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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76화 (76/87)

76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답잖은 얘기들이 오갔다. 마을 시장에 뭐가 있더라, 연병장 뒤에 무슨 꽃이 만개해 있더라 등 나가지 못하는 아나샤를 위해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해주었다.

한동안 웃으며 그들과 떠들던 아나샤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마침 마리도, 리히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점점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고 있어 언제 부탁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지금 미리 부탁해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아나샤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저기 있잖아. 갑자기 이런 말 해서 좀 미안하지만 너희들에게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인데?”

선뜻 들어주겠다는 듯이 벤자민이 눈썹을 으쓱하며 답했다.

“아마… 곤란한 부탁이 될지도 몰라. 그치만 너희들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야. 물론 너네한텐 절대 피해가 안 가게 할게.”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 무섭게. 일단 의리가 있으니 들어보고 결정할게…….”

“고마워. 어떤 부탁이냐면 내가 아기를 낳으러 가면…….”

그렇게 리히르트는 꿈에도 모르게 그들 사이에 은밀한 공모가 이뤄졌다.

* * *

늦은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저물어 가는 노을에 성의 사용인들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여유롭게 일터를 빠져나올 때쯤, 공작성이 발칵 뒤집어졌다.

예정보다 이르게 공작 부인의 양수가 갑작스레 터져버린 것이다. 다행히 침실에 쓰러진 그녀를 곧바로 시녀들이 발견한 덕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공작 부부의 침실로 산파와 의원들이 들어가고, 그들을 돕기 위한 성의 사용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였다. 워낙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 이 소식은 한발 늦게 공작성의 집무실로 전해졌다.

잠시 집무실에 나와 정무를 보고 있던 리히르트는 그 소식을 접하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못 한 채 달렸다.

그가 지나온 복도 바닥마다 서류가 낱장씩 흩어져 떨어졌으나 리히르트는 그것을 눈치챌 정신조차 없었다. 최상층의 복도에 들어섰을 땐 그는 텅 빈 서류철만 쥐고 있었다.

침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소 아나샤와 친하게 지내는 견습 기사들이었다. 리히르트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 할 때 벤자민이 튀어나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아샤가…, 부인께서 꼭 전해달라는 물건이 있어서 잠시 실례를 범했습니다.”

“…뭐지?”

당장이라도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리히르트는 ‘아샤’라는 이름에 걸음을 우뚝 세웠다. 바로 효과가 먹히자 벤자민은 속으로 안도하며 빠르게 외쳤다.

“일단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지금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오셔야 합니다!”

평소라면 이 자리로 가져오라고 명했을 테지만, 현재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일시적으로 판단력이 저하된 리히르트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기사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성의 수많은 객실 중 한 곳이었다.

“부인께서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찾아낸 리암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편지를 내밀었다. 리히르트는 곱게 접힌 편지를 받아 들고서 펼쳤다.

익숙한 아나샤의 필체를 확인하자 냉랭하기 그지없던 표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내 사랑, 리히에게.

우선, 제 친구들이 갑작스럽게 이곳으로 데려와서 놀랐죠? 제가 부탁한 거니까 제 친구들한테 뭐라 그러면 안 돼요.

리히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제가 아기를 낳으러갔다는 걸 거예요. 당장이라도 제 곁으로 오고 싶겠지만 여기서 편지를 끝까지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마음 추스르면서 제 편지 천천히 읽어줘요. 알았죠?

듣기로는 진통이 시작되고 바로 아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엄청 시간이 걸린대요. 마리의 언니는 하루 내내 진통을 겪다가 아기를 낳았대요.

저도 그만큼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무서워요. 리히가 옆에 있으면 조금 덜 떨릴지도 모르겠지만, 리히가 계속 제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걱정하고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요.

얼마나 아플진 모르겠지만 출산을 겪어본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엄청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리히에겐 더욱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제가 조금만 아파해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 하는 리히를 잘 아니까요. 옆에서 리히가 저 때문에 힘들어하면 저도 너무 힘들고 속상할 것 같아요. 아기 낳는 데 집중도 안 될 것 같구요.

그러니까 리히, 제 곁을 지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저는 아무 일 없을 거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구요.

무사히 우리 아가와 함께 리히 곁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하겠지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저도 힘낼게요.

