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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화 (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화

그날 저녁, 디에고는 사랑하는 아들 칼바도스와 함께 식사를 하며 물었다.

“칼, 너는 어떤 꽃이 가장 좋으냐?”

“음…… 저는 해바라기가 가장 좋습니다.”

“이유는?”

“태양을 사랑하여 태양을 닮고, 태양만을 좇는 것이 태양신을 섬기는 우리 제국에 어울리지 않습니까.”

“네가 있어 제국의 미래가 밝구나. 태양신께서도 네 마음을 알아주실 거다.”

흐뭇한 얼굴로 아들을 칭찬했지만 디에고는 내심 아쉬웠다. 해바라기도 훌륭한 답이었으나, 목화만큼이나 디에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디에고가 칼바도스의 답을 들은 순간부터 미소를 짓는 순간까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아들은 아버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칼바도스가 슬쩍 디에고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리베르트의 그 애는…… 뭐라고 했는데요?”

“제국민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게 해 주는 목화가 가장 좋다더구나. 참으로 기특하지 않으냐? 어쩜 그리 마음이 고운지……. 리베르트에서 그런 아이가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예. 저와 동갑이지만 생각이 깊은 것 같군요.”

오늘도 아버지께선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하시네요.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 말을 뱉어 내는 대신, 칼바도스는 물을 들이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 황제와의 만찬에서 싫어하던 가지를 꾸역꾸역 먹은 칼바도스는 황제가 돌아가자마자 먹은 음식을 전부 토해 내고 말았다.

*

마정석 광산 문제로 리베르트 공작이 북부 영지로 떠난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메이가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아가씨, 황실 도서관에서 아가씨께 온 우편이에요.”

“황실 도서관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기울인 채 [긴급]이라 적힌 봉투를 뜯었다.

[엘렌시아 리베르트 공녀께서 대출하신 책이 연체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대출하신 다스쿠크의 『달과 시몬 왕국의 기원』을 찾으시는 분이 계시니 속히 반납하여 주십시오.

-페르데니나 황실 도서관]

‘벌써 그렇게 됐나?’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저택에만 박혀 있었더니 그새 빌려 온 책이 연체된 모양이다.

민폐 짓을 제대로 했다.

‘어라? 그런데 대출 기간은 2주라고 들었는데?’

대충 계산을 해 보니 날짜가 맞지 않았다. 책을 빌린 지 이제 열흘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도서관 직원이 실수한 것 같았다.

‘……나가기 귀찮은데 그냥 마지막 날 반납할까?’

그러다 곧 생각을 고쳤다.

‘아니야. 마침 찾는 사람도 있다니까 오늘 가야지.’

다른 사람에게 반납을 부탁할까 고민했으나, 직접 반납하고 다음번에 대출할 책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나는 집사에게 외출을 알린 뒤 공작가의 기사인 체르티, 리온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나를 시험하고, 황궁을 안내해 준 남자였다.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공녀님.”

“그러게요. 그런데 선생님께선 왜 도서관에 계시지 않고 여기 계세요?”

내가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자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리온과 체르티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 같았다.

‘뭐지?’

기이한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낀 내가 기사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그는 나를 붙잡듯이 말을 걸었다.

“산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던 길입니다. 지난번에 빌린 책을 가져오신 걸 보니 공녀님께서도 도서관에 가시는 모양이지요?”

“네.”

“그럼 함께 가면 되겠군요.”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책은 재미있었는지 묻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며 걸었다. 꽤 걸었을 때 갈림길이 등장했고, 남자는 아무 망설임 없이 오른쪽 길을 택했다.

‘도서관은 왼쪽 방향인데.’

나는 남자를 따라가는 대신 걸음을 멈추었다.

“저, 원래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내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도서관이 있는 왼쪽 방향에서 급하게 달려온 한 여자가 남자를 보며 소리쳤다.

“폐하! 어디 가실 거면 말 좀 하고 가시라고요!”

‘네? 누구요?’

