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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화 (3/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화

다음 날, 나는 온갖 고서가 수집된 공작 부인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취향 때문일까? 시몬 왕국과 관련된 적절한 책을 찾아볼 순 없었다.

‘그럼 황실 도서관에 가는 수밖에 없겠어.’

나는 외출 허가를 받기 위해 공작에게 달려갔고, 공작은 내 얘길 듣더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엘리.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황궁에서 금발과 푸른 눈의 재수 없는 낯짝의 남자를 만난다면, 말도 섞지 말고 피해야 한다. 알았지?”

“왜요?”

“만나서 좋을 게 없단다.”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공작의 얼굴이 워낙 험악했기 때문에, 살짝 쫄아 버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어요.”

공작의 집무실을 나선 나는 문에 기댄 채 소설 『달의 미로』의 삽화를 떠올렸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라면…… 남자 주인공인데?

공작이 나와 칼바도스의 만남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

점심 식사 후, 공작은 약속대로 나를 데리고 황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황제의 보좌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공작을 찾아오는 바람에, 나는 공작이 아닌 공작가의 기사 리온의 안내를 받아 도서관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깔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사서가 나를 바라보았고, 리온은 조금 거리를 두고 내 뒤를 따랐다.

도서관의 사서, 공작과 같은 은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이 아름다운 중년 남자가 허리를 숙여 몸을 낮추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이 금발에 푸른 눈을 조심하라 했지.’

뭐, 공작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저 남자는 금발이 아닌 은발이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무슨 책이 필요하신가요, 공녀님?”

“시몬 왕국 관련 서적을 보고 싶은데요.”

“시몬 왕국에 관심이 있으신가 보죠?”

“우리 제국과 남매의 나라니까요.”

페르데니아 제국을 수호하는 태양신과 시몬 왕국을 수호하는 달의 신이 오누이였고, 두 신의 관계가 두 나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내가 시몬 왕국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 가지였다.

여주인공인 셀레네가 시몬의 공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 시몬에 관심이 많다는 걸 보여 주면 호감을 살 수 있을 테니까.

여주인공을 만날 시기를 계산하고 있던 그때, 사서가 책을 내왔다.

“여기에 왕국 관련 서적이 있습니다.”

나는 책의 앞부분을 몇 장 훑어본 뒤 시몬 왕국의 대표적인 문학을 담은 책과 왕국을 수호하는 여신의 이야기가 담긴 『달과 시몬 왕국의 기원』이라는 책을 들어 아저씨에게 건넸다.

“이렇게 두 권 빌리고 싶어요.”

책을 받아 든 그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이 책의 제목이 뭔지 아나요?”

“설마 제가 제목도 모르는 책을 빌릴까 봐요?”

“하지만 공녀, 이 책은 시몬 왕국어로만 적혀 있어요.”

“알고 있어요. 읽을 수 있으니까 빌리려는 거고요.”

엘렌시아는 이미 시몬 왕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니, 독서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내 말이 믿기 어려운 것인지, 그는 손에 들린 문학책을 무작위로 펼쳐 내게 들이밀었다.

“첫 문장을 읽어 봐요.”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하지만 황실에서 패악질을 부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대충 한 문장을 읽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태양과 달은 다른 시간을 지배하지만 두 신은 언제나 함께하며 결코 서로를 등지지 않는다.”

그러자 남자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내 아들이 모자란 건가.”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분명 아들 어쩌고 한 거 같은데?

‘뭐, 나랑은 상관없나.’

나는 도서관을 나서기 위해 남자에게서 대출한 책을 받아 들었다. 두 권 다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 팔이 떨렸다.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그때 내내 뒤쪽에 서 있던 리온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고, 나는 흔쾌히 책을 건넸다.

그렇게 나와 리온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공작을 따라간 체르티 경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나와 리온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온 체르티가 말했다.

“공녀님!”

“경, 아버지는?”

분명 공작과 함께 돌아올 줄 알았는데, 체르티는 혼자였다.

“황제 폐하와의 자리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으니, 도서관에서 기다리시거나 먼저 돌아가셔도 된다는 공작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황제도 금발에 푸른 눈이었지.’

어쩌면 공작이 피하라고 말한 사람은 칼바도스가 아니라 황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둘 다거나.

그나저나 어쩐다. 먼저 저택으로 돌아갈까?

‘하지만 황궁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내 집 드나들듯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한 번 왔을 때 눈에 가득 담아 두고 싶었다.

고민을 하던 그때, 조금 전 나를 짜증 나게 만들었던 사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를 엿들어서 죄송하지만,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황궁 안내를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드릴 겸 해서요.”

솔직히, 저 제안이 조금 끌렸다.

“마침 저는 근무 시간도 끝났고, 황궁 지리를 잘 알고 있지요.”

남자의 왼쪽 가슴에는 신분증이 부착되어 있었다.

신분도 보장되었고, 황궁 지리도 잘 안다니. 안내자로서 더할 나위 없었기에 나는 남자의 제안을 수락했다. 타이밍 좋은 남자의 호의에 조금 전의 무례는 잊은 지 오래였다.

*

“1황자 전하께선 아주 잘생기신 분입니다. 폐하를 닮으셔서 그런가, 하하.”

“아. 네…….”

이 자식, 칼바도스 추종자인가?

넉살 좋은 이 남자는 황궁을 안내하는 내내 1황자의 이야기를 쏟아 냈다. 처음엔 남주인공인 칼바도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나는 점점 남자의 수다스러움에 지치기 시작했다.

“공녀님께선 1황자 전하를 만나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글쎄요. 한 번 정도는 만나 뵙고 싶긴 해요.”

