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2화
내가 엘렌시아의 몸을 차지한 첫날 아침,
“엘리, 파프리카도 먹어야지.”
샐러드 접시 위 파프리카를 가장자리로 밀어낸 나를 보며 공작이 말했다.
‘파프리카 싫은데.’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공작의 눈이 다른 곳을 향한 순간, 옆자리에 앉은 카인이 내 접시에 올려진 파프리카를 잽싸게 집어가 대신 먹어 주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원하는 눈으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어쩌란 거지.
‘칭찬을 해 달라는 건가?’
칭찬이 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공작의 눈을 피해 몰래 먹어 준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카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오빠.”
테이블 밑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주자, 카인이 방긋 웃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고맙다는 내 말 한마디로도 기뻐하는 모습이 꼭 우리 오빠를 닮은 것만 같았다.
“어휴.”
빈 접시와 웃고 있는 카인을 보고 상황을 판단한 공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숨도 잠시, 꽤나 귀여운 카인의 행동 탓에 공작은 이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눈을 뜬 시간부터 가족들과 화기애애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시간까지, 알아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지금 나는 여덟 살이고, 내 오빠 카인 리베르트는 열 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카인 리베르트는, 걸음마와 동시에 검을 든다는 리베르트 가문에서 유일하게 검을 들지 못한 사람이었다.
엘렌시아와 달리 카인은 검에 재능이 없었다.
‘대신 마법에 재능이 있었지.’
그는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을 사랑했다.
하지만 지난겨울, 북부 공작저에서 카인의 마나 폭주로 수많은 고용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카인과 함께 정원에서 뛰놀던 엘렌시아 역시 사고를 피해 가지 못했다. 등에 남은 흉터가 그 증거였다.
사람들은 이 사고를 ‘리베르트의 참사’라 불렀다.
자신 때문에 소중한 동생과 고용인들이 다쳤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삐뚤어진 카인의 가출 소동이 해결된 이후, 이 가족은 더욱 돈독해졌다.
‘지금은 공작 부인이 수습을 위해 북부에 남아 있고.’
리베르트 공작 가문은 너무나도 화목하고, 이상적인 가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불행한 유년 시절이 기본 옵션으로 탑재된 주인공조 세 사람에 비해 엘렌시아 리베르트의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황제의 기대 속에서 이복동생을 견제하며 자란 1황자 칼바도스.
후작가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학대당하고, 유일하게 저를 구하려던 형을 눈앞에서 잃은 외눈 검사 레이델.
그리고, 왕위 계승 문제로 혼인 동맹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해 제국 아카데미로 도망치듯 유학 온 시몬 왕국의 왕녀 셀레네.
‘……나만 빼고 다 불쌍하네.’
보통 소설 속 악역들은 불행한 과거를 하나씩은 가지기 마련이다.
학대를 당했다거나, 배신당했거나 등 삐뚤어질 만한 사연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 여자의 인생에는 어떠한 시련도, 역경도, 고난도, 불행도 없었다. 엘렌시아는, 사연 없는 악역이었다.
나는 엘렌시아의 책상 서랍에서 찾은 작은 수첩에 앞으로 일어날 중요 사건들을 차례차례 적기 시작했다. 한글로 적었으니 다른 이들이 알아볼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가장 아래에 적은 ‘사형’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시선을 붙잡았다.
그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리가 들려온 건 창문 쪽이었다.
‘여긴 3층인데.’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람이라 생각하며 창가를 흘끗 보자 반투명한 새 한 마리가 창문을 열어 달라는 듯 두드리고 있었다.
“비둘기?”
새의 몸통이 투명하여 바로 뒤에 있는 나뭇가지가 비쳤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새의 몸이 터지고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게 뭐야?”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카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것이 마법임을 알 수 있었다.
“엘리!”
해맑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던 카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엘리, 같이 산책하자!”
방금 전 식사로 집안 분위기와 가족 관계를 파악한 나는, 아주 완벽한 엘렌시아를 연기하며 답했다.
“알겠어, 금방 내려갈게!”
메이에게 나갈 준비를 하자는 말을 전하려던 때였다.
“자, 얼른 뛰어내려!”
뭘 하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카인이 있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나를 향해 팔을 활짝 벌린 카인이 해맑게 소리쳤다.
“오빠가 마법으로 받아 줄게!”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저 가느다란 팔로 3층에서 뛰어내리는 나를 받겠다고?
‘농담이겠지.’
농담이기를 바라며 메이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안 말려?’
안전하게 계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해 줘, 제발.
내가 창문에 몸을 걸치는 그 순간까지 메이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정원의 고용인 그 누구도 뛰어내리기 직전인 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설마 이 집에서는 이게 정상이야?’
카인 리베르트는 여전히 양팔을 벌린 채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카인 리베르트를 내려다보며 그의 미소에 답하듯 환하게 웃었다.
“하, 하하하……! 잘 받아 줘야 해……!”
