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곳에서요? 제가 그 얘길 루시한테도 했었다구요?”
“그 말은 저 말고도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 적이 있다는 거네요?”
“네… 결혼하기 전에 리히한테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겠다, 뭐 그런 얘길 했었죠……?”
“세상에나! 정말 그 말을 한 거예요? 보나 마나 상처받으셨겠네요.”
“그땐 제가 리히를 너무 몰랐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 얘기가 어떻게 하다가 나온 거예요?”
“음, 여기서 아샤가 저에게 공작님과 사귄다고 얘기해 줬었어요. 물론 전 이미 눈치챘었지만요.”
살포시 웃은 루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아나샤를 대신해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제가 먼저 결혼 생각은 없냐고 물었었는데, 아샤가 훗날 결혼을 하게 된다면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었어요.”
“아, 이제 조금 기억났어요. 그때 루시가 저한테 공작 부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얘기해 줘서 뭔가 고마웠었는데.”
“지금 얘기하는 거지만, 아샤 입에서 두 번째 부인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땐 왠지 아샤가 무조건 공작 부인이 될 것 같았거든요. 물론 제 감이 맞았지만요.”
그때 당시, 그런 확신이 강하게 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던 걸지도 모른다. 공작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하나뿐인 연인인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도 여전했다. 물론 지금은 하나가 아닌 둘로 늘어났다지만.
아내와 아들이 인생의 전부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 같다지만, 루시가 보기엔 현재의 공작님은 무척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님께서 기다리실 테니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요?”
과거 얘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아나샤는 전속 시녀들에게 선물할 케이크를 몇 상자 포장하고서 루시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줄 선물도 사 들고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리히, 저 왔어요. 아힌.”
정답게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아나샤는 침실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왔다. 살랑거리는 하얀 캐노피 너머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길고 새하얀 속눈썹은 조용히 내리감긴 채였다. 그의 품에는 아르힌이 안겨있었다. 아빠의 품이 편한지 머리를 대고서 새근새근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그의 긴 다리 위에는 동화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마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같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부자 아니랄까 봐 똑 닮은 외형에, 똑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으니 사랑스러움이 두 배가 된 느낌이었다.
아나샤는 웃음을 참은 채 한동안 그 예쁜 풍경을 감상했다.
* * *
황제의 탄신일이 다가오자 각 가문으로 황실 무도회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그동안 공작령에 있느라 참석하지 못했던 웨일그레슬 공작 부부도 올해엔 초대장을 받았다.
부부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식적인 행사였다. 이제껏 베일에 싸여있던 공작 부인을 향해 수많은 시선들이 쏠릴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에 공작 부인의 전속 시녀들은 어떻게 치장할지에 대해 한 달 전부터 논의에 들어갔을 만큼 어느 때보다도 열을 올렸다.
감히 공작 부인을 무시할 귀족은 없겠지만, 뒤에서 평민 출신이라고 얕잡아 볼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니 어느 귀족 여인들보다도 완벽하게 꾸며드릴 생각이었다.
무도회 당일, 아나샤는 이른 아침부터 시녀들에게 치장을 받았다.
평소 사근사근하던 모습들은 어디 가고 그녀들은 무서울 만큼 전투적인 눈빛이었다. 차마 쉬엄쉬엄 해달라는 말은 꺼낼 수 없어 아나샤는 순순히 그녀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장장 여섯 시간에 걸친 치장이 끝나고서야 아나샤는 거울 앞에 설 수 있었다.
“…다, 다른 사람 같아요.”
아나샤는 순간 말을 더듬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뎌 자세히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돋보이도록 새하얀 진주 머리핀이 머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머리는 틀어 올려 가느다란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는데, 목에는 목걸이가 우아한 빛을 내며 걸려있었다.
아나샤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크림색의 원단 위에는 화려한 진주알들이 레이스와 함께 촘촘히 박혀있었다. 마치 빛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너무 예쁜 드레스라서 안 어울리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분명 아샤 님이 무도회의 주인공 같으실 거예요.”
“장담하건대 이보다 더 완벽하게 꾸민 분은 없으실걸요?”
전속 시녀들은 모두 뿌듯한 얼굴들이었다. 하나하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머리와 드레스를 매만지며 아나샤는 연신 감탄을 흘렸다.
“치장받으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좀 쉬고 계세요. 저희도 쉬고 있을게요.”
