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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5)화 (5/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5화

“……아무래도 전하께서 산책을 나가신 모양입니다! 곧 돌아오실 테니 잠시만 안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래요?”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시종이 안타까워서 관뒀다.

“예.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시녀가 내온 오렌지주스를 마셨고, 빈 유리잔에 든 작은 얼음 하나를 문 채 생각에 잠겼다.

칼바도스는 왜 도망친 거지?

도망친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단 직접 찾아가서 묻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디에 간 걸까. 칼바도스가 중요한 손님을 버리고 도망칠 만한 장소가 어디지?

생각하자, 생각해.

‘아, 혹시 거긴가?’

소설에 나오는 칼바도스의 비밀 장소.

생각이 많아진 칼바도스가 자주 찾는 그 비밀 장소는 전 황후, 그러니까 칼바도스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은방울꽃 정원 근처에 위치한 미로 정원이었다.

“좋아, 한번 가 보자.”

나는 사람들 몰래 칼바도스가 빠져나간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

이미 황제의 안내를 받아 은방울꽃 정원을 구경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근처에 있는 미로 정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쉽게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미로 정원은 말 그대로 미로였으니까.

‘들어갔다가 못 나오면 끝이야.’

미로를 통째로 외워 버린 칼바도스와 달리, 나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실 같은 게 있으면 입구에서 묶고 들어갈 텐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리아드네 공주가 아니었고, 손에 쥔 실타래 역시 없었다.

그냥 칼바도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 구석에 놓인 하얀 조약돌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리아드네 공주는 될 수 없지만, 헨젤과 그레텔의 헨젤이 될 수는 있겠지.’

“에구구.”

나는 몸을 숙여 조약돌을 주웠고, 남자 주인공을 찾기 위해 헨젤이 되어 미로 정원으로 발을 들였다. 손에 들린 돌이 부족해질 때쯤, 수풀 안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칼바도스인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뗀석기처럼 생긴 돌 하나를 집어 들고는 소리가 들린 수풀 쪽을 향해 크게 말했다.

“여기, 토끼라도 숨어 있나?”

“…….”

“잘됐네. 데려가서 내가 키워야겠다.”

“……!”

“그리고 뒤룩뒤룩 살찌워서 메이한테 스튜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지금, 최고의 짱돌을 들고 너에게로 간다.

나는 돌을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높이 들어 올렸다.

“하나, 두울-”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덤불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금발의 소년이었다.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밝은 금발과, 태양이 머무는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

황제 디에고를 쏙 빼닮은 1황자 칼바도스 페르데니아였다.

투욱―

나는 손에서 돌멩이를 내려놓았다.

흉기로 보이는 돌멩이를 본 칼바도스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방금 그 돌로 나를 죽이려고 했지? 그거 황족 시해 미수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답했다.

“아닌데? 난 또 숲에 사는 토끼인 줄 알았지.”

“잠깐만…… 너 왜 나한테 반말이야?”

아 참.

동갑인 친구를 보자 나도 모르게 반말을 해 버리고 말했다. 딱히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심각한 표정을 하곤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존대를 해 드릴까요, 전하?”

“으……! 그냥 반말해!”

막상 존댓말을 들은 칼바도스가 경기 수준으로 고개를 저어 댔다. 가식을 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놈은 내가 반말을 해도 난리, 존댓말을 해도 난리였다. 어쩌라는 거야? 사람 짜증 나게.

“대체 왜 도망간 거야?”

“도망이라니! 나는 그냥…….”

그냥 뭐?

마저 말해 보라는 눈빛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목구멍 안쪽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토해 내듯 외쳤다.

“나는 그냥…… 네가 싫어!”

내가 싫다고?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하지만 진심인 듯,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는 칼바도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대체 남주가 왜 이 모양이야?’

남자 주인공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한다.

*

‘다정, 다정 남주였잖아요, 작가님……!’

나는 속으로 작가를 부르짖으며 칼바도스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왜 싫은데?”

“말했잖아. 그냥 싫다고.”

“세상에 그냥 싫은 게 어디 있어?”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어도 싫어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난 있어. 너.”

칼바도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기어이 확인 사살을 했다.

이놈 이거, 예의만 밥 말아 먹은 게 아니라 싸가지도 밥 말아 먹었다. 밥 안 먹고 빵 먹는 나라에 살면서 이것저것 많이도 말아 먹었다.

‘이런 게 남주라고?’

……이상하다. 칼바도스는 이런 행동을 할 녀석이 아닌데?

이상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어 한숨이 푹 나왔다.

‘일단 같이 황자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칼바도스에 이어 나까지 사라졌으니 황자궁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까 그 시종이 요절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궁으로 돌아가자.”

“싫어.”

입을 삐죽 내민 채 답한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바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이 고집불통.’

어쩔 수 없다, 이제 최후의 수단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가늘게 눈을 뜬 채 나보다 아주 조금 키가 작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

“너…… 자꾸 이러면 폐하한테 다 이른다?”

그러자 조금 전의 앙칼진 모습이 사라지고, 칼바도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는 내 소매를 움켜쥔 채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흐. 내가 이겼다.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 칼바도스가 여덟 살짜리 꼬맹이라는 것을 떠올린 나는 너무 기뻐하지 않기로 했다.

*

칼바도스는 순순히 나와 함께 황자궁으로 향했다. 아버지께 미움 받고 싶지 않은 칼바도스에게는 이게 약이었다.

칼바도스가 돌아온 걸 보고 황자궁 입구에 선 시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공녀님은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황제가 찾아왔다고?’

우리가 얼마나 잘 놀고 있는지 점검하러 온 건가? 아니면 칼바도스가 약속을 어긴 걸 알고 꾸짖으러?

시종의 말을 들은 칼바도스가 눈을 흘겼다.

