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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87화 (87/87)

87화

후작 저택의 화려한 홀에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소년 소녀들이 차례대로 들어섰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부인들의 참석률이 훨씬 높던 사교계였지만, 최근에는 아버지와 함께 참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리고 그 유행을 선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웨일그레슬 공작이었다.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아들을 공작이 직접 데리고 사교계에 나타난 것이 유행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는 사교적인 성격과 거리가 멀었기에 멀찍이서 아들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지켜만 보았지만, 귀부인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들에게도 아이와 함께 모임에 다녀올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수도에선 대유행을 타게 되었다. 이제는 아예 자상한 아버지가 되기 위한 필수 관문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유행의 중심에 선 웨일그레슬 공작 가문의 자제는 아버지 못지않은 유명인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눈부실 만큼 아름답기로 말이다.

새하얀 금발을 가진 소년은 또래보다 살짝 큰 키에 늘 반듯한 모습이었다. 무표정하게 서있으면 인형이 아닌가 싶을 만큼 하얗고 수려했다.

그런 외모를 가진 소년은 웃음이 많았다. 소리 없이 방긋 미소 지을 때면 ‘한번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공자님’이라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소년의 곁에는 언제나 어린 영애들이 다가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노아는 평소 어울려 다니는 영식들의 곁에 서서 영애들이 몰려있는 곳을 힐끗 보았다. 예전 같았다면 조금 질투가 났을 테지만 이제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만날 수 있을까.’

대신 오늘도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는 여인을 떠올렸다. 노아가 상사병 말기에 이른 얼굴로 멍하니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거 들었어? 이번에 황실 직속 기사단의 부단장 중 한 명으로 여자가 뽑혔대!”

옆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에 노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친구들을 돌아보자 그들은 흥미로운 주제를 놓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바빠 보였다.

“어디 기사단의 누군데?”

“누군지는 황녀 전하께서 아직 안 밝히셨대.”

“난 알아.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첩자라고 하던데?”

‘첩자’라는 단어에 노아는 큰 관심을 보였다. 자신을 구해준 여인의 이름과 나이는 몰라도 그녀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뭐야, 기사도 아닌데 기사단의 부단장이 됐다고? 첩자가 무슨 부단장이야.”

그때 맞은편에서 어이없다는 듯 픽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는 자신의 대각선에 서있는 토펜을 슬쩍 쏘아보았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첩자도 충분히 자격이 있을 수 있지.”

이제껏 말이 없던 노아가 끼어들어 제 말에만 태클을 걸자 토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노아,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네 생각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서 그렇지.”

그렇게 말한 토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선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이 정면에서 적과 용감하게 싸울 때 첩자는 고작해야 숨어있을 뿐이잖아. 근데 어떻게 기사만큼의 자격이 있을 수 있어?”

“숨어있을 뿐이라니? 너야말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아는 게 없어? 너는 뭐 얼마나 알고 있다고 나한테 시비야?”

노아와 토펜이 목소리를 키우며 싸우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영식들이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하, 평소에 책만 읽는 비리비리한 녀석 아니랄까 봐! 너 같은 녀석에겐 첩자 같은 겁쟁이들이 멋져 보일지도 모르겠네.”

“뭐라고? 말 다 했어?”

노아가 눈썹을 휙 치켜올리며 토펜을 쏘아본 순간이었다. 쉭, 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포크가 토펜의 귀 위쪽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포크는 기둥에 맞고 조용히 떨어졌다. 고작 포크였지만 토펜을 비롯한 다른 영식들은 싸늘한 침묵을 지켰다. 하마터면 한쪽 귀가 포크에 의해 꿰뚫릴 뻔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가 던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바빠 보일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교묘하게도 남들이 안 보는 틈을 노려 던진 것이 분명했다.

“처, 첩자… 짓이야.”

토펜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노아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홀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웨일그레슬 가문의 공자를 보고 뒤따라 나온 것이었다.

복도에는 백금발의 소년이 홀로 걷고 있었다. 노아는 힘껏 달려가 소년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포크 던진 거 공자님이죠?”

