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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84화 (84/87)

84화

이어지는 말을 아르힌은 얌전히 듣는 척하면서 한 귀로 모두 흘려보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후원에 가서 포크 던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공자님!”

“넷?!”

“또 딴생각하셨죠?”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뜬 모습이 누가 봐도 딴짓을 하다가 걸린 얼굴이었다. 슐리아 부인은 옅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훗날 가주님이 되기 위해선 무조건 예법을 완벽히 몸에 익히셔야만 해요.”

“그럼 별로 되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아르힌이 커서 되고 싶은 것은 어머니처럼 멋진 첩자였다. 가주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되기 싫다고 해서 가주님이 안 될 순 없답니다.”

“다른 사람이 가주님이 되면 되잖아요.”

“가주님은 후계자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공자님의 동생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동생요?”

아르힌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거렸다.

아르힌은 잠시 동생이 생기는 상상을 해보았다.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작은 아기를 떠올리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너무 귀여워서 매일매일 꼭 안아주고 싶을 것 같았다.

‘동생이 생기면 엄청 귀여울 거야!’

거기다 동생이 후계자가 되면 자신은 예법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여긴 아르힌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아힌?”

갑자기 집무실에 들이닥친 아르힌의 모습에 리히르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니?”

“저 동생 가질래요!”

그 외침에 리히르트의 한쪽 눈썹 끝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당황스러운 기분을 수습하고선 그 자리에 몸을 낮춰 아르힌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갑자기 동생을 원하는 이유라도 있니?”

“저는 첩자가 될 거예요. 그러면 가주님을 할 사람이 필요해지니까 동생에게 맡기려고요.”

“…….”

“제발요! 제가 매일 옆에서 돌봐줄게요. 매일 안고 다닐 수도 있어요!”

두 주먹을 꼭 쥐고서 아르힌이 외쳤다. 리히르트는 잠시 난감한 듯 침묵을 지키다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동생이 생긴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어머니가 많이 힘들게 된단다.”

“…어머니가요?”

“동생이 태어나기 위해선 어머니가 아기를 열 달 동안 품고 있어야 돼. 그 기간 동안 어머니의 몸은 많이 약해져서 다른 일은 할 수 없단다.”

아이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리히르트는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말을 고를 때였다.

“그럼 동생 없어도 괜찮아요.”

아르힌이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이렇게 빨리 고집을 접을 줄은 몰랐기에 리히르트는 조금 예상외라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힘든 건 싫어요.”

이에 아르힌은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을 내놓았다. 리히르트는 한 손을 들어 아르힌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벌써 어머니를 위할 줄도 알고 기특하구나. 아힌.”

그는 잠시 아들과 눈을 맞춘 채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뒤늦게 아르힌이 동생을 원하던 이유를 상기하고서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주가 되기 싫은 거니?”

“…예법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되잖아요. 수업은 어려워서 싫어요.”

“수업을 듣게 한 건 네가 좀 더 많은 걸 배우고 현명한 사람이 되길 바라서였단다. 너에게 부담을 줬다면 미안하구나.”

“…….”

“가주가 되기 싫다면 되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어른이 되어서도 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때 가서 함께 생각해 보자고 리히르트는 다정히 얘기해 주었다. 그로서는 아르힌에게 후계자로서의 정해진 길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 또한 같은 어린 시절을 겪어봤었기에 아르힌의 부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아홉 살 때 듣던 수업이 열두 개였던 것에 비해, 아르힌이 듣는 수업은 고작해야 네 개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도 네가 첩자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단다.”

“정말요?”

“그럼. 열두 살이 되는 해에는 어머니한테 기술을 배우는 것도 허락해 주마. 대신 그때까지 수업을 잘 듣는다면 말이야.”

“잘 들을게요!”

바로 좋다고 아르힌이 외치자 리히르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다른 수업은 어떤지 얘기해 주겠니?”

“좋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은 산술 수업이에요. 오늘도 선생님께서 문제를 빨리 푼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는 신이 나서 떠드는 아르힌을 안아 들고 집무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부자간의 도란도란한 대화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 * *

야심한 시각, 리히르트는 방의 창가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내의 귀가가 늦었다.

오늘 임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늦을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어지고 있었다. 저택 대문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던 그의 눈길이 시계로 향했다.

