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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77화 (77/87)

77화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대 혼자 무서웠을 텐데 전부 혼자 감당하게 해서…….”

“…아니에요. 제가 못 오게 한 거잖아요.”

아나샤는 그의 말을 자르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리고 언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근데 리히, 제 친구들을 때려눕히고 온 건 아니죠? 모습이 꼭 몇 시간 동안 육탄전을 벌이다 온 것 같은데…….”

“…….”

“오늘 바로 친구들한테 가서 사과해요.”

“그러겠습니다.”

명심하겠다는 듯이 리히르트는 조용히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남은 빈손으로 아나샤의 창백한 뺨을 매만지며 얘기했다.

“많이 아팠습니까?”

“눈물이 났을 정도로 아팠어요. 근데 지금 리히 얼굴 보니까 리히가 더 아파 보여요.”

입술은 찢어지고 턱 아래에는 멍이 올라올 것처럼 옅은 푸른 기가 돌았다. 아마 그의 몸 곳곳에도 멍이 들어있지 않을까, 아나샤는 추측했다.

“얌전히 기다리지 그랬어요.”

“그대가 쓰러졌다는 얘길 들으니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샤.”

그렇게 변명하는 그는 슬픈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빛에 아나샤는 더 뭐라 할 수 없어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자고 일어나면 아기도 눈 뜨겠죠? 얼른 아가랑 인사하고 싶어요. 아차,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아들입니다.”

“그럼 이름은 정해둔 대로 아르힌으로 해요. 우리 아기가 너무 예뻐서 리아나도 괜찮을 것 같구…….”

“그대 원하는 대로 합시다.”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옆으로 쓸어 넘겨준 그가 고개를 숙였다. 드러난 이마 위에 입술을 맞춘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할 테니 좀 더 자는 게 좋겠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더 많이 얘기합시다.”

“리히도 얼른 자요. 피곤하잖아요.”

“조금만 더 그대와 우리 아기를 보다가 자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저 먼저 잘게요. …잘 자요, 리히.”

“좋은 꿈 꾸십시오. 내 사랑.”

짧은 키스를 나누고서 아나샤는 곧 스르르 눈을 감았다.

조용해진 침실 안, 리히르트는 한동안 자리를 지킨 채 잠든 두 모자를 바라보았다.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예쁘고 감격스러운 광경에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충만한 행복감이 밝아오는 새벽녘처럼 밀려드는 새벽이었다.

11장 두 번째 봄

웨일그레슬 공작 부인의 출산 소식은 빠르게 수도에까지 전해졌다. 그 기쁜 소식에 황실 제5기사단의 기사들은 앞다투어 아기와 아나샤를 위한 선물들을 보내주었다. 물론 리히르트의 것은 없었다.

황녀 엘리시아는 어느 귀족들보다 먼저 축하 인사를 공작 가문에 전했다. 직접 쓴 편지와 함께 선물을 가득 실은 마차를 보내어 아나샤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버트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는 편지를 받자마자 하던 업무를 아들에게 맡기고 공작령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다시 영지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같이 공작 부부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기를 안고서 허허 웃느라 바쁜 할아버지를 보며 아나샤는 침대에 기대앉아 쉬었고 말이다. 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상태였기에 리히르트는 하루 종일 그녀의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그렇기에 아버트와 리히르트는 한방에서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전처럼 싸늘한 기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함께 아기를 돌보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눈이 똘망똘망한 게 아샤 어릴 때랑 똑 닮았습니다. 허허.”

아나샤와 리히르트, 두 사람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와서 붙인 이름대로 아르힌의 외형도 엄마, 아빠를 반반씩 쏙 빼닮아 있었다.

솜털 같은 금색 머리카락은 리히르트를 닮아 새하얬다. 그에 반해 눈동자는 아나샤를 닮아 까만색이었다.

“자세히 보면 입 모양도 닮았습니다.”

“요 조그마한 게 성격도 엄마 닮아서 방실방실 곧잘 웃는군요.”

서로 말을 주고받는 두 남자를 보며 아나샤는 조용히 웃었다. 영원히 못 친해질 것 같던 할아버지와 리히르트가 아르힌 덕분에 거리를 좁혀가고 있으니 내심 기쁘기만 했다.

“이제 맘마 먹여야 될 시간이니까 두 사람은 내려가서 식사하고 와요. 나가면서 루시 좀 불러주고요.”

아나샤의 말에 리히르트는 아버트에게서 아르힌을 넘겨받아 안았다. 그리고 침대로 걸어가 아나샤의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올라오면서 그대 식사도 가져오겠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 있습니까?”