“……저렇게 큰 목소리를 공녀가 못 들었을 가능성은 없겠지?”

곤란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짓던 그가 설산 같은 자신의 머리를 쓸었다. 곧 눈이 녹은 자리에 황금빛 밀이 자라났고, 나는 남자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금발과 파란 눈.

그리고, 재수 없는 얼굴을 한 남자.

공작이 말한 사람은 남주인공이 아닌 남주인공의 아버지였다.

“공녀가 대출한 책에 대해 나누고픈 이야기가 많아. 하여 도서관이 아닌 황제궁으로 공녀를 초대하도록 하겠다.”

황제의 보좌관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황제의 옆에 서 있는 나를 본 그녀는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체념하듯 말했다.

“……결국 저지르셨군요. 납치하신 겁니까?”

나는 속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분명 내 발로 알아서 황궁에 들어왔으나, 납치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보좌관의 말을 무시하고 목구멍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다정한 목소리를 골라 꺼냈다.

“그럼 갈까?”

“네, 폐하……”

그렇게 나는 황제궁에 끌려가게 되었다.

*

소설의 중반부터 미쳐 버린 황제 디에고.

황자 시절 황위 계승권을 둘러싼 1황녀와 1황자의 다툼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게 한량 같은 삶을 즐긴 그는, 평민의 탈을 쓴 황족이라 불렸다.

때문에 남작의 차녀인 일레노아 헤레이스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을 때도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1황녀가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1황자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그는 얼떨결에 황위에 올랐다.

당시 디에고와 약혼 상태였던 일레노아 헤레이스는 환영받지 못했고, 1황녀 세력과 1황자 세력은 일레노아에 대한 입장으로 다시 한번 분열되었다.

남작의 딸인 것은 둘째 치고, 그녀가 전 약혼자와의 사이에서 가진 아이를 유산한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1황녀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메릴 후작은 자신의 여동생인 카밀라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일레노아의 출신과 자질을 붙잡고 넘어졌다.

그러자 당시 소공작이었던 케이든은, 귀족회의장에서 선대 공작이었던 자신의 어머니께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일레노아 헤레이스를 리베르트의 수양딸로 들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누님이 생기니 좋고, 어머니는 제국의 황후를 딸로 두시는 셈이지요! 하하하!’

누나가 생겨서 좋다는 케이든의 광기 어린 한마디로, 그 누구도 일레노아의 출신을 지적하지 않았고 그녀가 아이를 유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게 일레노아는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일레노아 황후는 칼바도스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리고 지금은 후작의 여동생인 카밀라가 황후가 된 거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황제가 직접 따라 주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종종 공작과 집무실에서 즐겨 마시는 레몬차였다.

공작저에서 마셨던 것과는 다른 밍밍한 맛에 내가 차를 두 번 홀짝거리고 말자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나 공녀? 공녀가 자주 마시는 차라고 해서 준비했는데, 별로인가?”

“그걸 아저씨, 아니 폐하께서 어떻게 아셨어요?”

“케이가 그렇게 딸과의 오붓한 시간을 자랑하는데, 내가 어떻게 모르겠나.”

케이? 케이든 리베르트 공작을 말하는 건가?

“아, 공녀는 모르겠군. 그놈이 말해 줬을 리 없으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케이든은 내 아카데미 동기야. 둘도 없는 친우지.”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우시면서, 왜 저를 몰래 부르셨어요?”

“공녀를 직접 만나 보고 싶었어. 케이는 내게 공녀를 직접 소개해 주지 않을 거거든.”

공작은 처음부터 금발에 푸른 눈의 남자를 피하라고 경고했다. 혹시 내가 황제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아버지께선 왜 제가 폐하를 뵐 수 없게 하시는 걸까요?”

“……글쎄?”

황제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다른 이들은 사람 좋은 웃음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저 웃음이 이상할 정도로 찝찝했다.

“그건 그렇고 서론이 길었네. 내가 오늘 공녀를 이 자리에 불러들인 이유는…….”