일단 만나야 호감을 사든 말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 답에 입꼬리를 올린 남자가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황궁에서 가장 순수한 장소라 불리는 은방울꽃 정원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글로만 읽었을 땐 어떤 느낌인지 몰랐는데.’

직접 이 정원을 눈으로 보게 되니 황궁에서 가장 순수한 장소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칼바도스의 어머니인 일레노아는 이 정원에서 차를 마시곤 했다. 황궁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이 정원은 조용한 곳에서 차를 즐기는 전 황후를 위해 황제가 선물한 곳이었다. 칼바도스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로 정원을 혼자만의 비밀 장소로 삼았다.

‘초상화로만 마주한 어머니를 그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장소가 되었지.’

“이 정원은 1황자 전하의 어머니께서 좋아하신 곳입니다.”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었던 정보였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은방울꽃을 가장 좋아하셨지요. 어두운 밤길을 비춰 주는 등불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단어 사이사이로 이상한 애틋함이 느껴진달까.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일레노아를 입에 올리는 남자의 눈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이 아저씨, 황후를 짝사랑했나?

‘왜 저렇게 혼자 아련하게 서 있어?’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내 시선을 의식한 그는 바로 그리움을 걷어 내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공녀님께선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냐고?

나는 저 말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답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니까.

하지만 나는 꽤 괜찮은 답을 안다.

사극의 세자빈 혹은 후궁 경합.

‘궁에서는 후보들에게 음식을 준비시키거나 좋아하는 꽃을 말하라고 하지.’

음식은 보통 소금을 가져오는 후보가 1등을 차지한다.

그리고, 꽃은…….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대사를 떠올린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목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제국민들이 추운 겨울을 버티게 해 주고 다음 계절을 그릴 수 있게 하니까요.”

옛날이야기에선 말이다, 좋아하는 꽃으로 목화를 언급하고 가장 귀한 음식으로 소금이나 물을 가져오는 후보가 최종 당선되기 마련이다.

그 공식이 먹힌 것인지 크게 감명받은 얼굴을 한 남자가 말했다.

“공녀님께선 정말 생각이 깊으시군요.”

남자의 눈동자엔 내가 담겨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구를 보고 있는 거지?

*

황궁을 한 바퀴 둘러보았음에도 공작이 돌아오지 않자 공녀는 더 기다리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안내를 마친 남자가 풀숲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목화라, 어쩜 그리도 마음이 고운지.”

공녀를 며느리로 삼으면 딱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끊긴 콧노래를 이어 불렀다.

잠시 뒤, 먼 곳에서 달려온 한 여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따졌다.

“지금,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머리는 왜 그 모양이시고요?”

“내 머리카락이 도금이었던 거지. 몰랐나, 샤를?”

“……리베르트 공작님께서 아까부터 계속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굴이 어찌나 살벌하시던지. 사람 하나 잡아드신 줄 알았다고요. 10분 안에 안 오시면 그냥 돌아가시겠답니다.”

“그놈이 한 명 더 잡아먹기 전에 돌아가야겠네.”

“네, 제발요. 폐하.”

도서관의 사서를 폐하라 칭한 샤를이 남자의 가슴에 부착된 신분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칭은 범죄입니다.”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자 남자는 순순히 신분증을 반납했다.

“황궁 안에서 마법 사용도 금지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여자의 말에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이 풀리고 남자의 은빛 머리카락이 금발로 변했다.

페르데니아 제국의 황제 디에고는 성난 친우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길을 나섰다.

*

그 시각, 케이든 리베르트는 알현실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황제의 명이라면 딸을 데려다주고 조금 늦게 황제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에 케이든은 알현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놈은 자기가 불러 놓고 왜 이렇게 늦어?”

마주 봐야 할 황제 디에고의 얼굴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잠시 뒤,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케이든의 얼굴을 본 디에고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정말이네. 사람 둘은 잡아먹은 얼굴이야.”

“중요한 일 아니면 가만 안 둘 거야.”

“아, 정말 중요하고 급한 일이지. 제국의 미래가 달려 있을 정도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케이든의 독촉에, 맑은 미소를 띤 디에고가 천진하게 물었다.

“자네 딸, 나 주면 안 돼?”

“……뭐?”

“우리 칼바도스 짝으로-”

“뭐?”

“자꾸 못 들은 척하는데, 엘렌시아를-”

“이 미친 황제가!”

분노에 가득 차 얼굴이 벌게진 케이든이 일어서서 디에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엘렌시아가 참 영특하더군. 생각도 깊고.”

“……꼭 방금 전에 만나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데.”

“맞아. 방금 도서관에서 만나서 같이 산책까지 하고 오는 길이야!”

뻔뻔한 디에고의 태도에 케이든은 허탈하게 손을 풀었다.

“분명 금발에 푸른 눈의 남자를 조심하라고 분명 말해 두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머리카락을 케이든과 같은 은발로 바꾸었다.

“자네가 그랬을 줄 알고 도금을 했지!”

‘기어이 만났구나!’

이 철없는 황제가 마법까지 써 가면서 꾸역꾸역 딸을 만난 것이다.

케이든이 욕을 삼키며 머리를 싸맸다.

“설마 일부러 나를 여기로 부른 건가?”

황제가 대답 대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공작은 멱살을 잡는 대신 한숨을 한 바가지 흘리며 소파에 앉았다.

“그나저나, 엘렌시아는 언제부터 시몬 왕국어를 공부한 거야? 칼바도스는 아직 그렇게 능숙하지 못한데 말이야.”

황제는 자신을 꼭 빼닮은 1황자를 떠올리며 엘렌시아를 칭찬했다. 그리고 오늘, 사랑하는 아들 칼바도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칼바도스가 목화만큼이나 훌륭한 답을 내놓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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