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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75화 (75/87)

75화

다행히 견과류를 찾는 것은 쉬웠다. 주방 한편에 자리한 식량 보관함 속에서 아몬드가 들어있는 통을 꺼낸 아나샤는 그 자리에서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 위에는 만족감 대신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으음… 이 맛이 아니야.’

분명 잘 구운 맛있는 아몬드였지만 뭔가 부족했다. 다른 종류의 견과류도 먹어보았으나 역시 원하던 맛이 아니었다.

잠복 임무 중에 틈틈이 먹던 그때의 맛이 그리웠다.

어떻게 하면 그 맛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한참 동안 긴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뒤늦게 견과류 통을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천장 위에서 먹으면 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아나샤는 올라갈 만한 장소를 찾아 성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정확히 로비에 들어서서야 멈췄다.

천장과 닿아있는 기둥의 표면에는 조각이 양각되어 있어 올라가기 수월해 보였다. 어떻게 천장 위로 올라갈지 계획을 세운 뒤 아나샤는 몸을 움직였다.

기둥을 타고 끝 지점까지 올라가 천장 구석 타일을 밀어낼 때였다.

다급하게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아나샤는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들킬세라 재빨리 기둥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기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잠옷 바람으로 뛰어오던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나샤가 찔린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오는 동안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온 리히르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습니다…….”

성 전체를 뒤지다가 온 것인지 가쁜 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말도 없이 나와서 미안해요.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줄줄 이어지는 변명에 리히르트는 대답 대신 안도감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그는 그녀와 자신의 몸 사이에 닿는 원통형의 딱딱한 물체를 알아차렸다.

그 의문 어린 눈길에 아나샤는 겨울용 원피스 속에서 작은 나무통을 주섬주섬 꺼내 들어 보였다.

“견과류가 갑자기 먹고 싶어서 주방에서 가져왔어요.”

“깨우지 그랬습니까.”

“에이, 미안하게 자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너스레를 떨듯 한 손을 저으며 말한 아나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했으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견과류를 찾으러 주방에 간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곳 기둥에 달라붙어 있던 이유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아샤.”

“그, 기둥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래서 달라붙어 있던 거예요.”

“…….”

“정말이에요.”

“올라갔다가 내려오던 걸로 보였습니다.”

평소라면 그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에도 고개를 끄덕여 줬을 리히르트일 테지만 그는 단호하기만 했다.

그로서는 지금 벌어진 일들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내가 사라진 것도 모자라, 임신 중인 아내가 어둠 속에서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하는 가정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리히, 화났어요……?”

“화 안 났습니다.”

그는 표정을 풀며 말끝을 누그러뜨렸으나 아나샤의 눈에는 여전히 차갑게 굳은 얼굴처럼 보였다.

“미안해요… 위험한 행동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천장 위에서 견과류를 먹으려고 했어요.”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 몰라 아나샤는 시무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동시에 고작 견과류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상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속상함만 쌓였다.

“먹어도 뭔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천장에서 먹으면 나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리히. 먹는 게 뭐라고 또 걱정만 끼치고…….”

목소리에 작은 울먹임이 섞이자 리히르트는 눈에 띄게 놀라며 그녀를 살폈다.

“아닙니다. 아샤… 오히려 알아주지 못한 제가 사과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혼자, 바보 같은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 한 제 잘못이에요.”

“한밤중에 그대 혼자 고민하게 만든 제 책임입니다. 미안합니다.”

서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이상한 대화는 약 오 분간 더 지속되었다.

그 뒤, 리히르트는 정원의 구석에 있는 창고로 가서 사다리를 들고 왔다. 그리고 아나샤가 천장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잡아주었다.

천장 위에서 한 통을 다 비우고 내려온 아나샤는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듯이 배부른 얼굴이었다. 옷에 먼지가 얼룩덜룩 묻어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를 안아 든 리히르트는 욕실로 들어가 직접 목욕 시중까지 자청했다. 따뜻한 욕조 물에 몸을 담근 아나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품을 내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히 미안해요. 한밤중에 고생하게 만들어서…….”

“이런 건 고생도 아니니 더 고생시켜도 됩니다.”

새벽 두 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그는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사랑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노라 말했다.

