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82화 (82/87)

82화

“아샤.”

“왜 그래요?”

“끌어안고 자고 싶습니다.”

“…….”

“그대가 옆에 있으면 더 잠이 잘 올 것 같습니다.”

“드레스 때문에 불편해서 같이 못 누워요.”

“제가 벗겨주겠습니다.”

어느새 다시 눈을 뜬 리히르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쯤 되니 아나샤는 그가 정말 아픈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의 기색을 빠르게 읽어 내린 리히르트가 슬며시 입술을 떼었다.

“미안합니다, 아샤. 몸이 안 좋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어리게 군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입술 새로 조금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쩐지 처연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나샤는 바로 마음이 흔들렸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이런 어리광을 부린 적이 없던 그였다. 얼마나 아프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까 싶으니 방금 전 그를 의심한 것이 미안해졌다.

“얌전히 누워있어요! 빨리 옷 갈아입고 올게요.”

리히르트는 그녀 말대로 얌전히 누워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를 속이는 것은 미안했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양심을 외면하기로 했다.

12장 웨일그레슬 가문의 공자님

리히르트는 넓은 저택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략 1년 전부터 그는 아내가 쉬는 날이면 이렇게 저택을 돌아다녔다. 점심때부터 저녁때까지 어김없이 사라져 버리는 아내와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집무실이 있는 4층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1층의 서측 구석 복도에 당도해 있었다. 햇볕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복도 안을 둘러보던 그는 천장의 한 곳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위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린다 싶을 때였다.

천장 한 곳에서 동그란 머리가 쏙 내려왔다. 쏟아져 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단발 길이로 짧았다.

“여보!”

얼굴만 거꾸로 내놓은 아나샤가 반가운 미소를 띤 채 리히르트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조금 뒤 그녀의 머리 옆으로 작은 머리 하나가 쏙 내려왔다.

“아버지!”

아래로 붕 뜬 짧은 머리칼은 그를 닮은 백금발이었다. 방긋 웃는 뽀얀 얼굴은 일곱 살 아이답게 천진했다.

나란히 얼굴만 내밀고 있는 두 모자의 모습에 리히르트는 짙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이제 내려오렴.”

“벌써요? 어머니랑 더 놀고 싶은데…….”

“어머니는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니? 대신 오늘은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마.”

“정말요?”

나직하게 어르는 목소리에 아르힌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내려갈까? 준비됐어?”

“응!”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르힌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서 천천히 구멍 밖으로 몸을 내밀기 시작했다.

“최대한 바닥에 가까워졌을 때 뛰어내려야 하는 거야. 그래야 충격이 덜하거든.”

아르힌은 허공에 매달렸다. 어린 소년의 눈에는 여전히 까마득한 높이처럼 보였다.

“리히, 놓을게요.”

아나샤의 말에 리히르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곧 손을 놓고 떨어지는 아르힌을 그는 가뿐히 품에 받아내었다.

뒤따라 아나샤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 모습에 아르힌은 우와 하고 입을 벌렸다.

‘나도 빨리 혼자서 착지하고 싶다!’

과할 만큼 반짝이는 아이의 눈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작 부부는 대화를 나누며 다정하게 걸어갔다.

* * *

“공자님!”

루시는 오늘도 저택의 후원에 나와있었다.

아나샤가 출근하고, 리히르트도 업무 때문에 잠시 바쁜 동안에는 루시가 아르힌을 돌보았다. 물론 현재에 이르러선 돌본다는 말보다는 찾으러 다닌다는 말이 더 어울렸지만.

“또 어딜 가신 건지……. 공자님! 어머니께서 찾으세요!”

그때였다. 루시의 머리 위에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에 반짝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아르힌은 빙글 돌아 사뿐히 바닥에 내려왔다.

“어머니 오셨어?!”

“아뇨. 이제야 붙잡았네요.”

루시는 나무에서 내려온 작은 소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붙잡았다.

“어서 방으로 가셔서 목욕하고 옷 갈아입으세요. 정말, 옷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엉망인지.”

“싫으어! 날 속였어!”

성인 여성의 손을 뿌리치기엔 아직 한참 힘이 모자란 나이였다. 루시는 익숙하게 아르힌을 끌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루시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샤의 과거 얘기를 해주지 않는 거였다고 조금 후회했다.

아르힌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당시, 루시는 아르힌에게 아나샤가 과거에 얼마나 대단한 영웅이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었었다. 자신을 목숨 걸고 지켜주었으며 범죄의 소굴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었다고 말이다.

다른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을 때 어머니의 실감 나는 영웅담을 듣고 자라서였을까. 아르힌은 어머니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심지어 잘 따르다 못해 이제는 어머니를 따라 천장과 지붕 위를 쏘다니는 재미에 맛이 들려있었다. 한번은 혼자서 높은 천장 위에 올라가 있어서 공작 가문이 한바탕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그 뒤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기로 부모님과 약속해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후원에 가는 일이 많아졌다.

