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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85화 (85/87)

85화

‘뭐지……?’

아르힌은 그 틈 사이에 두 손을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힘껏 밀자 커다란 책장이 조금씩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갑자기 괴력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밀리도록 특별히 제작된 책장인 것이다!

책장 뒤로 숨겨져 있던 문 하나가 나타나자 아르힌의 심장이 크게 쿵쾅쿵쾅 뛰었다.

아르힌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쥐었다. 그리고 서재와 연결된 비밀의 방으로 들어섰다. 긴 통로와 같은 방 안은 환했다. 그래서 양쪽 벽을 따라 빽빽이 걸려있는 그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림 속에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었다. 긴 머리의 어머니, 단발머리의 어머니, 어색하게 웃는 어머니, 살짝 웃는 어머니, 환하게 웃는 어머니 등 표정과 의상, 장소만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확실한 건 경악할 정도로 많은 양이라는 것이었다.

“아힌.”

“……!”

그때였다. 옆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아르힌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자 평소와 같이 차분하고도 다정한 눈을 한 아버지가 보였다.

“알아버렸구나.”

아르힌의 앞에 선 리히르트가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검지를 세워 아르힌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어머니에게는 비밀이란다.”

“…비밀요?”

“어머니가 알면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단다. 어머니는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아르힌은 오히려 어머니가 질색할 거라 여겼지만, 아버지의 사뭇 절실해 보이는 눈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이 공간은 아버지의 보물들을 숨겨놓은 비밀 장소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저녁 식사로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뒤늦게 아르힌이 꺼낸 말에 리히르트는 함께 나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아르힌은 군말 없이 그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비밀 장소를 등진 채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아르힌이 아버지의 비밀 장소를 알게 된 후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서재의 비밀 공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아르힌의 머릿속에서 잊혔다.

그동안 팔이 완전히 나은 아나샤는 다시 임무에 나가게 되었다. 아르힌도 수업에 적응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아르힌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역사 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역사 선생님인 데이쳇 부인은 수업에 관련된 내용 말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는 선생님이었다.

이제껏 그녀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접한 아르힌이었지만 오늘만큼 이야기를 듣고서 깜짝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뛰어난 기사셨다고요?”

“그렇답니다. 대대로 웨일그레슬 공작 가문은 북방을 수호해 온 뛰어난 무가로 알려져 있지요.”

이건 아르힌도 아는 사실이었다. 매년 영지로 내려갈 때마다 공작성의 기사 삼촌들에게서 검술을 배웠었으니까. 자신의 가문이 기사들을 양성하는 가문이라는 것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이다.

“공작님께선 10년 전쯤에 황실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기도 하셨답니다. 부임 기간이 짧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요.”

“아버지가요……?”

“네. 젊은 나이에도 검술 실력이 뛰어나시기로 유명한 분이셨지요.”

아르힌은 믿을 수 없었다. 왜냐면 한 번도 아버지가 검을 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흐트러짐 없는 정복 차림으로 서류를 처리하는 아버지를 본 적은 있어도,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섬세하시고 자상하신 아버지가 전투에 나가 적을 베는 모습은 절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너무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아르힌의 귀에 선생님의 다른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버지께 달려가 사실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은 가득 찼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창문 밖을 조용히 내다볼 때였다. 아르힌의 시야에 나무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우연히 들어왔다.

아르힌은 예전에 어머니가 얘기해 주었던 까마귀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걸 물어가는 습성이 있어서 둥지에 반짝이는 것들을 잔뜩 모아두곤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오래전 아버지의 잃어버린 브로치를 까마귀의 둥지에서 찾아주셨다고 말이다.

아르힌의 눈길은 계속해서 까마귀를 좇았다. 나뭇가지에 앉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던 까마귀가 두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완전히 떠났나 싶을 때 까마귀가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왔다. 까마귀의 검은 부리에는 맑은 파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엇……?”

작게 반짝이는 푸른 보석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여겨지자 아르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님?”

데이쳇 부인의 부름에도 아랑곳 않고 아르힌은 창문에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까마귀가 물고 있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이 반지라는 것은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시에 아버지가 매일 끼고 다니는 반지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도 말이다. 아니, 아버지의 반지가 확실해 보였다!