“그러니 다음에 올라갈 때는 꼭 저에게 말해주겠습니까.”

깨워도 좋으니 몰래 오르는 것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리히르트의 말에 아나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 대신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물놀이인지 목욕인지 모를 만큼 한참을 욕실 안에서 웃던 아나샤는 졸린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나왔다.

보송보송하게 머리까지 말려주고서 리히르트는 그녀를 제 옆자리에 눕혔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리히르트는 하얀 살결 위에 입술을 누르다가 어느새 색색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이 든 아내의 모습에 소리 없이 웃었다.

행복한 듯 아나샤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 * *

리히르트는 점심을 먹은 뒤의 낮 시간에는 무조건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곤히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밤에 보는 얼굴도 좋았지만, 한낮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세상모르게 잠든 모습을 그는 가장 좋아했다. 이 얼굴을 보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드라운 살결에선 달콤한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뽀얗기만 한 뺨은 아까 그녀가 먹은 생크림이 가득 들어있는 디저트처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정말 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번 입에 넣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그녀가 싫어할 테니 그는 대신 말랑말랑한 볼을 조심스럽게 만져대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모자란 감이 있어 뺨과 얼굴 곳곳을 입술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 작고 간지러운 감촉에 얼마 안 가 아나샤의 눈이 떠졌다.

“뽀뽀 그만해요… 흣, 간지러워요!”

아나샤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리히르트의 기세는 줄어들기는커녕 그녀를 덮치고서 뽀뽀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조금도 통하지 않을 발버둥을 치며 웃어대던 아나샤는 곧 그에게 안긴 채 입을 맞췄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쪽쪽대고 있을 때였다.

“헉…, 리히 방금 느꼈어요?!”

갑작스레 입술을 뗀 아나샤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기가 움직였어요.”

“정말입니까?”

“네, 분명 여기서 퐁 했어요.”

그 말에 리히르트는 곧장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배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적잖이 감격한 눈빛이었다.

아나샤는 배에 손을 얹고서 심호흡을 했다. 조금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말 걸어봐요, 리히. 어서요.”

“아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말을 걸며 리히르트는 둥근 배 윗부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하고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기를 몇 번 반복했을까. 아나샤의 배 속에서 퐁퐁하고 다시 한번 반응이 왔다.

“아기도 아빠 사랑한다고 대답하나 봐요.”

세상에, 하고 아나샤는 입을 틀어막았다. 리히르트는 살면서 지어본 표정 중에 가장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다시금 그녀의 배 위에 귀를 가져갔다.

그가 다시 응답받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아나샤는 그동안 생각해 본 아기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기의 반응을 보고 이름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 * *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봄이 무르익을수록 아나샤의 배 속에 있는 새 생명 또한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제는 거의 만삭에 가까워진 아나샤였다. 폭신한 거위 털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아나샤는 천천히 제 배를 쓰다듬었다.

몸이 무거워 침실 밖에 한번 나가는 것도 일이었지만 답답함보다는 고마움만 들었다. 잘 자라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배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지는 몰라도 매일 돌아다니기 바빴었다. 제 기준에선 나름 자제한다고는 했으나 돌이켜 보면 얼마나 조심성 없는 행동인지 몰랐다.

리히만 속이 타들어 갔을 거라 생각하니 그에게 조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과보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푼 배를 쓰다듬을 때면 소중한 보물을 손에 넣은 것처럼 조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 태동을 느꼈을 때는 얼마나 기쁘고 놀랐는지 모른다.

아나샤는 아기가 얼른 보고 싶었다. 딸인지 아들인지도 궁금했고,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누구를 닮았을지도 궁금했다.

머릿속으로 아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던 아나샤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곧 문이 열리고 마리가 들어섰다.

“아샤 님, 친구분들 오셨어요.”

마리의 뒤로 나타난 견습 기사들이 요란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벤자민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시장에서 사온 건지 싱싱한 야채와 생화가 가득 들어있었다.

“뭘 이런 걸 다 가져오고 그래.”

“매번 빈손으로 오긴 그렇잖아. 이건 꽃구경하라고 나랑 리암이 산 거고, 나머지는 다른 애들이 샀어.”

벤자민이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를 마리에게 맡겼다. 마리는 생화를 장식할 화병을 찾아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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