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럼 슬슬 낙법을 가르쳐 줘야겠네?”
“낙법요?”
“응. 실수로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안전하게 떨어지는 법을 몸에 익혀두는 거야.”
언제 콧잔등을 구겼냐는 양 아르힌이 활짝 얼굴을 폈다. 기뻐하는 아르힌의 모습에 아나샤도 덩달아 흐뭇해졌다.
“대신, 낙법 익혀도 아주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건 안 돼. 천장이나 지붕 위는 엄마가 곁에 있을 때만 같이 올라가는 거야. 알았지?”
“응! 약속할게요!”
“그래, 착하네. 우리 아힌!”
아르힌은 어머니의 굿나잇 키스를 받고서 빠르게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아르힌은 꿈을 꾸었다. 지붕과 나무 위를 날아다니다가 멋지게 땅 위에 착지하는, 그런 멋진 꿈이었다.
* * *
아르힌은 여덟 살이 되었다. 생일 선물로 다양한 장난감들을 받았지만 어머니가 낙법을 알려주었을 때만큼 기쁘진 않았다.
여덟 살이 되면서 생애 처음으로 꿈도 생겼다. 어머니처럼 멋진 첩자가 되는 것이었다. 후원에 가는 걸 허락받은 뒤로 아르힌은 매일 후원에 가서 어머니가 알려준 것들을 연습했다.
아르힌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좋았다. 아버지에겐 미안하지만 그랬다. 어머니는 나무를 더 빨리 오르는 법이나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키는 법 등을 알려주었다.
함께 컴컴한 천장 위를 모험하는 것은 아르힌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어머니와 놀 때면 늘 하루가 너무 빨리 가버려서 아쉬울 정도였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늘 책만 읽어주었다. 항상 방 안에서 책만 다섯 시간씩 읽어주니 아르힌이 어머니의 휴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오늘도 아르힌은 아버지와 함께 책을 읽는 중이었다.
“…피온은 말했습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그러자 초록 옷의.”
“불공평해가 뭐예요?”
또랑또랑 묻는 목소리에 리히르트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불공평하다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뜻이란다. 똑같이 나눠야 하는데 한쪽만 너무 많이 가졌을 때 쓸 수 있는 말이지.”
아르힌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리히르트는 아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예시를 생각해 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머니가 아버지하고만 매일 놀아서 아힌과 놀아주지 않을 때 불공평하다고 얘기할 수 있단다.”
“맞아요! 불공평해요!”
바로 벌떡 일어나 외치는 아르힌은 완전히 이입한 얼굴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리히르트는 아이를 끌어안아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다시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는 잔잔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어주던 리히르트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아나샤의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 위를 짧게 입술로 누르고서 책을 덮었다. 아이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워준 뒤 자신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같이 마중 나가도록 할까?”
“네!”
빨리 나가자며 아르힌이 침대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이의 손을 잡고서 리히르트는 방을 나섰다.
* * *
“좋은 꿈 꾸렴. 아가.”
“…안녕히 주무세요.”
졸린지 두 눈을 비비며 아르힌이 웅얼거렸다. 아이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준 리히르트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그는 긴 복도를 지나 저택 동편에 위치한 침실로 들어섰다.
“리히.”
그가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앉아있던 아나샤가 그를 반겨주었다. 이제 막 목욕을 끝내 노곤한 얼굴이었다.
“재우고 오느라 수고했어요.”
약간 졸음이 섞인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녀를 제 아래에 눕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샤.”
낮아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리히르트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다정한 키스는 뺨을 지나 턱 아래까지 이어졌다.
“흣, 간지러워요.”
고개를 튼 아나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리히르트는 집요했다. 멈추지 않고 그녀를 눕힌 채로 계속해서 가느다란 목을 따라 키스하기 시작했다.
촉촉한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향긋한 향이 풍겼다. 은은하기만 한 향이었지만 그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올라와 슬립의 어깨끈을 끌어 내렸다. 드러난 쇄골 위로 뜨거운 혀가 닿자 아나샤는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힉, 잠깐만요…….”
아나샤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이에 리히르트는 순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럽니까, 아샤.”
“리히… 꼭 안달 난 사람 같아요. 못 따라가겠다구요.”
“그대 말대로, 충분히 안달 나있습니다.”
리히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이는 일찍 잠들었고, 내일은 아내의 휴일이었다. 오랜만에 단둘이 기나긴 밤을 보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쳐왔다. 입술을 빨아들이며 그가 더 깊이 입을 겹쳐오자 아나샤는 조금 버거운 듯 소리를 냈다.
“…응.”
