일 차.

오늘은 우리 사이에 역사책이 아닌 문학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오시세이? 칼바도스가 읽고 있는 책인가?

<오시세이>는 트라이아 전쟁이 끝난 뒤,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영웅 오시미우스의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이곳에 온 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엘렌시아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고 말이다.

내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책을 바라보자 그 시선을 의식한 칼바도스가 물었다.

“너도 이거 읽었어?”

“그럼! 17년 만에 겨우 아내랑 아들을 만나서 반역자들을 해치우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어. 연극으로 보고 싶을 정도라니까.”

“아내랑 아들을 만났다고……? 아직 거기까진 못 읽었는데!”

헉. 본의 아니게 뒷이야기를 스포해 버렸다.

“헙. 미안. 난 네가 다 읽은 줄 알았지.”

“이럴 수가…….”

칼바도스가 망국의 백성처럼 탄식했고, 나는 내 실수를 덮기 위해 최대한 긍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도 다시 아내랑 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말 아니었어?”

“야!”

칼바도스는 씩씩대며 몸을 휙 돌려 버렸다. 분위기를 환기한답시고 다시 입을 열면, 또 말 같지 않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9일 차.

“아가씨, 오늘은 황궁에 안 가세요?”

“응. 공부를 좀 하고 가야겠어.”

지금까지 칼바도스가 던진 질문 중 답하지 못한 질문은 없었다.

어린 엘렌시아가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모르는 내용을 물어볼 거야.’

그러니 다시 입궁하기 전에 공부를 해 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칼바도스의 눈에 자주 띄면 안 될 것 같았다.

매일같이 황자궁을 방문하면, 익숙함에 속아 버린 그가 내 존재의 소중함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이참에 친구 없는 외로움과, 황자궁의 적막을 어느 정도 맛봐야 한다.

‘혹시 알아? 왜 오늘은 오지 않냐고, 언제 올 거냐고 편지 한 통 보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칼바도스는 일주일 동안 나를 찾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내 발로 칼바도스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16일 차.

일주일 뒤, 책을 읽던 칼바도스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한동안 안 오길래 영영 안 올 생각인 줄 알았다. 황자궁이 조용한-”

“조용한 탓에 내 생각이 났다고?”

“조용한 덕에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역시 페르데니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내게서 눈을 돌린 칼바도스가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놈은 매번 책만 읽고 있네.’

공부가 저렇게나 좋을까?

학문을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을 나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남자 주인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19일 차.

최악이었던 첫 만남과 달리, 나는 놀라울 정도로 칼바도스와 잘 지내고 있었다.

함께 시몬 왕국어 회화를 공부했고,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정독했다. 서로 퀴즈를 내며 지식을 점검하기도 했다.

나는 칼바도스에게 지지 않기 위해 공작저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칼바도스 역시 나를 통해 배운 내용을 확인하고 모르는 내용을 새롭게 알게 되니,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친구였다.

‘솔직히 이쯤 되면 절친 아니야?’

따지고 보면 칼바도스나 나나 서로 친구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칼바도스는 친구가 나밖에 없었고,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칼바도스밖에 친구가 없었으니까.

“답답한데 산책 좀 하자.”

“그래.”

“검술 대련은 어때?”

리베르트 가문 사람들은 첫걸음을 떼는 동시에 검을 든다.

엘렌시아 역시 검술 스승이 있었고, 공작은 기사들 중 가장 어린 리온을 엘렌시아의 대련 상대로 삼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칼바도스가 내게 대련을 제안했고, 우리는 황자궁 밖으로 향했다.

‘리온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처음인데.’

나와 칼바도스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보호대를 찬 뒤 목검을 들었다.

대련장 한구석에선 리온과 체르티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검술 선생도 옆에서 보고 있는데 잘해야지.’

리베르트 가문의 체면도 있고 말이다.

‘꼭 실력을 인정받아서 남주의 충신 루트를 타자!’

나는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신 뒤,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검을 쥐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칼바도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내가 이기면 네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볼지, 그게 궁금해.”

“직접 확인해 봐, 그럼.”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그렇게 읊조리는 칼바도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런데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하지?’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심판은 시작을 알리는 붉은 깃발을 들었고, 칼바도스가 검을 휘두르며 내 쪽으로 돌진했다.

나는 칼바도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검이 들린 그의 팔을 내 팔과 몸 사이에 꽉 끼웠다. 그리고 내 검으로 칼바도스의 배를 감싼 보호대를 쿡 찔렀다.

몸 뒤쪽에서 칼바도스의 목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긴 것 같지?”

아쉽지만 칼바도스는 나한테 졌고, 그는 승리한 자신을 바라보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내 어깨를 살짝 밀친 칼바도스가 젖은 목소리를 짜냈다.

“그래, 나는 또 너한테 졌고, 패배한 네 얼굴을 볼 수 없었어.”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내가 이기면 네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볼지, 그게 궁금해.’

그 말은 내가 진 얼굴이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그때,

“역시 우리 아가씨.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리온과 체르티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일부러 눈치 없는 척하는 거다, 저거. 요 며칠 칼바도스가 나한테 까칠하게 구는 걸 보고, 묘한 반항심을 가진 게 틀림없다.

리온, 제발 조용히 해…….

칼바도스가 먼저 등을 보이며 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상처받은 것 같은 그의 얼굴에 나는 쉬이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무대를 뒤집다니. 다시 생각해 보니 리온의 말이 맞았다.

칼바도스에게 잘 보이라고 마련된 무대를, 내가 내 손으로 뒤집고 있었다.

원래 저보다 높은 사람과 겨룰 때는 한 수 접어 줘야 하는 법이었다.

혹시 검술 대련 말고 내가 칼바도스를 이긴 적이 또 있었나?

나는 차분하게 칼바도스와 함께한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

.

.

‘아…… 이거 진짜 큰일 났네.’

그동안 칼바도스는 나에게 책의 내용을 질문하며 내 실력을 테스트했다.

문제의 정답을 맞힌 뒤 나는 역으로 질문을 던졌고, 칼바도스는 몇몇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칼바도스는 자신이 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이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설마 미운털 박힌 건가?’

이렇게 쉽게?

아니지. 단순히 내가 이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칼바도스가 이렇게 찌질하게 굴 리 없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뭐지?

읽고 있던 책의 뒷 내용을 말해 버려서?

‘아니야. 이유가 될 순 있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다시 한번 지난날을 떠올려 봤지만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나는 그냥…… 네가 싫어!’

칼바도스는 처음부터 나를 싫어했다.

대체 왜?

지금의 내가 루카스를 지지하며 칼바도스의 일을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칼바도스는, 엘렌시아를 만나기 전부터 엘렌시아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설 속 칼바도스와 엘렌시아는 서로가 적이라서 싫어한 게 아니다.

‘서로를 싫어해서 적이 됐을 확률이 높겠어.’

엘렌시아가 칼바도스를 싫어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엘렌시아의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저 녀석은 대체 왜 날 싫어하는 거야?

모두에게 상냥하고 자애로운 남주인공이,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고.

“내가 ‘그냥’ 싫다고 했지.”

정말 그냥 싫은 건가?

그렇다면 내가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싫은 사람이 눈앞에 보이면, 그 사람이 뭘 해도 미워 보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이유 없이 뭔가를 싫어하고 미워할 수 있겠는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무언가를 싫어하는 데엔 사소한 이유가 하나라도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나를 싫어할 거면, 적어도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고 싫어하란 말이야.’

웃음소리가 경박했나? 말투가 거칠었나?

‘일단 이유라도 알자.’

나는 급히 칼바도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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