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두 사람은 밤새 아르힌의 곁을 지켰다. 그 정성 어린 간호에 불덩이 같던 체온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느라 기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던 아나샤는 어느새 아이 옆에 웅크려 잠들었다. 리히르트도 의자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푸른 어스름이 깔린 새벽이 되어서야 그는 눈을 떴다. 리히르트는 곧바로 아르힌의 몸 상태부터 살폈다. 이마에 손을 가져가자 평소의 체온이 느껴졌다. 열이 내려 편안해진 건지 작은 얼굴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아.”
리히르트는 깊이 안도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그는 불편하게 잠이 든 아나샤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바로 눕히기 위해 어깨를 붙잡은 순간 아나샤가 잠에서 깨어났다.
“…헉, 아힌은요?!”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 아나샤가 외쳤다. 그러곤 곧장 상체를 일으켜 아르힌을 내려다보았다.
“열 내렸습니다.”
리히르트가 옆에서 조용히 말하자 아나샤는 환하게 입을 벌렸다. 그녀는 곧바로 리히르트의 품에 달려들다시피 안겼다.
“…다행이에요, 정말.”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서 다행이라고 속삭이던 두 사람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 * *
그날 이후로 아르힌은 가벼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쑥쑥 자랐다. 그렇게 긴 겨울이 지나고 무사히 첫 번째 봄을 맞이한 아르힌이었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혼자 일어나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첫걸음마를 뗐을 때 아나샤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르힌을 안고 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걸을 줄 안다고 자랑했을 정도였다.
아르힌이 걸어 다니니 놀이는 더욱 활동적으로 변했다. 아나샤는 매일 넓은 방 안에서 아르힌과 술래잡기를 하며 보낼 정도였다.
“으와왕! 잡히면 잡아먹을 거다!”
오늘도 아나샤는 우스꽝스러운 괴물 흉내를 하며 아르힌을 뒤쫓았다. 뒤뚱뒤뚱하며 도망가기 바쁜 아이의 모습에 웃음을 삼키며 말이다.
“잡았다!”
“꺄앗!”
아르힌을 눕히고 배에 입을 가져간 아나샤가 냠냠 먹는 흉내를 냈다. 닿는 숨결과 입술이 간지러운지 아르힌은 까르륵거렸고 말이다. 정다운 두 모자의 모습을 보며 루시는 어째 놀아주는 그녀 쪽이 더 신나 보인다고 여겼다.
한참을 카펫 위에서 뒹굴거리며 아나샤가 아르힌과 놀아주고 있을 때였다. 반가운 손님들이 방을 찾아왔다.
벤자민과 리암은 허리에 찬 진검을 마리에게 맡기고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달에 서임식을 치르고 이제는 어엿한 공작성의 기사가 된 그들이었다.
“공자님!”
벤자민이 외치자 아르힌이 짧은 다리로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아는 사람이 와서 반가운지 그의 다리에 매달려 꺄륵 소리를 내었다.
“아이구, 제가 와서 신났어요?”
벤자민이 아르힌을 안아 들고 귀여워하는 동안 아나샤는 점잖은 척 앉아 친구들을 맞이했다.
“휴, 너희들이 와서 이제야 좀 쉬네.”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엄청 신나있던데요. 공작 마님. 괴물 흉내도 필요 이상으로 열정적으로 하시고?”
“놀아주려면 실감 나는 연기력도 필요한 법이거든?”
“소리만 들으면 아기가 너랑 놀아주는 것 같던데. 무슨.”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오늘은 다 같이 안 왔네?”
리암의 말에 아나샤는 내심 찔려 다른 말을 꺼냈다.
그동안 벤자민은 작은 목검을 들고서 아르힌을 상대했다. 아기들이 가지고 놀 수 있게 끝이 뭉툭한 검 모양 장난감이었다. 느리게 툭툭 검을 맞대며 놀아주는 벤자민을 보며 리암이 말했다.
“벤 녀석 새로운 목표 생긴 거 알아?”
“뭔데?”
“나중에 공자님 크면 직속 호위 기사가 될 거래.”
“풉, 진짜 벤답다.”
아나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아르힌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벤자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힌 든든하겠네. 이렇게 훌륭한 기사님들이 지켜준다니까.”
“거기다 어머니는 황실 기사단 소속이시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내년엔 수도로 올라간댔지? 벌써 아쉬워서 어떡하냐.”
“벌써 아쉬워해 주니까 왠지 좀 감동인데?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너희 보러 내려올게.”
일주일 전, 아나샤의 기사단 복귀 날이 정해졌다. 공작성에서의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니 새삼 지금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꺄!”
그때 들려온 짧은 외침에 두 사람의 시선이 아르힌에게로 옮겨졌다. 연달아 벤자민의 장난감 검을 향해 검을 내리치던 아르힌이 쪼그려 앉더니 찌르기로 공격 태세를 바꾸었다.
꾹 하고 뭉툭한 검끝이 벤자민의 옆구리를 누르자 벤자민은 드러누워 죽는 시늉을 했다.
“커억. 으어억.”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가 신기해서라도 더 찔러볼 만도 할 텐데 아르힌은 그러지 않았다. 벌써부터 기사도를 아는 것인지 검을 내려두고서 짝짝 박수를 쳤다.
