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나무 위의 까마귀 둥지에서 꺼내왔어요.”
놀라는 것도 잠시, 리히르트는 작은 손에 생긴 생채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에 오르면서 긁힌 것 같았다.
“…고맙구나, 아힌.”
그는 소중한 반지를 찾아준 아이를 끌어안아 주었다. 뿌듯한 얼굴로 넓은 품에 안겨있던 아르힌은 뒤늦게 아버지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러곤 번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버지, 정말 기사단 단장님이셨어요?”
그 뜬금없는 물음에도 리히르트는 차분한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어머니와 만난 것도 기사단에서였단다.”
“정말요?!”
리히르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르힌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조잘거렸다.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아버지의 검술 실력은 무척이나 뛰어나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못 믿었는데 아까 아버지를 보고 믿을 수 있었어요!”
검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매우 멋있었다며 아르힌은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뒤늦게 조금 흥분이 가라앉자 아르힌은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왜 지금은 단장님을 안 하시는 거예요?”
“아힌, 아버지가 기사로서 살기를 바라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의 아버지도 너무 좋은걸요.”
그 진심 어린 순수한 대답에 리히르트는 아이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에서 손을 거둔 그는 약지에 낀 반지를 아이가 볼 수 있도록 손을 낮추었다. 동시에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어머니가 청혼을 하면서 준 선물이란다. 내겐 더없이 소중한 물건이지.”
“어머니가 먼저 청혼하신 거예요?”
리히르트는 입매를 부드럽게 휜 채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청혼받은 날 어머니와 배 속에 있는 너에게 약속했었단다.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가 되겠다고.”
작은 손을 잡고서 리히르트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내를 닮은 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너도 크면 이해하겠지만, 항상 모든 걸 다 쥘 수는 없는 거란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생긴다면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지.”
누군가는 후회할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리히르트는 그 말은 여전히 틀리다고 생각했다.
단장직을 포기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리히르트는 어김없이 검을 놓을 것이다. 대신 이 손에는 사랑하는 아이의 손을 잡으리라.
공작저까지 걷는 동안 리히르트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첫사랑이었고, 너도 언젠간 그런 운명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르힌은 작게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도 크면 그런 사랑이 하고 싶다고 말이다.
늘 어머니를 동경해 왔던 아르힌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동경하게 된 순간이었다.
13장 외전 소년의 첫사랑
올해로 열네 살인 노아 테링턴은 현재 인생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노아는 어제 낮까지만 해도 자신의 안락한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자유로운 모험을 해보고 싶단 생각을 하며 말이다.
소설 속에 너무 심취한 탓일까. 노아는 그날따라 유독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기만 했다. 앞으로 두 시간 뒤에 있을 지루한 수업을 피하기 위해 노아는 무작정 저택을 빠져나왔다. 정말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모험심은 사춘기 소년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가도록 부추겼다. 용돈이 든 주머니를 품속 깊숙이 숨긴 채 노아는 혼자 마차를 타고서 수도 외곽으로 나갔다.
노아는 생애 첫 일탈에 대한 짜릿함으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듯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사춘기 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노아는 스스로가 다 컸으며,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성인에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돈도 있으니 언제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노아는 그곳에서 길을 잃었다. 노을이 내려앉고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덜컥 겁이 난 노아는 무작정 마차를 찾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허름한 거리에서 불량한 무리들과 맞닥뜨렸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귀족 영식 같은 차림새의 노아를 붙잡았다.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나 잔머리는 조금도 발휘되지 않았다. 노아는 그들이 묻는 대로 어디 가문인지, 어디에 사는지에 대해 술술 불었다. 그리고 용돈도 뺏긴 채 어딘가로 납치되었다.
그들이 자신을 인질 삼아 가문에 거액을 요구할 거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몇 시간 안에는 풀려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납치된 지 하루가 넘도록 노아는 어둡고 허름한 공간에 갇혀있었다. 부모님이 돈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가지 결론만이 남는 것이다.
‘돈만 받고 날 이곳에서 죽이려는 걸 거야…….’