그렇게 해줄 수 있죠? 제 부탁 들어줄 거라고 믿어요. 사랑해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나샤 씀]

마지막 줄까지 읽어 내린 순간, 그의 눈에서 투명한 이슬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정작 쓴 사람은 감동시킬 속셈으로 쓸 편지가 아니었으나, 아내가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편지라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금을 울리기엔 충분했다.

종이 위에 아롱진 눈물방울에 글자들이 번져가자 리히르트는 재빠르게 그것을 닦아냈다. 그리고 품 안에 편지를 챙겨놓고서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하려는 곳이 어딘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곧바로 아나샤를 찾아가려는 그를 막기 위해 견습 기사들은 문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무겁고 서느런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무표정으로 서있는 그는 불과 1분 전 아내의 편지에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사내가 맞는지 의문이 들게 할 만큼 판이한 모습이었다.

“죄송하지만 공작 각하…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견습 기사들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비켜서지 않아도 무력으로 뚫고 나갈 생각이던 리히르트가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때였다.

방 한 곳에서 피어오르던 흐릿한 연기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어디선가 맡아보았던 향이라고 여길 때쯤 눈앞이 잠시 어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 인신매매의 근거지에서 맡았던 수면향과 같은 향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는 곧바로 호흡기부터 막았다.

그사이 벤자민을 선두로 기사들은 잽싸게 문밖으로 나가 문을 잠갔다. 벤자민은 그가 편지를 읽는 동안 몰래 수면향을 피워두어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아샤의 말대로였다. 아마 편지를 읽고도 나가려 할 테니 그냥 잠재우라고 시켰었는데 딱 그녀의 말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쾅,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살벌해 벤자민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아샤가 부탁했단 말입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 잘못이 아닙니다! 아샤가 무사히 출산을 마칠 때까지만 객실 안에서 편히 주무시고 계시.”

그때였다. 방 안에서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아차 싶은 벤자민이 황급히 문을 열었으나 이미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 설마 떨어지신 건…….”

떨어지면 즉사할 정도의 높이라는 것을 깨달은 견습 기사들은 사색이 된 채 창가로 달려갔다. 다행히 까마득한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옆 객실이다!”

옆방 창문이 열려있는 것을 확인한 리암이 외쳤다. 그들은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미 복도로 나와있는 공작을 발견하기 무섭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장 다섯 명이 달려들어 팔과 다리를 붙잡았으나 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았다. 견습 기사들은 그가 검을 소지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를 가까스로 붙잡아 둔 사이, 벤자민은 서둘러 성을 나와 연병장을 향해 달려갔다. 감히 공작 각하를 제압하기 위해 기사들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뒷일은 걱정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의 말은 공작령 안에선 하늘과도 같은 법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기사들이 돕겠다고 나서자 벤자민은 조금 기세등등해진 얼굴로 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도착한 곳에서 다섯 명을 가뿐히 때려눕히는 공작을 본 순간 다시 새파랗게 얼굴이 질릴 수밖에 없었다.

* * *

초저녁부터 시작된 진통은 늦은 밤이 될 때까지도 이어졌다. 심해지는 진통에 한참을 고생하던 공작 부인은 자정을 넘겨서야 겨우 아이를 낳았다.

울려 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산파와 의원들이 한시름을 놓을 때, 피로가 한계치에 다다른 아나샤는 실신하듯이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러, 동이 터오는 새벽. 아나샤는 희미한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제 손을 주무르는 따뜻한 손길은 익숙했다.

“…리…히?”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곧바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아나샤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며 눈을 떴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드리워진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단지 밤을 새운 것뿐 아니라 어디서 격렬한 몸싸움이라도 벌인 것처럼 만신창이인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하고서 그는 제 손을 정성껏 주무르고 있었고 말이다.

뒤늦게 아나샤는 잠이 들기 직전 어렴풋이 들었던 아기의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아기는요?”

그 물음에 리히르트가 그녀의 오른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나샤가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도톰한 담요에 폭 싸여있는 아기가 있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작고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울컥하고 따뜻한 감정이 목구멍 위로 올라왔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아나샤가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벅찬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리히르트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아샤, 고생했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단단한 손아귀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지자 그제야 아나샤는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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