아 진짜…… 일단 이놈의 집구석에 적응부터 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3층 창문에서 몸을 던졌고,
“잡았다.”
몸이 훅 꺼지는 느낌이 없어 의아해할 때, 카인 리베르트가 나를 안아 든 채 말했다. 그러고는 ‘봤지?’ 하는 표정으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내가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고 내 무게를 가볍게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가늘고 가는 팔로 나를 이렇게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
우리 남매가 두 손을 꼭 붙잡고 향한 곳은 공작이 부인을 위해 만든 장미 화원이었다. 화염과도 같은 붉은 장미가 햇빛 아래에서 타오르는 것만 같은 화원. 그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아야!”
따끔한 느낌과 동시에, 굵은 장미 가시에 찔린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왜 그래?”
“가시에 찔렸어. 별거 아냐.”
“이게 어떻게 별게 아니야? 네 손에서 피가 나잖아.”
오늘 하루, 계속 나를 보며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다 태워 버릴 거야.”
“……?”
‘잘못 들었나?’
잘못 들은 것이어야 했다. 이곳은 공작 부인이 아끼는 곳이었고, 무엇보다도 장미는 아무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나의 부주의였다.
하지만 카인은 공작 부인이 이곳을 아낀다는 사실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내가 다쳤다는 사실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네.’
자기 때문에 동생이 크게 다친 과거가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내가 계단에서 넘어지면 계단을 없애기라도 할 거야? 내 방 3층인데.”
“응. 오빠가 업고 날아가면 되니까.”
아 맞다. 이 녀석 마법사였지.
“장미를 태우는 건 싫어.”
“알았어.”
카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다.”
따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카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장미 줄기의 모든 가시들이 뽑히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장미의 처형이 끝나고, 나는 나와 카인을 위해 마련된 정원의 작은 의자에 앉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화 속에나 있을 것처럼 맑은 하늘이었다.
“봄이구나.”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내가 죽은 날은 길고 긴 겨울 중 유독 낮이 짧은 하루였다.
그러고 보니…….
‘오빠 생일에는 눈이 온다기에 같이 눈 구경을 하기로 했지.’
그런데 하필 생일 하루 전날 내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눈 왔으면 좋겠다.”
아주 펑펑.
눈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기대감이 아니라 허탈함이 담긴 내 말에, 카인이 나를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하긴, 지금은 봄인데. 어떻게 눈을 볼 수 있겠…… 어라?’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
더 큰 아쉬움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 기대를 접으려던 그때, 하얀 솜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리베르트 저택에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도라에x!’
약간 이상한 놈에서 유능한 도라에x으로 호감도가 상승했다.
한국에서 오빠와 함께 보지 못한 눈을, 다른 세계에서 다른 오빠와 함께 보고 있었다.
눈이 온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조금은 울적했다.
‘한국에도 지금 눈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오빠와 같이 눈을 보겠다는 약속을 반은 지킨 것이 되니까.
나는 눈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또 다른 오빠와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가 이렇게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이 말은, 모든 것이 거짓인 내가 소설의 등장인물에게 고하는 첫 진심이었다.
*
눈을 내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카인은 이상할 정도로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턱 바로 밑까지 이불을 덮어 준 그가 따뜻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피곤함이 몰려와 눈이 점점 감겼다. 하지만 카인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오늘은 엘리 네가 내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사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건 언제나 내 쪽이야.”
고맙다는 내 말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툭 치면 울어 버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날 나한테 떠나지 말라고 말해 줘서, 네 곁에 남을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그날. 떠나지 말라는 말.
나는 엘렌시아가 아니었으나,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겨울, 카인의 마나 폭주로 북부 저택의 고용인 수십이 죽거나 다쳤고, 사고에 휘말린 엘렌시아가 의식을 잃었다. 그 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카인은 리베르트 가문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저택을 떠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동생인 엘렌시아가 떠나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며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엘렌시아는 붙잡았고, 카인은 기꺼이 붙잡혔다.
‘사실 카인은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렇게 카인의 가출 소동은 끝이 났고, 이 가족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알지? 오빠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너야.”
다정한 목소리가 봄비처럼 귓가에서 속살거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카인과 엘렌시아의 옛이야기를 해방시키라도 하듯이, 카인이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 엘리.”
“응. 오빠도.”
카인이 무언가를 더 바란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꿈에서 만나자.’
‘응. 오빠.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어린 날, 잠들기 전 오빠와 나눈 인사를 꺼냈다.
“꿈에서 만나, 오빠.”
“응. 오빠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카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달칵―
방문이 닫혔고 어둠이 찾아왔다. 카인 리베르트가 이 방을 떠난 뒤, 눈이 번쩍 떠졌다. 편안했던 침대가 갑자기 불편하게 느껴졌다.
양심 없게도 나는 엘렌시아를 향한 그의 친절로부터 마음의 평온을 얻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의 호의를 받고 있으면서, 나는 그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이 죄책감을 덜어 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가 나에게 진심인 만큼, 나 또한 그에게 진심이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