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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화 (1/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화

눈앞에 선 남자가 말했다.

“사랑합니다.”

그 순간 철썩― 하고 파도가 쳤다. 조금 전 남자가 한 말은 아주 잘 들렸으나, 나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물었다.

“뭐라고요?”

거센 바닷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이 눈앞을 가렸다. 조금 떨어져 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사랑한다고요. 내가 당신을 아주 많이.”

“나도요.”

나는 까치발을 들어 남자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진 후 나는 살짝 웃었다. 그것도 잠시, 남자의 큰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방금 전보다 훨씬 진한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촬영이 끝났다. 나는 조금 성가신 표정으로 목도리를 풀었다. 옆에 서 있던 오빠의 친구이자,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물었다.

“시우 너 안 추워? 목도리 계속 하고 있지.”

“목이 답답해서 싫어요.”

어렸을 적부터 목도리는커녕 목걸이도 차지 못했고 목티는 입지도 못했다. 셔츠도 갑갑하다며 곧 단추를 풀던 나였다. 옆에 선 선배가 담요 하나를 건넸다.

“전생에 교수형 당하면 그렇다더라. 너도 혹시 대역 죄인이라-”

“전생은 무슨.”

내가 목티, 목걸이를 꺼리는 이유는 전생 때문이 아니라 촉각 방어 때문인데.

“네 오빠가 방송 보면 기절하겠다. 그때 사진 찍어서 보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동시에 입을 헹궜다.

이름은 한시우. 인생의 절반 넘는 시간을 배우로 살았다.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한참을 달리던 중 매니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물었다.

“너 결혼해?”

“응?”

내가 뭘 해?

나도 모르는 내 결혼 소식을 남에게 듣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핸드폰을 냉큼 낚아채 화면을 제대로 확인했다.

<한시우, 재벌 2세와 연애中, 은퇴 목적은 결혼?>이라는 뒷목 잡을 헤드라인에 사진 하나가 실려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밀회야? 롱패딩에 맥주캔 쑤셔 넣은 거 안 보여?”

그리고 사진 속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이 재벌 2세라는 남자는 코트 속에 육포와 오징어 다리를 가득 담은 채였다. 혜성 회장 아들, 그러니까 서도영은, 이 지구에 둘만 남아도 절대 연애 대상으로 거들떠보지 않을, 내 불X 친구였다.

‘미친 거 아니야?’

은퇴는 맞지만, 그 목적이 결혼은 아니었다.

그냥, 꾸역꾸역 일을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더라?’

이번에도 나오지 않는 답을 찾는 대신, 나는 내 핸드폰을 끄고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다른 핸드폰을 꺼냈다.

“너 알고 있었어? 원래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남주가 재벌인 거 숨기고 만나다가 나중에 여주가 정체 알고 놀라잖아.”

“걔네 아빠랑 우리 아빠랑 친구야.”

그러니 모를 리가 없었다. 허구한 날 서도영의 아버지가 “너희 어머니랑 나랑, 자식들끼리 결혼을 시켜서 사돈을 맺기로 했다!”라고 했지만 언제나 오빠가 나서서 “그럼 차라리 제가 결혼할게요. 시우는 건드리지 마세요.”라며 막아섰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아버진 엄청 화를 냈는데, 아저씨는 그 모습이 재밌다고 웃었다. 이쯤 되니 그 아저씨는 일부러 그런 장난을 치는 거다. 대학 시절부터 얼굴이 빨개진 채 화를 내는 아버지 모습이 재밌다고 했으니까.

나는 다른 핸드폰으로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걸기 무섭게 서도영이 전화를 받았다.

“바빠?”

- 나는 별로. 왜?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나와 달리 여유로운 목소리가 얄밉게 그지없었다. 아마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두고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힌 채 나와 통화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안 바쁘면 너희 건물 옥상에서 번지점프나 해. 물론 줄 없이.”

- 너랑 같이 뛰어내리려고 기다리던 중이었어.

한마디도 지려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절교할까. 깔끔하게?”

무릎 위에 탭을 올려 두고 핸드폰을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기사를 훑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그와 나의 이름을 보자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지만 그 감촉이 익숙했다.

‘이런 오해를 한두 번 받아야지.’

초등학교 때부터 따라붙은 소문은 지루하다 못해 지겨웠다.

절교를 선언한 내 말에 그가 뻔뻔하게 말했다.