“공자님! 갑자기 수업 중에 일어나셔서 어딜 보시는.”

“죄송해요! 잠깐 다녀올게요!”

“네? 갑자기 어딜…….”

아르힌이 창문을 열어젖히자 까마귀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까마귀를 쫓기 위해 아르힌은 곧바로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뒤늦게 이곳이 2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데이쳇 부인은 비명을 내질렀다.

* * *

그 시각, 리히르트는 집무실 안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반지가 사라졌다. 자리를 비운 지 고작 십 분 만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혹여 바람에 굴러떨어졌을까 봐 책상 밑부터 시작해서 서류 사이사이까지 뒤져보았으나, 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리히르트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져 갔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결혼반지였다. 십 년간 매일같이 끼고 다니던 반지를 이렇게 쉽게 잃어버렸으니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노크 소리에 리히르트는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그가 대답하자 곧 시종 하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공자님께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사라졌다고……?”

“수업 도중에 창밖으로 뛰어내리셨다고 합니다. 부인께서 아래를 확인했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으셨다고…….”

시종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리히르트는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저택 밖으로 나가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는 가장 먼저 대문으로 향했다.

“공작 각하!”

대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그를 알아보곤 서둘러 달려왔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공자님께서 밖으로 뛰쳐나가시기에 저와 같이 근무를 서던 한 명이 급하게 쫓아 나갔습니다.”

“어디 쪽으로 갔지?”

“백작 가문의 저택이 있는 쪽으로 가셨습니다.”

“알겠다. 검을 빌리지.”

경비병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리히르트는 그가 말한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숲 쪽으로 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르힌이 혼자 나갔다곤 했지만 누군가 아이를 밖으로 유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그는 달리면서 아이의 이름을 외쳤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백작 가문의 저택을 둘러싼 거대한 담벼락이 보였다. 리히르트가 저택 주변을 돌자 멀리서 경비병이 달려왔다. 아르힌을 뒤쫓아 따라 나온 공작 가문의 경비병이었다.

“죄송합니다. 분명 이쪽으로 오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둘로 나눠서 찾아보도록 하지. 나는 이쪽을 맡을 테니, 경은 저쪽을 맡도록.”

“알겠습니다!”

리히르트는 저택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던 중 담벼락 아래에 난 개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르힌의 체구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보였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백작 가문의 대문으로 향했다.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은 갑작스레 방문해 온 공작의 모습에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이곳으로 몰래 들어온 것 같아 잠시 둘러볼까 한다만.”

“죄송합니다……! 백작님의 허가 없이는 함부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병이 저택 안으로 달려가는 동안 리히르트는 닫힌 대문을 답답한 눈길로 응시했다.

마음이 초조할 대로 초조해진 그는 결국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문을 타 넘었다. 높은 대문 끝에 달린 창살에 팔 부분과 바지 옆단이 찢어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힌! 여기 있니, 아힌!”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리히르트는 빠르게 저택 뒤편으로 들어섰다. 촘촘한 울타리가 세워진 넓은 후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버지……!”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아르힌의 외침이 들려왔다. 리히르트는 곧바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후원의 후미진 구석에 도착하자 어느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아르힌이 보였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선 여섯 마리의 맹견들이 사납게 짖고 있었다.

맹견들은 리히르트를 발견하고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여섯 마리가 일제히 경계하듯 그의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한 마리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버지!”

아르힌이 놀라서 외쳤다. 아버지가 물릴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빠르게 뽑힌 검이 달려든 맹견을 베어내었다. 그는 이어서 달려드는 개들을 힘을 들이지 않고 가뿐히 베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머지 개들은 꼬리를 내리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리히르트는 검을 한번 휘둘러 피를 털어내었다. 그리고 나무 아래로 다가가 많이 놀라 보이는 아르힌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아르힌은 곧바로 뛰어내려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리히르트는 아르힌이 개들의 사체를 보지 못하게 아이를 안은 채로 후원을 벗어났다.

후원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는 아르힌을 땅에 내려주고서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꽉 쥐어진 주먹에 닿을 때였다. 아르힌이 주먹을 활짝 펼쳐 보였다. 작은 손바닥 안에는 반지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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