“오, 벤 녀석보다 검을 더 잘 쓰는 것 같은데?”
리암이 작게 감탄하고 있을 때 아나샤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떡해, 우리 아기 검술 천재인가 봐……. 당장 리히한테 말하고 올게!”
“뭐 지금?”
리암이 말리기도 전에 아나샤는 잽싸게 방을 빠져나갔다.
* * *
수도로 올라가기 하루 전날, 아나샤는 앞으로 한동안은 보지 못할 성의 사용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러 다녔다. 아나샤의 손을 잡고 함께 나온 아르힌은 그녀 옆에서 따라 인사했고 말이다.
“안녕히 계세요, 해야지.”
“안녀게세요!”
“아유, 귀여워. 잘 가셔요. 공자님.”
“네에!”
“가셔도 건강하셔야 돼요.”
“네에! 안녀!”
배운 인사말을 어눌한 발음으로 열심히 외치는 아르힌을 사용인들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성의 주방을 나와 아나샤는 마지막으로 연병장에 들렀다.
정든 기사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자 하늘은 어느새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밥.”
“빱!”
아르힌을 업고서 아나샤는 성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문 근처에 다다르자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버디!”
어깨 너머로 고개를 쭉 뺀 아르힌이 환하게 입을 벌리며 외쳤다. 리히르트는 두 사람에게 빠르게 다가와 아르힌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한 팔로 안정적으로 아이를 든 채 작은 머리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쪽 하는 소리를 내는 입술 위로 자상한 미소가 짙게 떠올랐다.
“어머니랑 같이 인사 잘하고 왔니, 아가?”
“네에!”
“그래. 착하구나.”
토닥토닥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리히르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리고 아나샤를 돌아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도 오늘 혼자 아이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했습니다. 업무만 아니었다면 같이 가는 거였는데…….”
“고생은요. 같이 다녀서 재밌었는걸요. 다들 아힌을 얼마나 예뻐해 주시던지! 주방에서 간식을 엄청 많이 만들어 줘서 아마 아직도 배가 부를 거예요.”
“오늘 저녁은 조금만 먹여야겠습니다.”
리히르트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아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쥐고서 천천히 걸었다.
부드러운 석양에 물든 성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 가족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단란하기만 했다.
* * *
웨일그레슬 공작 저택 앞에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려선 크리스와 마브릭, 바론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선 정문으로 들어섰다.
한 번에 우르르 몰려오면 아이가 놀랄 수 있기에 아나샤는 하루에 딱 세 명만 받기로 했는데, 그 첫 방문객으로 세 사람이 뽑혔다. 이 셋의 휴가 날짜가 가장 빨라서 뽑힌 것뿐이라지만 그들은 첫 번째의 영광을 거머쥔 사람들처럼 굴었다.
“공작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그들을 맞이하며 위층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
한 팔에 거대한 곰 인형을 안은 마브릭이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시끄러웠을 바론도 긴장이 되는지 조용히 입술에 마른침을 묻혔다. 곧 아기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크리스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문을 지난 그들은 어느 호화로운 방 안에 도착했다.
“삼촌!”
소파에 앉아있던 아나샤가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달려왔다.
가장 먼저 마브릭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주었다. 덩치 큰 그의 품속에서 아나샤는 곰 인형과 함께 파묻혀야 했다.
“켁, 삼촌… 숨!”
“애 죽겠다! 하여간 덩치만 커선.”
버럭 소리친 바론이 우락부락한 두 팔로부터 아나샤를 구해내었다.
“휴…, 마브릭 삼촌 힘은 여전하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고작 2년밖에 안 지났는데 폭삭 늙었을까 봐?”
“…설마, 크리스 삼촌이었어? 얼굴에 주름이 너무 많아서 못 알아봤어.”
“주름은 무슨! 어디 가면 아직도 이십 대 후반 아니냐는 소리 듣거든?”
“거짓말 치시네!”
티격태격하면서도 크리스는 오랜만의 재회에 기쁜 표정이었다. 2년 만에 본 아샤는 그대로였다.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틀어 올려도 그 장난스러운 미소와 키득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한 것이다.
이미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기에 긴 얘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나샤는 삼촌들을 데리고 곧장 안쪽의 아이 방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인형을 가지고 놀던 아르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엄마를 발견하기 무섭게 짧은 다리로 벌떡 일어났다.
쪼르르 달려오는 작은 아이의 모습에 마브릭과 바론, 크리스는 숨을 삼켰다. 문 앞에 서있는 커다란 덩치의 그들을 아르힌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엄마 삼촌들 처음 보지?”
아르힌의 곁에 쭈그리고 앉은 아나샤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삼쫀?”
“응. 삼촌. 저기는 크리스 삼촌, 저기는 마브릭 삼촌, 저기는 바론 삼촌이야.”
“안녀하데요.”
“이젠 알아서 인사도 잘하고, 우리 아기 천재네!”
아나샤가 아르힌을 꼭 끌어안고 기뻐하자 아르힌이 배시시 웃었다.
“…너무 조그매… 사랑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