그러면서 황제는 잠시 뜸을 들였다. 뒷말이 바로 이어지지 않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라기 시작했다.

눈치 따윈 하나도 보지 않게 생긴 황제가 내 표정을 살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우리 칼바도스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야.”

“친구요?”

남자 주인공의 친구?

“마침 공녀가 칼바도스와 동갑이기도 하니 말이야. 어떤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이건 드라마에서 굉장히 자주 볼 수 있는 역할이다.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주인공 왕세자의 배동.

대부분 남성이 맡는 이 역할이 밟을 수 있는 루트는 두 가지다.

여주인공을 짝사랑하여 남주인공의 연적이 되거나, 끝까지 남주인공의 충신으로 남거나.

‘보통 드라마에서 이런 역할은 남주의 연적이 되지 않으면 끝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많지.’

남주인공에게 줄을 설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로 지금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머릿속에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중대사를 나 혼자 결정해도 되나?

놀이터에서 애들끼리 만나서 노는 것도 아니고, 황자의 배동을 뽑는 건데 말이야.

별수 없이 나는 다잡은 고기를 놓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공녀가 바란다면 케이는 무엇이든 들어주겠지.”

‘그건 그렇지.’

나는 황제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의 뜻이 곧 공작의 뜻이 되니까.

“그러니 나는 공녀의 의견을 듣고 싶군.”

그렇다면 별로 고민할 건 없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지지해 줄 사람이 뒤에 있으니, 나는 그 사람을 믿고 눈앞에 있는 줄을 잡으면 된다.

나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내 답에 황제는 광대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칼바도스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답은 나왔다.

황제는 내가 칼바도스의 배동이 되기 원한다. 그러니 나는 곧 그의 배동으로 입궁하게 될 것이다.

내 뜻이 공작의 뜻이 되는 것과 달리, 황제의 뜻은 곧 칼바도스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난 적 없는 나와 칼바도스의 첫 번째 차이점이었다.

*

황제의 친서를 받고 북부에서 돌아온 공작은 이를 갈았다.

카인은 황자가 싸가지 없게 굴면 바로 자신에게 말하라고 했다. 내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과 좋은 관계를 쌓아야 하는 나는, 성난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기꺼이 칼바도스를 만나러 향했다.

‘칼바도스가 본격적으로 위기에 처한 건, 아버지가 미쳐 버렸을 때였지.’

소설에서 황제가 미쳐 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2황자 루카스가 황위를 탐하자 아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황후가 약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후에게 그 약물을 건넨 건 엘렌시아고.

물론, 아직은 루카스가 황위를 탐하지 않아 아주 건강한 시기였다. 하지만 머릿속을 채운 건 미쳐 버릴 황제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을 만나면 어떻게 호감을 얻어야 하지?’

였다.

황제가 미치는 건 머나먼 일이고, 칼바도스를 만나는 건 바로 잠시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칼바도스가 황제의 마음을 얻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외가는 존재감 없는 남작가. 그 와중에 제국의 몇 안 되는 공작가 중 디아스 공작가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니 칼바도스는 리베르트 공작가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은 칼바도스가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곁에 두는 것과 곁에 두고 싶어서 두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다.

‘칼바도스가 뭘 좋아하더라?’

아, 이제 생각해 보니 이 의젓한 남자 주인공은 취미가 공부, 독서, 검술이었다.

이곳에 온 뒤 쓸데없이 긴 수업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지만, 마냥 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길 잘한 것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영민한 칼바도스이니 학문 관련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황자궁에 입성한 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칼바도스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에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그림과 못생긴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예술의 세계는 복잡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 앞에 다다른 시종이 걸음을 멈추었다.

“전하, 리베르트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

시종이 나의 방문을 알렸으나,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황자의 침묵에 당황한 시종이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전하! 리베르트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황자의 대답 대신 나를 마중 나온 정적에, 시종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전하? 헉……!”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의 상황이 보였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 자리에 없는 1황자 칼바도스.

납치 흔적은 없었다.

‘……야반도주?’

내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칼바도스 이 녀석,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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