“음, 오늘따라 살살 녹는 스테이크가 당기네요.”

“알겠습니다. 빨리 오겠습니다.”

“빨리 오지 말고 천천히 먹고 와요. 체하겠어요.”

리히르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보나 마나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올라오리라 여기며 아나샤는 얼른 식사하러 가보라며 그를 재촉했다.

아버트와 리히르트는 함께 방을 빠져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로 들어서기 무섭게 잔잔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깔렸다.

“흠, 공작 각하께서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주 보고 앉아 침묵의 식사를 하던 중 아버트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항상 아르힌에 대해서만 얘기하던 아버트가 처음으로 그에게 옅은 관심을 준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이에 리히르트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저 목석같은 태도가 답답했을 아버트였겠지만 지금은 그저 순수하게 그가 조금 염려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머무르면서 그가 쉬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 대부분 동안 아샤의 산후조리를 돕고 육아를 도맡아 했다. 아샤에게서 듣기로는 밤에도 그가 두 시간마다 일어나 아르힌을 돌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샤는 깨는 일 없이 푹 잘 잔다니 다행이라지만, 저놈은 대체 언제 쉬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밀린 정무도 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하셔도 몸에 무리가 안 갈 리 있겠습니까.”

“…….”

“이제 아버지가 되셨는데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일 아닙니까. 앞으로 클 아이 생각해서라도 평소에도 건강 잘 챙기셔야지요.”

“명심하겠습니다.”

“큼, 내일은 제가 아르힌을 돌볼 테니 하루 정도는 육아에서 손 떼시고 푹 쉬시지요.”

아버트는 머쓱한지 헛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잠시 그를 향해 눈길이 머무르더니 곧 리히르트의 입가에 조금은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해 주신 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흠… 뭘 이런 걸로 감사 인사까지.”

아직은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 * *

늦은 밤, 공작 부부의 침실 안에선 작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칭얼거림이 커진 순간 리히르트의 두 눈이 반사적으로 떠졌다.

그는 아내가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아기침대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기를 안아 들고 침실을 나왔다.

“…쉬이.”

어둠 속에서 시계를 확인하니 우유를 먹인 지 반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배고파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여긴 리히르트는 넓은 방 안을 돌며 아이를 달랬다. 몇 분간 여린 몸을 다독였을까, 아르힌의 칭얼거림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품에 안심이라도 되는지 아르힌은 눈을 감았다.

리히르트는 숨소리를 죽인 채 담요 속에 폭 싸여 다시 잠이 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봐도 사랑스럽기만 한 모습이었다. 그녀와 자신을 닮은 아기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상황에도 피곤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애정을 퍼부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조그마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 * *

강렬한 태양 빛에 과실들이 무르익는 계절이 찾아왔다. 혼자 목을 가누지 못하던 아르힌은 이제는 뒤집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동안 충분히 몸이 회복된 아나샤는 체력 단련에 돌입했다. 내년부터는 기사단 복귀를 위해 개인 훈련을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매일 틈틈이 몸을 단련하며 기초 체력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아나샤가 잠시 운동을 하러 나간 동안에는 리히르트가 아이를 돌보았다. 유모를 따로 두어도 될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이를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게 불안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그가 안 보이면 울어버리는 아르힌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스스로도 아이가 곁에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해 낮 동안에는 업무와 육아를 병행하게 되었다.

집무실 테이블 위에는 천 기저귀가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책상 바로 옆에는 하얀 목재의 아기 요람이 놓여있었다.

요람 위에는 모빌이 달려있었다. 작은 인형들과 귀여운 동물 모양의 나무조각이 여름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것을 잡기 위해 아르힌이 작은 손을 꼬물거릴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곧 문이 열리며 집사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에 모두 도착했습니다.”

“알겠다. 지금 가지.”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킨 리히르트는 요람으로 다가갔다. 그가 아르힌을 안아 들자 집사장이 기다란 천을 가져왔다. 천은 그의 가슴팍에 아이의 몸이 고정되도록 몇 번이나 둘러졌다.

풀릴 일 없이 단단히 묶어진 것을 확인한 리히르트는 한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고서 성의 회의장으로 향했다.

아기 포대기를 둘러매고 등장한 공작의 모습에 가신들은 조금 놀란 모습들을 보였다. 아들 사랑이 남다르시다는 소문은 익히 전해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회의를 시작하지.”

물론 리히르트의 눈길이 닿자 그들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리히르트가 회의 안건에 대해 먼저 입을 열자 논의해야 될 문제들이 원탁 위로 오갔다. 매 계절마다 이뤄지는 국경 지대 보고와 영지 예산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그동안 아르힌은 천 밖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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