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리, 리히! 왜 추운데 나와있어요.”
그때, 아나샤가 리히르트에게 뛰어가 폭삭 안겼다. 그 포옹에 리히르트는 언제 냉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냐는 듯이 따스한 표정을 지었다.
“사냥은 재밌었습니까?”
“네, 엄청 재밌었어요. 오늘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요.”
“일단 추우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차가운 몸이 걱정된다는 듯이 그는 곧바로 아나샤를 품에 안아 들었다.
다정하게 아내를 안아 든 채 그가 성 쪽으로 사라지자 기사들은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건진 기분이었다.
“벤이 놓친 걸 제가 바로 단검을 던져서 가로챘더니 엄청 배 아파 하지 뭐예요. 이미 열 마리나 더 차이 났는데 말이에요.”
침대에 앉은 아나샤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그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리히르트는 그녀의 뒤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뭐 당연한 결과겠지만 토끼 사냥은 제가 다 이겼어요.”
멧돼지에 대한 얘기는 쏙 뺀 채 아나샤는 자랑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멧돼지에 대해선 영원히 함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아나샤의 의중을 진즉에 알아차린 리히르트도 굳이 멧돼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대가 이길 거라 예상했습니다.”
“정말요?”
“그대 실력은 제가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그 간지러운 말에 아나샤는 웃음을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아나샤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속살거렸다.
“우리 뽀뽀 몇 번 남았었죠?”
“정확히 940번 남았습니다. 아샤.”
“그렇게나 많이 남았다구요? 빨리 해치워야지, 안 되겠어요.”
흠흠 하고 소리를 낸 아나샤가 먼저 입술을 겹쳐오자 리히르트는 가만히 그것을 받아주었다.
말랑한 입술이 그의 입술 위를 톡톡 부딪쳐 왔다. 키스는 하고 싶지만 선뜻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 먼저 시작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 귀여운 의중을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보다 쉬웠지만 리히르트는 짐짓 모른 체 굴었다. 꾹 눈을 감은 채 제게 적극적으로 매달려 오는 아내의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뒤늦게 아나샤는 눈을 떴다. 심통이 나 고개를 뒤로 물리려 하자 그제야 리히르트는 입을 열었다. 그러곤 그녀의 아랫입술을 삼키며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뒷머리를 감싸 안은 커다란 손은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숨결이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게 그는 더욱 깊이 입술을 맞붙여 왔다.
부드럽지만 점점 짙어져 가는 키스에 아나샤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키스를 나눈 건지 몰랐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그가 입술을 빨았다가 놓을 때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을 눕히고 키스를 이어가던 그가 입술을 떼자 그제야 아나샤는 눈을 떴다.
“…왜 더 안 해요?”
“충분히 오래 한 것 같습니다.”
뾰로통한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차분히 대답하며 아래에 누워있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나샤가 아쉬운지 입술을 삐죽댔다.
“밤새 할 줄 알았는데…….”
작게 호흡을 고르는 모습이 예뻐서 그는 조용히 웃었다.
달아오른 분홍빛 뺨과 여전히 아쉬운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사랑스러워 다시 입을 맞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했다간 스스로 절제하기 힘들 것 같았다.
“오늘은 사냥을 다녀와서 피곤하지 않습니까. 이만 자고 내일 아침에 더 해주겠습니다.”
“아직 안 졸려요. 한 시간은 더 할 수 있다구요. 리히 앉아서 일만 하더니 체력 엄청 낮아졌어…….”
그 귀여운 투정에 리히르트는 그녀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확인해 보겠습니까?”
그리고 고개를 숙여 보드라운 뺨과 목에 쪽쪽 키스하기 시작했다. 피부 위로 닿는 간지러운 감촉에 아나샤는 한참을 버둥대며 웃었고 말이다.
뒤늦게 양 손목을 놓아준 리히르트는 아래에 있는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의 몸 위에 꼼꼼히 덮어주었다. 웃느라 힘이 다 빠진 아나샤는 얌전히 그의 챙김을 받을 뿐이었다.
침실의 불이 꺼지고, 대신 침대 옆에 놓인 램프의 불빛이 공작 부부의 침실 안을 은은히 비추었다.
리히르트가 옆자리에 눕자 아나샤는 기다렸다는 양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늑하고도 넓은 품에 얼굴을 묻자 좋아하는 향이 맡아졌다.
익숙한 향과 따뜻한 체온에 마음은 빠르게 평온해졌다. 솔솔 잠기운이 쏟아져 와 아나샤가 늘어지게 하품을 터뜨릴 때였다.
“아샤. 한 가지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아나샤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정원 산책을 따분하게 여긴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짐승들만 풀어놓은 안전한 사냥터를 따로 만들까 합니다.”