- 나 너 없으면 친구 없는데.

나는 그의 헛소리를 알아서 걸러 들었다. 그렇게 소소하게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붓던 그때, 나는 미친 듯이 운전석 등받이를 걷어차며 외쳤다.

“이 미친, 야! 앞에-! 앞에 봐!”

“어?!”

눈비 섞인 차 앞 유리로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트럭 운전자가 운전 중 발작을 일으킨 것 같았다.

잠시 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고,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뭔가를 해 볼 틈도 없이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

잠시 뒤, 늦잠을 잔 주말 오후처럼 눈이 번쩍 떠졌고, 낯선 천장이 나를 반겼다.

‘……요즘 vip 병실은 이런가?’

생각보다 몸이 멀쩡했기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병원이 아니구나.’

병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여긴 도대체 어디냐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보는 방 안이 꽤나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칼을 헤집던 그때, 아기자기한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링거 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누가 봐도 이 손은 성인 여성의 손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얼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울을 찾았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물결처럼 찰랑거리는 은발에,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자아이였다.

‘물결처럼 찰랑거리는 은발, 석류알 같은 붉은 눈동자.’

아니라 믿고 싶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묘사를 그대로 옮겨 둔 듯한 이 얼굴.

엘렌시아 리베르트.

본능적으로 어느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 여기 소설 속이네.”

엘렌시아 리베르트는 소설 『달의 미로』의 악역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소설의 줄거리를 찬찬히 떠올렸다.

그래, 소설 『달의 미로』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주인공인 시몬 왕국의 공주 셀레네가 제국 아카데미로 유학을 오며 시작된다. 1황자 칼바도스와 사랑에 빠진 그녀가 칼바도스와 함께 그를 위협하는 2황자 세력을 몰아내는 이야기였다.

『“제국에서 금해 온 흑마법을 사용하여 견고했던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린 죄와 1황자 칼바도스 르안테 페르데니아를 시해하려 한 죄를 물어 마탑주 카인 리베르트를 사형에 처하며-”

밧줄에 포박된 채 교수대 앞에 선 카인은 사형 바로 직전의 그 순간까지도 건조한 눈빛으로 한구석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곧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읊조렸다.

“시몬 왕국과 내통하고, 1황자 시해에 앞장선 엘렌시아 리베르트 또한 사형에 처한다.”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엘렌시아의 은발은 윤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잠시 뒤 엘렌시아 리베르트의 목에 빳빳한 밧줄이 걸렸다. 그리고,

덜컹―

칼바도스가 셀레네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카인 리베르트는 눈을 감지 않고 그 모습을 담았다.』

엘렌시아는 약혼자인 2황자 루카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행하였고, 그녀의 오빠, 마탑주 카인은 엘렌시아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타인에게 비극을 선사한 만큼 남매의 끝 또한 비참했다.

엘렌시아 리베르트.

남주인공 칼바도스가 아닌 2황자 루카스를 지지하며,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여정을 가로막은 악역. 이 여자의 인생은 교수대 위에서 목에 밧줄을 칭칭 감은 채 끝이 난다.

“……미치겠네.”

소설 속 인물이 되었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두고 온 이들이 떠올라서 슬프긴 했지만 길게 슬퍼할 틈이 없었다.

그곳에서 땅에 묻히는 것 또한 내 쪽이었으며, 이제부터 두고 온 이들을 가슴에 묻는 것 또한 내 쪽이었으니까.

‘엘렌시아가 몇 살에 죽더라?’

저보다 두 살 어린 2황자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일을 벌이다 사형당했으니…… 20대 초반에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굵어지려다가 만 그녀의 짧은 인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는 꼭 오래 살자.’

방금 전에 죽음을 맞이한 나는, 나의 두 번째 죽음과 엘렌시아의 두 번째 죽음을 피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이곳에서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조용히 북부 영지에서 은거하거나, 주인공과 좋은 관계를 쌓아 한자리 차지하거나.

하지만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일단 주인공한테 붙어야겠네.”

마탑을 택한 카인 리베르트를 제외하면, 내가 리베르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북부에서 숨죽이고 살아갈 순 없다.

무엇보다도, 이왕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제대로 누리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지금부터는 아주 완벽하게 주인공들의 아군을 연기하여 살아남겠다고.

‘……가만, 그런데 얘 몇 살이야? 이렇게 어린 역할은 맡아 본 적 없는데.’

첫 번째 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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