아르힌이 후원에서 몰래 나무에 오른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 달 전쯤이었다. 루시는 곧바로 이 사실을 공작 부부에게 얘기하려 했으나, 아르힌이 제발 비밀로 해달라며 애원하는 바람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내놓은 타협안이 하루에 딱 삼십 분만 후원에서 놀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힌은 한번 사라지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결국 루시가 아르힌을 찾으러 가면 붙잡히지 않으려고 나무 위에 꽁꽁 숨어있기 일쑤였다.

“자꾸 그렇게 말을 안 들으시니 아무래도 오늘은 말씀드려야겠어요.”

“루시 치사해!”

“그러니 제가 찾으러 다니기 전에 일찍 들어오셨어야죠. 먼저 약속을 어긴 사람이 누구죠?”

그 물음에 아르힌은 합죽이가 되었다. 방금 막 씻고 나와 머리카락이 푹 젖어서 그런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루시는 아르힌의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주었다. 말로는 루시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한참을 얌전히 서있던 아르힌이 입술을 뗐다.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이르면 루시 미워할 거야. 평생 말도 안 할 거야…….”

“어머, 그것참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이제 곧 여덟 살인데 조금은 어엿해지실 필요가 있겠어요.”

“…어머니는 내가 아기처럼 굴어도 좋다고 했어.”

볼을 부풀린 채 투덜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아무튼 오늘 말씀드릴 거예요.”

“루시! 미안해. 잘못했어!”

금방이라도 엉엉 울 것처럼 아르힌이 루시의 허리에 매달렸다. 하지만 루시는 단호하게 마음을 굳힌 후였다.

어여쁜 얼굴에 마음이 약해져 그동안은 비밀로 해주었지만 이제는 루시도 슬슬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아르힌이 나무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것이다.

그날 밤, 루시에게서 얘기를 들은 아나샤는 아이의 방을 찾아갔다.

“아힌? 자?”

“……!”

루시가 말했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느라 잠도 못 자고 있던 아르힌은 방문이 열리자 바로 놀라 굳어버렸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평소라면 벌떡 일어나 어머니에게 달려가 안겼을 아르힌은 지레 찔려 눈만 꼭 감았다. 그러나 아이의 긴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나샤는 자는 척하는 아이가 귀여워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곤 침대 맡에 앉아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 다정한 굿나잇 키스에 아르힌이 방심한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왼뺨을 간질이자 아르힌은 간지러움에 키득거리며 고개를 틀었다.

“헙.”

뒤늦게 입을 옹다물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아르힌은 살며시 눈을 떴다. 동시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풉,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할까?”

“…….”

“엄마가 한번 맞혀볼까?”

장난기가 그득한 얼굴로 아나샤는 아이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힌. 나무에 올라갔지?”

“……!”

“왜 엄마 아빠 몰래 나무에 오른 거야? 응?”

아나샤는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이에 눈만 또르르 굴리던 아르힌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나도… 어머니처럼 되고 싶어요.”

“응? 나처럼?”

‘그냥 재밌어 보여서요.’ 같은 단순한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아나샤는 의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랑 똑같이 하구 싶은데… 근데 높이 올라가면 혼나니까…….”

아르힌은 시무룩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종알종알 말을 이어갔다.

“나도… 멋지게 착지하고 싶은데…….”

“엄마가 멋져?”

그 생뚱맞은 물음에 아르힌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뺨에서 쪽쪽쪽 하고 연신 뽀뽀 세례가 쏟아졌다. 추욱 처졌던 눈꼬리가 펴지며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흠흠, 내가 멋져 보인다니. 이따가 리히한테 자랑해야겠다.”

아르힌은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처음으로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한참을 흥얼거리던 아나샤가 손을 움직였다.

아르힌은 눈을 감은 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렸다.

“엄마도 어렸을 적에 혼자 높은 곳에 올라가고 그랬다?”

“정말요……?”

“그럼! 삼촌들 놀러오면 물어봐도 좋아.”

다시 눈을 뜬 아르힌은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아기가 이렇게 얘기해 주니까 정말 기분 좋다. 이제야 리온이 왜 울었는지 알 것 같아.”

“리온? 아힌의 할아버지?”

“응. 사실 엄마도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었거든.”

조용히 웃으며 아나샤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높은 곳이 좋아?”

“응!”

“그치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법을 아는 게 가장 중요해.”

“저 나무에서 혼자서도 잘 내려와요. 루시도 깜짝 놀라는걸요!”

“정말? 엄청 대단한데?”

당당히 얘기하는 아르힌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어려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아나샤는 하얀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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