“정말요?!”
놀란 아나샤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히르트는 은은히 웃어 보이고선 하얀 이마에 짧게 입술을 맞췄다.
“만드는 데 아마 두 달 정도 걸릴 겁니다.”
“두 달요?”
대충 뒤뜰에 짐승을 푸는 정도를 생각했던 아나샤는 입을 떠억 벌렸다. 대체 얼마나 큰 사냥터를 만들 생각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산에 가는 건 그만두는 게 어떻습니까?”
묻는 말이긴 했으나 사실상 두 달 동안은 사냥에 가지 말아달라는 부탁에 가까웠다. 아나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리히르트는 깊은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그대를 산에 보내고 나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애가 탄 눈빛이 얼굴에 닿았다.
“내내 마음이 불안해 일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대를 보낸 걸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아샤.”
누가 들으면 전장에라도 보낸 줄 알 만큼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 처연한 기색을 띤 아름다운 얼굴에 아나샤는 특히나 약했고 말이다.
“미안해요, 걱정 끼쳐서. 리히가 이렇게까지 크게 걱정할 줄은 몰랐어요.”
미인계를 동원한 베갯머리송사에 아나샤는 홀랑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멧돼지에 대한 것이 찔려서 더 순순하게 구는 것도 있었다.
“오늘 워낙 재밌게 놀아서 사냥은 또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사냥터도 안 만들어 줘도 돼요.”
“…정말입니까?”
“네. 그리고 이제 더 추워질 텐데 아기 생각해서라도 덜 나가야죠.”
아나샤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추위 속에서 사냥을 실컷 하고 온 자신의 입으로 말하니 조금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리히르트는 이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모양인지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심심하지 않게 제가 더 곁에서 잘하겠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하려구요. 이러다 하루 종일 안고 다닌다고 하겠어요.”
작게 키득거리며 아나샤는 말했다. 그리고 이때의 아나샤는 몰랐다. 자신의 우스갯소리가 머지않아 정말 실현되리란 것을.
* * *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밖과는 달리 공장성의 내부는 늘 훈훈한 공기로 가득했다. 조금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도록 항시 보온에 신경 쓰라는 공작의 지시 때문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성안이 춥든 덥든 관심조차 없었던 그였으나, 지금은 성안의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고 주의하기 일쑤였다.
정확히는 아나샤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그녀의 몸에 변화가 생겨나자 리히르트의 유난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잠시라도 부인에게서 떨어지면 죽을 사람처럼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수발을 들었고,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침실에서 나올 때면 늘 그녀도 함께였는데 담요에 둘둘 싼 부인을 안고 다니는 모습은 성의 사용인들에겐 이젠 익숙한 광경이었다.
아나샤만이 창피하다며 담요 속에 얼굴을 꽁꽁 숨길 뿐이었다. 혼자 걷겠다고 수차례 얘기해도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강경하게 거절했다.
그 이유란, 첫째는 안겨있는 게 체온 유지에 더 도움이 되며, 둘째는 앞으로 점점 배가 불러올수록 걷기 힘들어질 테니 지금부터 안겨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였다.
걷지도 못하게 매일 안고 다닌 덕분일까. 아나샤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올랐다. 특히 볼살이 많이 쪄서 리히르트가 매일 그녀의 볼을 만지는 게 일상이 되었을 정도였다.
사실상 살이 안 찌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녀가 매일 먹는 음식들은 화려했다.
입덧이 끝나니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지 하루에도 여러 번 먹고 싶은 게 생겨났다. 거기다 먹고 싶다고만 하면 공작성의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주니 하루하루 입이 즐거울 정도였다.
이제는 소식하는 습관도 포기하고 아기를 핑계로 마음 내키는 대로 먹었다. 물론 리히르트의 눈에는 이마저도 적게 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먹는 것에 있어선 매일같이 만족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아나샤였다.
성안의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아나샤는 눈을 떴다.
시린 달빛이 내려앉은 침실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눈을 깜빡이며 침실 풍경을 바라보던 아나샤는 잠든 남편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두른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숙련된 첩자다운 몸놀림으로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가도 참.’
아나샤는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으며 배를 문질렀다. 살짝 동그랗게 부푼 아랫배가 만져졌다.
저녁 식사로 나온 칠면조구이를 해치우고 후식으로 달달한 디저트까지 먹었을 텐데, 또 뭐가 먹고 싶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녀가 새벽에 자다 말고 복도로 나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갑자기 견과류가 당길 게 뭐람.’
아무리 요즘 먹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고는 해도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기가 먹고 싶다는데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나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부지런히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