칼바도스가 앞서가던 내 손목을 꽉 붙잡았다.

“너, 사실 폐하께 다 일러바친 거지?”

“아니거든, 바보야! 넌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애초에 황제가 알게 될 상황이 두려웠다면,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인 놈이 따지고 드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충분히. 그리고 난 바보가 아니야.”

바보라는 말에 무게를 둔 칼바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짜고짜 손목부터 붙드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매너인지 모르겠다. 한국 드라마라도 본 건가?

강제로 손목을 붙잡는 행동은 옛날 드라마에서나 로맨스로 포장되었지, 지금은 전혀 아니다.

“그래. 너 바보 아니야. 이제 됐지?”

그러니까 이제 손 놓을 거지?

바보가 아니라는 칼바도스의 말에 동의해 주었으나 아이를 다루는 듯한 내 말투가 싫었는지 칼바도스가 얼굴을 구겼다.

“……난 네가 진짜 싫어!”

칼바도스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맥없이 손의 힘을 풀었고, 그 바람에 몸이 앞쪽으로 쏠려 있던 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쨍그랑―

복도에 진열되어 있던 도자기 하나가 요란하게 깨져 버렸다.

붉어진 눈가와 코끝을 제외하고, 칼바도스의 얼굴 전체가 다시 한번 하얗게 질렸다.

단순히 도자기를 깼기 때문만이 아니다. 황제가 직접 부른 나를 넘어뜨렸다는 것 또한 하나의 이유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괘씸함보다 가여운 마음이 더 커졌다.

하지만 지금 가여움을 티 내선 안 된다.

동정은 자기보다 못한 이를 향하는 것이고, 칼바도스는 나의 동정을 받기 싫어할 테니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칼바도스의 어깨를 툭툭 치자 정신을 차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알려 줄까?”

“……뭔데.”

나는 칼바도스의 귀에 속삭였다.

“이럴 땐 서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면 돼. 넌 바보가 아니니까 어떻게 하자는 건지 충분히 알아들었지?”

“어.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어른들은 그런 답을 좋아하더라고.”

하나의 공식이다. 원래 무언가 큰 잘못을 했을 때, 서로가 상대를 감싸며 죄를 뒤집어쓰려 할 때, 윗사람은 이에 크게 감동하여 두 사람을 용서하는 법이었다.

칼바도스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안에서 문이 열렸고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도자기는 왜 박살이 난 거고?”

크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황제는 빠르게 칼바도스와 나에게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시선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칼바도스가 고해성사를 하듯 입을 열었다.

“……제가 억지로 붙잡고 있던 공녀의 손을 놓는 바람에 공녀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저 멍청이.

‘억지로’라는 말만 붙이지 않았으면 훨씬 나은 답이었을 거다.

“억지로 붙잡았다니?”

“그게…….”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처음 온 황자궁이 신기하여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저를 전하께서 붙잡아 주신 겁니다. 제가 빨리 걷다 보니 전하께서 실수로 손을 놓치신 거고요.”

그러자 칼바도스는 뭔가에 홀린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흐음…… 두 사람은 저 산산조각 난 도자기의 가치를 아는가?”

나는 바닥에 조각으로만 남은 도자기를 흘끗 내려다봤다.

맙소사. 발로 빚은 것처럼 생긴 저 도자기가 꽤나 귀한 작품인 모양이다.

역시 예술의 세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난해했다.

짧은 순간, 칼바도스와 나의 시선이 부딪쳤고,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은 우리는 자동으로 입을 열었다.

“제 잘못입니다, 폐하. 그러니 죄를 물으시려거든 황자 전하가 아닌 저를 벌해 주세요.”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리베르트 공녀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벌해 주십시오.”

나와 칼바도스의 갑작스러운 자기 고발 행위에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잠시, 황제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서로를 생각하는 두 사람이 보기 좋구나. 도자기는 내가 아카데미 교양 수업 때 빚은 것이라 큰 가치는 없다.”

그런 걸 왜 네 아들 궁 복도에 전시해?

귀한 건 줄 알았는데, 괜히 쫄았네.

“딱히 벌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이렇게나 벌을 받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지. 황자궁 입구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두거라.”

청천벽력 같은 황제의 말에 당황한 나와 칼바도스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

잠시 뒤, 나와 칼바도스는 황제의 지시대로 황자궁 앞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여기서 15분 동안 자기가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있거라. 반성하는 동안 친우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 알았느냐?”

황제는 제법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말끝마다 새어 나오는 웃음 탓에 나는 황제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칼바도스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황제가 떠나고 바로 태도를 바꾼 칼바도스가 꽤 험악하게 읊조렸다.

“……좋은 방법 알려 준다더니. 퍽이나 좋은 방법이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서 칼바도스가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유는, 황제의 시종이 바로 근처에서 시간을 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뭐냐는 듯이 칼바도스가 맞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폐하 앞에서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던 거 도와줬는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억지로 손목을 붙잡고 놔 버리는 망나니로 낙인찍히는 것보단 이게 낫잖아?”

“살다 살다 너처럼 혓바닥을 요란하게 놀리는 녀석은 처음 본다!”

내 혓바닥이 요란하다고?

‘네가 네 키스신을 보면 절대 나한테 그런 말 못 할걸?’

네가 셀레네랑 혓바닥을 얼마나 비벼 댔는데!

‘지금 누가 누구 혓바닥더러 요란하다고 하는 건지…….’

나를 무시하고 도망치질 않나, 초면에 싫다고 하질 않나, 손목을 붙잡질 않나……. 지금은 혓바닥이 요란하댄다.

배동으로 입궁한 첫날부터 최악이었다.

다정남 컨셉이었던 남자 주인공이, 소설의 내용과는 다르게 너무 지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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