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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80화 (80/87)

80화

마브릭은 덩치에 맞지 않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에 아르힌이 그를 올려다보자 마브릭은 뻣뻣이 긴장한 채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한손에 들고 있던 곰 인형을 조심스레 아르힌에게 내밀었다.

“우와, 마브릭 삼촌이 선물을 주네?”

“우아!”

아나샤를 따라 환호하며 아르힌이 커다란 곰 인형을 안아 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반응에 마브릭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팔근육만 움찔거렸다.

“혼자만 치사하게 선물 공세냐…….”

“배신자 녀석. 다음에 올 땐 저것보다 더 큰 인형 들고 와야지.”

크리스와 바론도 질 수 없는지 따라 몸을 숙였다. 바론은 평소의 걸걸한 말투도 버린 채 아르힌과 눈을 맞추며 “안녕?” 하고 말을 건넸다.

인사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르힌은 바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작은 관심에 바론의 입꼬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고 말이다.

히죽히죽 웃는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아르힌은 고개를 돌렸다. 곰 인형에게로 다시 관심을 주며 곰 인형과 놀기 시작했다.

“나 왠지 지금이라면 그놈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바론의 낮은 중얼거림에 크리스와 마브릭은 조용히 동의했다. 세 사람은 계속해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브릭은 일관되게 ‘사랑스러워’를 중얼거렸고, 바론은 애써 말을 아끼며 점잖게 굴었으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크리스는 한참 말이 없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진짜 귀여워 죽겠다……. 다른 녀석들 오면 서로 안아 들겠다고 난리도 아닐 것 같은데.”

“우리가 미리 주의를 시켜야지. 너무 작아서 잘못 들었다간 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고.”

“맞아. 아기는 연약해… 조심스럽게 다뤄줘야 한다고.”

그렇게 쑥덕거리며 그들은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덩치 큰 사내들이 옹기종기 붙어 앉아 아이가 노는 것을 바라보는 풍경은 어딘가 기괴했다. 보다 못한 아나샤가 아이와 같이 놀아주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손대기도 조심스러운지 한 발짝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 * *

아나샤의 첫 출근 날이 되었다. 그동안 보물처럼 고이 모셔두었던 황실 기사단 제복을 차려입고서 그녀는 방문 앞에 섰다.

“뭐 잊은 건 없습니까?”

“아, 단검요! 혹시 모르니까 챙기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준비하는 동안 함께 준비한 리히르트는 단정한 정복 차림이었다. 그는 어젯밤 그녀가 소파에서 닦다가 놓아둔 단검을 찾아와 아나샤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다른 잊은 건 없습니까?”

아름다운 얼굴로 웃으며 그가 아나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까워진 얼굴 거리에 아나샤는 웃음을 삼킨 채 그의 입에 짧게 입술을 찍어주었다.

“이제 됐죠? 다녀올게요.”

“잘 다녀오십시오.”

“응, 일찍 올게요.”

한 번 더 포옹을 나누고서 아나샤가 그의 품에서 풀려난 순간이었다.

“…엄머니?”

살짝 열린 침실 문 사이로 잠옷 차림의 아르힌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나샤가 몸을 숙이고 팔을 벌리자 곧바로 아르힌이 쪼르르 달려와 그녀에게 안겼다. 작은 손으로 제복 자락을 꼭 붙잡고서 아르힌은 고개를 들었다.

“…엄머니, 가?”

“응. 엄마 기사단에 출근하러 가요. 아힌도 같이 출근할까?”

잠이 덜 깬 채로 아르힌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아나샤는 부스스 뜬 새하얀 금발 머리에 연신 뺨을 비볐다.

열렬히 아이를 귀여워하는 동안 시간은 어느덧 오 분이나 지나있었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할 시간이 되자 아나샤는 아쉬운 얼굴로 아르힌을 놓아주었다.

“엄마 진짜 갈게… 아빠랑 잘 놀고 있어. 알았지?”

시무룩한 아나샤의 목소리에 아르힌이 다가와 목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엄마를 위로해 주려는 건지 뺨에 뽀뽀도 해주었다.

“세상에, 감동이야!! 우리 아기!”

아나샤는 다시 아르힌을 꼭 끌어안았다. 한참을 귀여워한 뒤에야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배웅을 받고서 가까스로 출근할 수 있었다.

오전 내내 간단히 업무를 본 리히르트는 정오가 되어서야 침실로 올라갔다. 창문을 열어놓아 환한 침실 안에는 아르힌이 잠들어 있었다.

“아힌.”

그 낮고 잔잔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아르힌이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리히르트는 옷장에서 아이의 옷을 꺼내 들고서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밥 먹으러 가야지.”

“우웅…….”

눈을 비비적거리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리히르트는 능숙한 손길로 일으켜 앉혔다.

이제는 혼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아르힌은 서툰 손길로 잠옷을 벗고 아버지가 고른 옷을 입었다. 물론 단추를 잠그는 것은 리히르트의 몫이었다.

리히르트는 아이를 안고서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긴 식탁 위에는 두 사람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아이용으로 제작된 높은 의자에 아르힌을 앉혔다. 그리고 작은 스푼을 손에 쥐여주자 아르힌은 언제 졸려 했냐는 듯이 유아식을 먹기 시작했다.