밀려오는 공포감에 노아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쯤 걱정하고 계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니 더욱 눈물이 났다.
눈이 다 따가워질 정도로 울고 있을 때였다.
천장 위에서 작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아는 흠칫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뿌옇게 어린 시야 속에 검은 인영이 우뚝 서있자 두려움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쉬잇. 괜찮아요.”
그 순간 눈앞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녀린 목소리였다. 노아는 두려움이 가신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잠깐만요. 지금 바로 풀어줄게요.”
입에 물려있던 재갈이 풀리고, 손목과 발목 또한 자유로워졌다. 노아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구해주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걸을 수 있어요?”
그 따스한 목소리에 노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하루 동안 묶여있던 탓에 바로 다리에서 쥐가 났지만 다행히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몰래 밖으로 빠져나갈 거예요. 무섭겠지만 저를 믿고 잘 따라와요. 알겠죠?”
“네…….”
노아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바로 “좋아요.” 하고 다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노아는 앞장서서 이곳을 나서는 여인을 따라갔다. 자신보다 조금 큰 키에 체격은 말라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등은 듬직해 보였다.
한편, 아나샤는 주변 기척을 세밀하게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적의 위치와 건물 구조를 꼼꼼히 파악해 둔 상태였다.
다행히 이곳에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아나샤는 미리 봐둔 비밀 통로에 소년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건물 밖과 이어지는 통로는 비좁았다. 노아는 통로 안을 기면서 먼지를 마시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거의 다 왔어요.”
그 말에 힘을 얻으며 열심히 앞으로 기어나가던 중이었다. 노아의 손바닥 아래로 작고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그 감각에 노아는 곧바로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뒤에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걱정 마요. 그냥 벌레예요.”
“읍!! 읍읍읍!!”
노아는 생애 처음 보는 커다란 벌레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노아가 파드득 손을 털어내자 아나샤는 대수롭지 않게 벌레를 잡아 뒤로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실신 직전의 소년을 부추겨 간신히 통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많이 놀랐는지 소년은 풀숲에 들어서자마자 주저앉아 작게 헐떡였다. 그간의 고생을 보여주듯 엉망인 소년의 모습에 아나샤는 마음이 좋지 못했다. 아르힌과 비슷한 또래로 보여서 더 그랬다.
“많이 무서웠죠?”
두건을 벗은 아나샤는 소년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그래도 씩씩하게 버텨줘서 고마워요.”
얼굴에 묻은 먼지를 손수 닦아주며 아나샤가 말했다. 그리고 미소 지은 채 소년의 연한 갈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노아는 언제 창백하게 질린 낯이었냐는 듯이 볼을 붉혔다.
“벌써 나오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조금 뒤 기사 하나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나샤는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사에게 소년을 부탁하고는 다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라졌다.
* * *
그날, 노아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무사히 돌아온 아들에게 테링턴 백작 부부는 꾸중 대신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노아는 예전과 달리 매일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었다.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식사도 거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안 하던 검술 연습까지 했다.
백작 부부는 아이가 무서운 일을 겪고서 자극을 받아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빨리 키 크고 싶다…….’
거울을 뚫어져라 보며 노아는 생각했다. 그동안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조금은 키가 큰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소년은 하루빨리 어엿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노아는 그날 이후 사랑에 빠져있었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녀에게 단단히 반해버린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내렸을 때 드러난 얼굴은 예뻤었다.
맑고 하얀 피부에 순하게 접히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다정한 미소를 그리는 분홍빛의 입술.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녀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었다. 만일 그녀의 나이가 스무 살이라고 가정했을 때, 자신과는 못해도 여섯 살 차이가 난다지만 노아는 제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부모님께 여쭤봤지만 그날 자신을 구한 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하셨다. 아직까진 이름조차 알 수 없었지만, 노아는 왠지 그녀를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노아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사교계에서 거물로 꼽히는 로널드 후작 부인이 초대한 모임으로, 이제 열세 살인 후작 영식에게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주기 위해 연 모임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또래의 영식들과 영애들이 주로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