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안 보는 척하면서도 힐끗 아기를 향해 시선을 주던 가신들은 아르힌과 눈이 마주치자 미약하게 입가를 꿈틀거렸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이 귀여워 절로 흐뭇해지는 것이다.
“으…우.”
회의가 반 정도 진행됐을 때였다. 뭔가 불편한 듯 작은 입을 오물거리던 아르힌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잠시 중단하도록 하지.”
아르힌을 안아 들고서 리히르트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회의장의 옆방에 들어가며 시종에게 따뜻한 물과 수건, 천 기저귀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리히르트는 소파 위에 아르힌을 눕혔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천 기저귀를 벗겨내었다. 아르힌이 태어난 이후로 직접 기저귀를 갈며 갖은 육아법을 터득한 그였다. 이제는 척 하면 척 할 정도인 것이다.
방에 들어간 지 약 이십 분 정도가 흐르고, 리히르트는 잠이 든 아들을 안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조용한 목소리로 회의는 진행되었다.
* * *
평화로움이 감도는 나른한 오후였다. 공작 부부의 침실에선 작은 비명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아나샤가 낸 소리였다.
“우리 아힌, 엄마 좋아요?”
“빠아!”
“좋다구? 아구 귀여워라.”
눈을 마주한 채 방긋방긋 웃는 아르힌이 귀여워 아나샤는 아르힌을 꼬옥 끌어안았다. 작은 몸에선 보송보송한 아기 분 냄새가 맡아졌다.
“어떡해! 너무 사랑스러워!”
아나샤가 아르힌을 안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아르힌은 짧은 팔을 뻗어 아나샤의 얼굴을 톡톡 만졌다. 그 손짓이 너무 앙증맞아 아나샤는 조그마한 손바닥 안에 뽀뽀를 퍼부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뽀뽀 세례에 아르힌은 꺅꺅대며 좋아했다. 이에 아나샤는 작은 손에서 입술을 떼고 하얀 뺨에도 쪽쪽 입을 맞췄다. 매일 봐도 예뻐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기치고 길고 하얀 속눈썹 아래에 자리한 커다란 눈망울은 맑았다. 날이 갈수록 아빠를 쏙 빼닮아 가는 외모였다. 아르힌을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예쁜 아기라며 감탄했다.
아나샤는 아이와 나란히 누운 채 계속해서 장난을 쳤다. 하얀 솜털이 난 뺨을 약하게 콕콕 찌르자 아르힌이 그 손가락을 붙잡기 위해 손을 꼬물거렸다.
“…너무 말랑말랑해.”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볼살을 만질 때면 마음이 절로 포근해졌다. 이래서 리히가 제 볼살을 그렇게 만져댔나 싶은 것이다.
한동안 아르힌과 놀아주던 아나샤는 아르힌이 잠들자 따라 눈을 감았다. 조금 이따 그가 오면 깨워주겠지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리히르트는 침실에 들어섰다. 침대 위에서 한가로이 낮잠에 빠져든 두 모자를 발견한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색색대는 숨소리마저 사랑스러운 광경에 그는 심장이 조금 아픈 느낌이었다. 이대로 스쳐 지나가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침실을 벗어나 시종을 불렀다. 그리고 무언가를 지시하고는 침실 문을 열어두었다.
몇 분 뒤, 시종들이 조용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침대 옆에는 원목 이젤과 화구들이 소리 없이 놓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비장한 얼굴의 화가가 걸어 들어와 원목 이젤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영지 내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화가로, 공작이 직접 발탁해 성안에 들인 이였다.
그는 올해만 해도 이미 열다섯 작품이 넘는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작품 속 인물은 늘 같은 사람이었다. 애당초 한 명의 인물화를 남기기 위해 공작성의 전속 화가로 뽑힌 것이지만.
그의 작품명을 나열하자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든 공작 부인’, ‘환하게 웃고 있는 공작 부인’, ‘나들이 나간 공작 부인’ 등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림의 작품명은 ‘공자님과 낮잠을 주무시는 공작 부인’이었다.
* * *
아르힌이 기어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리히르트는 한시도 아르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모두 입에 가져가고 보니 항상 지켜봐야 했다.
“아부부.”
“입에 넣으면 위험하단다.”
“아바바!”
“어서 아빠한테 주렴. 착하지.”
늦은 저녁 리히르트는 아르힌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언제 주운 건지 아르힌은 작은 장식품을 주먹 안에 꼬옥 쥐고 있었다.
고집이 얼마나 센지 손에 쥔 것은 뭐든 금방 놓지 않았다. 뺏으려 하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니 강제로 뺏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리히르트는 늘 아르힌을 상대할 때면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때, 침실 안으로 막 목욕을 마친 아나샤가 들어섰다.