리히르트는 식사를 하면서 아이가 먹는 모습을 계속 옆에서 지켜보았다. 흘리고, 입가에 묻히는 일은 대수롭지 않았다. 아직은 서툰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채소를 한 입도 먹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특정 채소는 접시 밖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이건 왜 안 먹는 거지? 아힌.”

“…맛업쪄.”

“골고루 먹어야 몸에 좋은 거란다. 그러니 한 입만 먹어볼까.”

달래듯이 말하고는 그는 익힌 주황빛 채소를 포크로 집어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이에 바로 아르힌은 팩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까지 옹다문 모습이 여간 고집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리히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예전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 여러 육아 서적들을 읽어두었던 그였다.

책에서는 편식에 대한 해결법으로, 부모가 먼저 최대한 맛있는 표정으로 먹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권했었다.

“이 맛있는 걸 안 먹겠다니 어쩔 수 없지… 내가 먹는 수밖에.”

그 덤덤한 독백에 아르힌의 고개가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아르힌이 조금 흥미를 보이자 리히르트는 채소를 입에 넣고서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음…….”

그 나름대로 맛에 감탄하는 연기를 했지만 남이 봤을 땐 그저 차분하게 음미하는 얼굴일 뿐이었다. 표정 어디에도 맛있다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르힌은 잠시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다시 유아식을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채소는 여전히 남겨진 채였다.

* * *

복귀 후 매일같이 바쁘던 아나샤는 오랜만에 휴일을 맞이했다. 세 가족이 함께하는 점심 식사에 아르힌은 평소보다 들뜬 모습이었다.

“오늘은 엄마랑 같이 밥 먹을까?”

“네에!”

아이를 옆자리에 앉히고서 아나샤는 리히르트와 슬쩍 눈빛을 교환했다.

어젯밤 그에게서 아르힌의 편식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은 그녀였다. 일주일 내내 채소만 남긴다고 진지하게 토로하는 그는 정말이지 근심에 찬 얼굴이었었다.

원래는 아르힌이 먹고 싶은 대로 먹게 자유롭게 놔두는 편이지만, 오늘은 그를 도와 채소를 먹게 만들 생각이었다.

아나샤는 맡겨만 달라는 듯이 남편을 향해 몰래 눈을 찡긋하고는 아르힌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접시 위에 있는 푸른 채소로 포크를 가져갔다.

“우와, 이게 뭐야? 엄마가 먹어봐도 돼?”

“안 대!”

아르힌이 고개를 크게 홱홱 가로저었다. 마치 엄마가 독약이라도 먹겠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말이다.

“정말 안 돼?”

“우음…….”

고민하는 듯 아르힌이 작은 입을 우물거릴 때였다.

아나샤가 잽싸게 푸른 채소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아르힌이 충격받은 얼굴로 올려다보자 아나샤는 기다렸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허어업, 세상에! 너무 맛있다!! 엄마 더 먹어도 돼?”

아나샤가 너무 맛있다며 몸을 들썩이기까지 하자 아르힌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맛있는 건지 궁금함이 들자 엄마를 따라 채소를 입에 넣었다.

그 처음 있는 일에 리히르트는 포크도 내려놓고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채소 요리가 맛있게 느껴질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이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르힌은 뱉지도 않고 꼭꼭 씹어 삼켰다.

“아기도 이거 먹을 줄 알아? 너무 대단하다! 아빠한테도 한 번 더 보여주자!”

아나샤의 과한 칭찬은 아르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르힌은 당당하게 채소를 푹 찍어 다시 한번 입에 가져갔다.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모습에 리히르트는 감격에 찬 얼굴로 박수를 쳐주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아힌.”

“우리 아기 너무 대단하다!”

아빠와 엄마가 양옆에서 짝짝 박수를 쳐주니 아르힌은 더 신이 나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하는 동안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식사를 한 뒤 아나샤는 아르힌과 방에서 괴물 놀이를 했다. 그동안 못 놀아준 몫만큼 열심히 놀아줄 생각으로 그녀는 더욱 실감 나게 괴물 흉내를 내었다. 아나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아르힌은 방문이 열리자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선 리히르트는 제 다리 뒤에 숨은 아르힌을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그는 익숙하게 아르힌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곁으로 다가온 아나샤의 뺨에 키스하고선 아이가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부턴 제가 돌볼 테니 그대도 쉬십시오. 모처럼 휴일인데 놀아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노는 건데요, 뭘. 그리고 리히는 매일 혼자서 돌보는데 리히가 쉬어야죠.”

“어차피 지금부터는 낮잠 재워야 해서 저도 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말대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아르힌은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지 얌전했다. 리히르트가 다녀오라고 얘기하자 아나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짧은 키스를 나누고서 아나샤는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루시와 함께 수도 나들이에 나섰다. 오랜만에 찾은 디저트 가게의 창가 자리에 앉아 아나샤는 한낮의 여유를 즐겼다.

“예전에 이곳에서 아샤가 두 번째 부인 얘기를 했었는데 말이에요.”

루시가 과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를 먹으며 얘기했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나샤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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