벌써 시간은 열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초조하게 시계를 응시하며 리히르트가 기사단에 연락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

아르힌이 베개를 끌어안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르힌은 방을 둘러보았다.

“어머니는요? 아직도 안 오셨어요?”

“어머니가 조금 늦는구나. 먼저 침실에 들어가서 자고 있으렴.”

“저도 같이 기다릴래요, 네?”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는 아이의 부탁을 리히르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 주자 아르힌은 곧바로 창가로 달려가 창틀에 매달렸다.

발꿈치를 세운 채 어두운 저택 아래의 풍경을 뚫어져라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대문이 열리며 마차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다!”

익숙한 마차에 아르힌이 폴짝 뛰었다. 금방이라도 먼저 뛰어나가려는 아르힌의 손을 붙잡고서 리히르트는 함께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 막 로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는 아나샤를 발견하기 무섭게 두 부자의 얼굴 위에 충격이 번졌다.

“아샤……!”

“어머니!”

하얀 붕대를 오른쪽 어깨와 팔에 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아르힌은 곧장 울음을 터뜨리며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나샤는 자신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우는 아르힌의 머리를 왼손으로 어루만졌다.

“…울지 마, 아힌. 엄마 심하게 다친 거 아니야. 응?”

아나샤는 도와달라는 의미로 곁에 다가온 리히르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걱정스럽게 자신을 살피기에 바빠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낮은 목소리는 은연중에 떨리기까지 했다.

“둘 다 진정해요. 그렇게 심한 상처 아니에요. 그냥 실수로 팔뼈가 살짝 부러진 것뿐이라구요.”

붕대 때문에 과장되어 보이는 것뿐 실제론 가벼운 부상이라고 아나샤는 여러 차례 설명해야만 했다.

가문에 연락을 할까 하다가 혹시라도 치료를 받고 온다는 소식에 난리가 날까 봐 일부러 조용히 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하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아나샤는 생각했다.

“흐읍… 히끅, 어머니…….”

“한 달간은 누워서 푹 쉬는 게 좋겠습니다. 아샤.”

얼굴이 눈물범벅인 아들과 과한 걱정으로 굳은 얼굴의 남편을 바라보며 아나샤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르힌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여전히 오른팔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에 아르힌은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어제처럼 울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옆에서 식사하는 것을 도와주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씩씩하게 말했다.

“저도 도울래요!”

“아침부터 엄마 간호해 주러 온 거야? 세상에!”

먼저 대답한 사람은 아나샤였다. 아나샤는 왼팔로 아이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쪽 하고 굿모닝 키스를 해주었다.

“더 안 자도 되겠어? 어제 늦게 잤잖아. 응?”

“괜찮아요. 별로 안 졸린걸요.”

의젓하게 구는 아이가 귀여워서 아나샤는 다시 한번 아이의 이마에 뽀뽀해 주었다. 리히르트는 그 모습을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뒤늦게 운을 뗐다.

“아힌, 밖에서 물병 좀 가져다주겠니?”

“네!”

아르힌은 잽싸게 침실을 달려 나갔다. 그리고 물병을 들고 돌아와 어머니의 곁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아버지, 오늘 하루만 수업 안 들으면 안 돼요?”

식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침실에서 나가지 않던 아르힌이 말했다. 오늘은 어머니의 곁에서 어머니를 돕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를 리히르트는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어머니를 부탁하마.”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리히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선 함께 있고 싶었으나 급히 처리해야 될 업무가 있었다.

아버지가 나간 뒤, 아르힌은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을이 질 때가 되자 쨍쨍히 내리쬐던 햇볕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나샤는 아르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한테 가서 오늘 저녁엔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고 올래?”

“네! 빨리 갔다 올게요.”

마침 움직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던 아르힌은 재빠르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의 첩자 못지않은 날랜 몸놀림이었다.

방을 나온 아르힌은 곧장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

그러나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신 건지 책상 위에는 서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잠시 아버지가 어디로 가셨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던 아르힌은 발걸음을 옮겨 서재로 향했다.

하지만 서재에도 아버지는 안 계셨다. 다시 나가려던 그때 아르힌의 귀에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르힌은 조심스레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커다란 책장 앞에 서서 눈을 크게 떴다. 소리는 책장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인기척이라는 건 분명 틀림없었다. 숨을 죽인 채 책장을 살피던 아르힌은 문득 책장과 책장 틈 사이가 조금 벌어져 있는 걸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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