그 소리에 아르힌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엄마를 발견하기 무섭게 아르힌은 손에 쥔 것을 내려두고 폭식한 카펫 위를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맘마! 빠!”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아나샤는 아르힌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서 볼 뽀뽀를 하는 동안 리히르트는 재빠르게 작은 장식품을 주워 장식장 안에 넣었다.
어깨 너머까지 기른 새카만 머리카락은 촉촉한 물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엄마의 품에 안긴 채 아르힌은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사이 수건을 가져온 리히르트는 아나샤의 뒤로 다가왔다. 리히르트가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기 위해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가자 아르힌이 대번에 “빠아!” 하고 소리를 냈다.
“아힌이 엄마 머리 말려줄 거야?”
웃음을 터뜨린 아나샤는 아기의 보드라운 뺨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아르힌은 머리카락을 당기면 엄마가 아파한다는 걸 이해한 건지 잡아당기지도 않고 서툰 손길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머리는 이따 말릴게요. 잠깐 쉬고 있어요.”
왠지 지쳐 보이는 리히르트를 돌아보며 아나샤가 말을 건넸다. 지금은 아르힌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상책이라 여긴 것이다.
십 분 정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놀던 아르힌은 이제 만족했는지 슬그머니 손힘을 풀었다. 이를 빠르게 눈치챈 아나샤는 아이를 살며시 품에서 떨어뜨렸다.
“고마워. 덕분에 엄마 머리가 금방 말랐네? 이제 아빠랑 목욕하고 오면 엄마가 머리 말려줄게.”
“부부우.”
“아빠 너무 힘들게 하면 안 돼요.”
“부우. 바바.”
뭐라 뭐라 옹알거리면서도 얌전히 리히르트의 품에 안기는 아르힌이었다. 침실에 남은 아나샤는 두 사람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평소와 같은 어느 날이었다. 오늘도 저녁까지 아르힌과 놀아주던 두 사람은 아르힌이 졸려 하자 일찌감치 잠을 재웠다. 아르힌이 잠들자 리히르트는 오전에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마저 처리하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로선 이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들고 싶었으나 오늘 처리하지 않으면 언제 또 시간이 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침실에서 벗어나기 싫다는 양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일찍 와요. 너무 무리하지 말구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리히르트는 문 앞까지 배웅해 주는 아나샤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혹시 몰라 조금 늦어질 수도 있으니 먼저 자고 있으라는 그의 말에 아나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한참 동안이나 끌어안고 서있던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일은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빠르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는 동안 남은 서류의 양도 드디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히르트가 몰려온 피로에 잠시 눈을 감고 미간을 누를 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조금 뒤 울린 노크 소리에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몸을 일으켰다.
직접 문을 열자 문 앞에 서있던 시녀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아프십시다. 갑자기 열이 오르시더니 먹은 것도 토하셔서…….”
더 이어지는 말을 들을 새도 없이 리히르트는 시녀를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급하게 방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있는 아나샤가 보였다.
“리히…….”
얼마나 울었는지 발갛게 눈이 부어있는 모습에 리히르트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빠르게 그녀 곁에 다가서자 아나샤가 일어나 그의 품에 안겼다.
“자다가 갑자기 울어서 안았는데 몸이 불덩이 같았어요. 아까 전에 주치의가 다녀갔는데… 흐읍, 원인을 모르겠대요.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계속 열이 안 내려가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아나샤는 겨우 끝까지 말을 이었다.
리히르트는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고열에 시달리느라 아르힌은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다.
“…흐으윽. 이러다 우리 아기 잘못되면 어떡해요? 나 때문에…….”
“왜… 그대 탓입니까. 아샤.”
“그치만 제가 일찍 눈치챘더라면 흐윽, 좀 더 빨리 주치의를 불렀을 수 있었잖아요……. 전 자느라 몰라주고…….”
잘못되면 전부 자기 탓이라며 아나샤는 그의 가슴팍에 펑펑 눈물을 쏟았다. 잘 울지 않는 그녀가 이토록 서럽게 우니 더욱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아샤, 괜찮을 겁니다.”
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나샤와 눈을 마주했다.
“저녁까지만 해도 씩씩하게 잘 놀지 않았습니까. 분명 큰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렇게 그녀를 다독이며 리히르트는 그녀가 침대 헤드에 편히 기댈 수 있게 앉혔다. 그리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러다 그대도 아프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아힌이 깨어나면 그대부터 찾을 텐데.”
“…흐으읍. 흡.”
엄지로 눈물을 훔쳐 닦아주는 다정한 손길에 아나샤는 금세 마음이 진정되었다. 훌쩍이는 소리는 점차 줄어들어 갔다.
아나샤가 완전히 눈물을 거두자 리히르트는 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물과 수건을 가져오라고 이르자 곧 시종이 미지근한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가져왔다.
리히르트는 수건에 물을 묻혀 아르힌의 얼굴과 목을 조심스레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나샤는 루시가 가져온 해열에 좋은 차를 아이의 입에 조금씩 흘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