물론 노아는 소년이 포크를 던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포크가 날아온 뒤 스치듯이 소년과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곧 걸음을 멈춰 돌아본 백금발의 소년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숨길 의도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노아는 기쁜 듯 미소를 띠었다. 역시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까 토펜, 먼슬리 가문의 영식이 첩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걸 들은 거죠?”

“맞아요.”

순순히 대답한 소년이 이어서 투덜대듯 말을 이었다.

“정말 들어주기 힘들 만큼의 짜증 나는 소리만 늘어놓더라고요.”

“동감이에요. 그 녀석은 늘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입만 살았죠. 물론 포크가 날아오니 바로 닥쳤지만요.”

노아의 말에 마주 보고 서있던 두 소년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존대는 불편하니까 그냥 말 놓을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아르힌이야.”

“좋아. 나는 노아 테링턴. 나이는 열넷이야.”

“아, 나도 열넷인데. 친하게 지내자.”

노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악수를 나눈 뒤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노아는 눈앞의 소년, 아르힌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험 소설을 좋아한다는 것과 첩자가 기사보다 멋지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의젓하고 얌전한 공자님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르힌은 재미있는 성격의 소년이었다. 거기다 신체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물구나무서기나 기둥에 오르기를 거뜬히 해내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진짜 대단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친구가 된 기념으로 너한테도 알려줄게. 하다 보면 쉬워.”

아르힌이 씩 웃으며 얘기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정원에 나와서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아르힌은 노아가 마음에 들었다. 토펜인지 토판인지 모를 녀석이 어머니의 직업을 깎아내릴 때, 혼자서 그에 대해 반박해 주었을 때부터 아주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넌 어쩌다가 첩자가 좋아진 거야? 보통은 첩자가 뭐 하는지도 잘 모르던데…….”

“예전에 첩자인 사람한테 구해진 적이 있었거든.”

“구해졌다고?”

놀란 눈으로 아르힌은 노아를 돌아보았다.

“부끄럽지만… 혼자 나갔다가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거든. 아, 이건 가문에서 비밀로 부친 거라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면 안 돼.”

아르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얘기를 들으면서 떨떠름하게 침묵을 지켰다. 점점 들으면 들을수록 예전에 어머니께 들었던 납치 사건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날 어머니가 구출한 소년이 노아였다니…….’

운명이 존재한다고 믿곤 있었지만 정말 제게 찾아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노아와는 친구가 될 운명이었구나 하며 아르힌이 놀라있을 때였다.

“밖으로 나오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는데,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얼굴을 드러낸 거야. 정말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아르힌, 너는 첫눈에 반한다는 게 뭔지 알아……?”

“…응?”

“손이 내 뺨에 닿는 순간 온몸이 흠칫 굳는 느낌이었어. 그러고 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그 손길에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된 것만 같았어.”

이상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아르힌은 한쪽 눈을 슬며시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아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몽롱한 얼굴로 얘기할 뿐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어. 그날 바보같이 이름도 못 묻고 그렇게 보내버린 거야.”

“…혹시 네가 반했다는 사람이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노아가 놀란 눈으로 아르힌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눈도 검은색이네. 우연이다.”

“있잖아, 네가 반한 사람…….”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

그 애타는 물음에 아르힌은 깊은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인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노아가 과연 믿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뭐든 괜찮으니 말해줘! 아르힌!”

“…그냥 예쁘게 생기셨을 것 같다고.”

“하아… 난 또 뭐라고…….”

허탈해하는 노아는 진심으로 실망한 기색이었다. 물론 실망하는 것도 잠시, 노아는 아르힌의 얼굴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아르힌이 제 얘기를 듣고 혹시라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닌지 의심이 든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절대 관심 가지지 마. 나는 진심으로 나를 구해줬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은 너무 어려 보이지 않을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날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어. 뭐랄까, 그 사람과는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단 느낌이 들어.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 같은 게 불쑥불쑥 든다고.”

“…어, 응… 그래.”

그 단단히 사랑에 빠진 표정을 외면하듯 아르힌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와는 절대 마주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말이다.

-fin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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