시녀들이 방을 나설 때까지도 아나샤는 놀라움과 고마움이 섞인 눈길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나간 후에도 한참을 거울 앞에 서있었다.
* * *
리히르트는 오늘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건강하던 참이었다.
오전에는 업무를 끝내고, 점심에는 아르힌의 식사를 챙겼다. 세 시간 정도 아이와 놀아준 뒤 그는 루시에게 아이를 맡기고서 무도회에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물론 준비라고 해봤자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포마드로 백금발을 쓸어 넘기고서 회색빛의 우아한 연회복을 걸쳤을 뿐이었지만, 누가 봐도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였다.
리히르트는 아내의 준비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거울 앞에 서있는 그녀가 보였다.
동시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두 눈에 담기 무섭게 리히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더 오래 눈길이 머무르기도 전에 아나샤는 놀라운 속도로 어딘가로 몸을 날렸다.
“아샤……?”
“잠시만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그녀가 향한 곳은 커튼 뒤였다. 리히르트가 홀린 듯 그녀에게로 걸어가자,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아나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꾸민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단 말이에요. 뭔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혹시 부끄러운 겁니까?”
“그, 조금은요…….”
그 대답에 리히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소리와는 달리 그는 성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얀 커튼 뒤로 그녀가 보일 듯 말 듯 해서 더욱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리히르트는 결국 성급하게 커튼 자락을 쥐었다. 그러나 강제로 걷지는 않았다.
“…아샤.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
“정말 안 보여줄 겁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애태우지 않았냐고 묻듯 애절한 음성이었다. 아나샤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뒤늦게 커튼 뒤에서 걸어 나왔다.
하얀 목덜미와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차림에 리히르트의 손등 위로 살짝 힘줄이 돋아났다. 그가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자 아나샤는 다시 커튼 뒤로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마요.”
어서 다른 데를 보라고 작은 손으로 밀어내자 리히르트는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섰다. 수줍어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리히르트는 그대로 아나샤를 끌어안았다. 허리 뒤를 두 팔로 단단히 안은 채 그녀의 드러난 목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레 속이 좋지 못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두 시간 뒤 수많은 귀족들도 이 모습을 볼 것이라고 여기니 배알이 꼴리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질척한 시선들이 달라붙는 상상을 하자 심기는 급격히 뒤틀렸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요? 어디 봐요!”
안겨있던 아나샤가 곧바로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를 살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속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조금 맞아요? 표정이 너무 안 좋잖아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아나샤는 꼬치꼬치 캐묻다가 그의 안색이 너무 나빠 보이자 그를 침실로 데려가 눕혔다. 그리고 리히르트가 말리기도 전에 본인이 직접 뛰어가 주치의를 데려왔다.
서둘러 침실 안으로 들어간 주치의는 들어간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침실에서 나왔다.
“급체하신 것 같습니다. 하루 정도 푹 쉬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공작 부인에게 주치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꾀병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하라는 공작의 엄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병환으로 인해 황실 무도회는 자연스레 불참하게 되었다. 불편한 장신구들을 푼 아나샤는 침대 옆에 앉아 리히르트를 간호했다.
“아침부터 꾸미느라 고생했는데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리히가 왜 사과해요. 아픈 게 잘못도 아니고……. 그리고 리히한테 보여줬으니까 됐어요.”
“…아샤.”
“그러니까 오늘은 푹 쉬고 얼른 나아요.”
아나샤는 말갛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며, 뭐든 들어줄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뽀뽀도 해줄 수 있습니까.”
“갑자기 뽀뽀요……?”
필요한 게 자신의 뽀뽀라니. 아나샤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이걸로 힘이 난다면야… 해줄게요.”
머쓱하게 중얼거린 아나샤는 그의 반듯한 이마에 쪽 하고 키스해 주었다.
“이거 말고 다른 필요한 건 없어요?”
“볼에도 해줬으면 합니다.”
아나샤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뭔가 속는 느낌이 들었지만, 차마 아픈 남편에게 야박하게 굴 수 없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제 됐겠지 싶어서 왼뺨에서 입술을 떼자 조금 뒤 오른쪽 뺨에도 해달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요구 사항을 하나하나 들어주다 보니 어느새 그의 얼굴 한 곳도 빠짐없이 뽀뽀를 하게 되었다.
“이제 그만! 이제 자요.”
아나샤는 더 이상 들어주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어서 자라며 이불 위를 툭툭 두드리자 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