아나샤가 고개를 틀자 맞물려 있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작은 입술 새로 따뜻한 숨결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새를 못 참고 다시 그의 입술이 따라 붙어왔다.
방 안 가득 울리는 쪽쪽대는 소리에 아나샤의 몸도 차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었다.
한참 뒷머리에 머물러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단단한 근육이 느껴지는 복부를 쓸어내리다가 아나샤는 천천히 그의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 내렸을 때였다. 문밖에서 들려온 작은 인기척에 아나샤는 화들짝 그를 밀쳐내었다.
조금 뒤,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젖은 입술을 빠르게 손등으로 닦아 수습한 아나샤는 몸을 일으켰다. 문 쪽을 바라보자 커다란 베개를 안아 든 채 문가에 서있는 아르힌이 보였다.
“아힌? 왜 그래?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불공평해요.”
“응?”
“…아버지만 어머니랑 매일매일 같이 자구… 불공평해요!”
그렇게 외친 아르힌은 어딘지 모르게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그 아기 같은 투정에 아나샤는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그럼 같이 잘까?”
아나샤가 두 팔을 벌리자 아르힌은 곧바로 어머니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누워 배시시 웃었다.
두 모자가 서로 다정히 끌어안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그 옆에서 리히르트는 홀로 앉아있었다. 소박맞은 사람처럼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뒤늦게 몸을 눕혔다.
어느 때보다도 기나긴 밤이었다.
* * *
그 뒤로 아르힌은 밤마다 베개를 들고 불쑥불쑥 부모님의 침실을 찾아왔다.
오늘도 공작 부부의 침실에는 세 명이 함께 잠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깨어난 리히르트는 조용히 아나샤를 깨웠다.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상체를 일으킨 아나샤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아르힌을 보고는 웃음을 삼켰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힌이 깨지 않게 하얀 이마 위에 살며시 뽀뽀해 준 뒤 아나샤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아나샤는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배웅해 주는 남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었다. 긴 배웅의 키스가 끝나자 리히르트가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입을 열었다.
“몇 시부터 임무에 나갑니까?”
“네 시부터 나가요. 밤새 잠복해야 해서 아마 내일 저녁쯤 들어올 거예요.”
“내일 저녁에 기사단으로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녀의 만류에도 리히르트는 그저 잠잠히 미소만 지었다. 보나 마나 기사단 앞에 마차를 대기해 놓고 기다릴 것이 뻔해 아나샤는 어쩔 수 없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중에 무리하면 안 됩니다.”
“물론이죠.”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아나샤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입술 위에 리히르트는 또 한 번 입술을 맞추었고 말이다.
“앗!”
그때였다. 문을 열고 나오던 아르힌이 다정하게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소리를 냈다.
곧바로 아르힌은 양 볼을 부풀리고서 달려왔다. 그리고 아나샤와 리히르트 사이에 끼어들며 폴짝폴짝 뛰었다.
“불공평해요! 나도 뽀뽀해 주세요. 나도요!”
자기만 빼고 뽀뽀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퍽 진지했다. 아나샤와 리히르트는 서로를 보며 웃다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각각 한쪽 뺨에다 쪽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엄마 다녀올게!”
“응! 다녀오세요!”
사랑스러운 두 부자의 배웅을 받으며 아나샤는 문을 나섰다. 최고로 행복한 아침이었다.
* * *
아홉 살이 되자 아르힌은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또래 귀족 아이들이 듣는 수업으로, 예법과 역사, 문학, 산술 정도의 기초적인 수업이었다.
역사와 문학은 아버지랑 독서를 하며 쌓은 기본 지식들이 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산술도 하다 보니 재밌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배우는 예법은 아르힌에겐 유독 어렵기만 했다. 이제껏 자유분방하게 행동해 왔던 탓에 사소한 예법들을 외우고 지키는 것은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어려워요!”
“그렇게 자꾸 떼를 쓰시는 버릇은 안 좋다고 말씀드렸죠?”
예법 선생님인 슐리아 부인의 엄격한 잔소리가 이어지자 아르힌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계속해도 어렵단 말이에요.”
“열심히 안 하시니까 그렇죠. 어제 연습해 오시라고 했는데 하나도 안 해오셨잖아요.”
“그치만… 제가 왜 이런 걸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계속 툴툴거리는 아르힌의 태도에도 슐리아 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귀품 있는 목소리로 이 수업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차 이 가문을 이끄실 훌륭하신 분이 되기 위해서죠.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 중에서도 예법은 그 기초나 마찬가지랍니다. 몸에 밴 예법부터가 엉망인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