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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73화 (73/87)

73화

아버트가 어깨를 풀기 시작하자 아나샤는 튼튼한 팔뚝을 붙잡아 내렸다. 역시 한 달간 앓아누웠다는 건 거짓말인지 당장이라도 산에서 멧돼지를 때려잡아도 될 것 같았다.

“리히, 미안해요. 할아버지 데리고 먼저 올라가 볼게요! 이따 식당에서 봐요.”

아나샤는 그대로 할아버지를 끌고 위층 객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리히한테 잘해주면 안 되냐’, ‘그놈이 뭐가 예뻐서 잘해주냐’로 투덕거리다가 두 사람은 객실로 들어섰다.

“길베르는 잘 지내?”

“잘 지내고 있단다. 안 그래도 너한테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아버트가 품에서 꺼낸 편지를 받아 든 아나샤는 바로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결혼 소식에 깜짝 놀랐다는 내용과 진심으로 축하하고 건강하길 바란다는 따스한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녀석 선물도 가져왔으니 이따가 뜯어보고.”

“정말? 나도 이따가 답장 써야겠다.”

“그래, 가서 전해주마.”

저녁 만찬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두 사람은 차를 마셨다. 아나샤는 그동안 공작성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조잘대다가 마침 떠오른 얘기를 꺼냈다.

“며칠 머물다 갈 거지? 성 구경 제대로 시켜줄게. 그리고 견습 기사들 훈련도 좀 봐줘. 할아버지가 온대서 다들 엄청 기대 중이거든.”

“시간도 많으니 한번 봐주마.”

“정말? 정말이지?”

“그래그래.”

아나샤는 이 소식을 벌써부터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어 마음이 들떴다.

“분명 엄청 좋아할 거야. 다들 정식 기사를 목표로 하는 애들이거든.”

자신의 할아버지가 전 기사단장이라고 알려줬더니 과할 만큼 눈을 반짝이던 친구들이었다. 이번에 놀러오시는 김에 한번 훈련을 부탁드려 본다고 하자 기뻐서 날뛰기까지 했었다.

“그중에 벤자민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곳에서 친해진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아나샤의 표정은 밝았다.

그 얘기들을 묵묵히 들어주며 아버트는 평온한 미소를 띠었다.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는 모습을 직접 보니 이제야 한시름이 놓이는 것이다.

아나샤도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했다. 이따 셋이서 식사를 할 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나샤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식당에 내려가 리히르트와 마주하기 무섭게 아버트는 희대의 썩을 놈을 마주한 사람처럼 다시 신랄하게 말을 뱉어댔다. 욕만 아닐 뿐 거의 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처음엔 아버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던 리히르트는 어느샌가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흘려듣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실상 리히르트로서는 아버트가 무슨 말을 하든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서운해할까 봐 답지 않은 노력을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노력도 정말 잠깐으로, 어느새 그는 옆에서 식사하는 아내를 챙기기에 바빴다.

그 둘 사이에서 낀 아나샤는 다시는 두 사람이 안 마주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말이다.

10장 겨울나기 (2)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할아버지에게 성을 구경시켜 주고, 연병장을 방문하고, 마을에 물건을 사러 가는 등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였지만, 아나샤로서는 그동안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기에 할아버지가 떠나던 날 아나샤는 못내 서운하기까지 했다.

할아버지를 배웅한 지 이틀이 흘렀지만 여전히 빈자리는 크기만 했다. 평소처럼 연병장에 놀러왔으나 조금 심심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런 아나샤의 귀에 재밌는 얘기가 들려왔다.

“사냥?”

“응. 성 뒷산에 가끔 사냥하러 가거든.”

언제 지루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아나샤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나도 갈래! 언제 가는데?”

“이번 주 휴일에. 근데 아샤… 너 가도 돼?”

정확히는 허락을 맡을 수 있겠냐는 뜻의 물음이었다. 벤자민은 아샤가 가고 싶다고 해도 공작님께서 절대 보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나 과보호가 심하신지 연병장에 잠깐 놀러가는 것도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로 못 나가게 하셨으니까.

물론 엄청 두껍게 입는 걸로 합의를 봤는지, 결국 하루도 안 되어 다시 연병장에 놀러올 수 있게 됐지만 말이다.

“확실히 말하지만, 공작님의 허락이 없으면 사냥에 안 끼워줄 거야. 우리도 괜히 공작님께 미움 사고 싶지 않다고.”

“미움뿐이겠냐. 성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를걸?”

웬일로 벤자민과 리암 두 사람의 의견이 맞는 순간이었다. 아나샤는 몰래 갈 생각은 없다며 툴툴대다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기다려. 당당히 허락 맡고 올 테니까.”

연병장을 벗어난 아나샤는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집무실로 달려가 문을 열자마자 외쳤다.

“리히! 친구들이 사냥 간다고 하는데 저도 가도 되죠?”

숨조차 고르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은 아나샤는 자리에서 일어난 리히르트에게 다가갔다.

“네?”

하고 다시 되묻자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안 됩니다.”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단호한 거절에 아나샤는 당장이라도 ‘왜요?!’ 하고 물을 것처럼 부릅 눈을 떴다. 이에 그의 입에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위험한 일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절대 위험한 일 아니에요. 그냥 토끼 같은 작은 산짐승 잡는 거라 하나도 안 위험해요.”

“일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곤 해도 산에서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리히르트는 두 손을 들어 찬 바람에 발갛게 물든 볼을 감쌌다. 언 뺨을 녹이는 따뜻한 손의 온기에 아나샤는 잠시 부루퉁하게 입만 내밀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위험의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보내주지 않을 것이란 건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아나샤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멀리 가는 거 아니고 성 뒤의 산속에만 있을 건데도 요? 저 정말 가고 싶은데 안 돼요?”

눈썹을 추욱 늘어뜨린 채 아나샤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 효과가 먹혔는지 그의 손끝이 꿈틀하는 게 느껴지자, 아나샤는 재빨리 밀어붙였다.

“주치의가 가벼운 운동은 좋다고 했단 말이에요.”

“가벼운 운동은 평소 하는 산책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산책은 답답하단 말이에요. 재미도 없구. 안 그래도 할아버지도 가버려서 심심한데… 정말 안 돼요?”

리히르트는 곤란한 듯 침묵을 지켰다. 안 그래도 그녀의 할아버지가 간 뒤로 그녀가 시무룩해 보여 무엇으로 기분을 풀어줘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정말정말 조심할게요. 저 혼자만 가는 것도 아니고 기사들도 같이 가는 거잖아요. 혹시라도 위험할 만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나무 위에 올라가서 대피할게요.”

나무 타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양 아나샤는 가슴 위를 통통 두드렸다. 나름 자신 있게 꺼낸 말이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고민하기만 했다.

결국 아나샤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가게 해주면 뽀뽀 백 번… 아니 천 번 해줄게요.”

“…….”

“이래도 정말 안 돼요, 여보?”

평소 쓰지 않던 낯간지러운 호칭을 쓰며 품에 안겨오는 아나샤의 행동에 리히르트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견딜 수 있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꼭 조심해야 합니다.”

리히르트는 옅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저번에 연병장에 못 나가게 했을 때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결국 흐지부지됐던 것으로 기억했다.

여전히 그녀가 찬 바람을 쐬는 것조차 못마땅했으나 그로선 말릴 방법이 없었다. 강경하게 나가자 마음먹어도 결국 그녀의 앞에선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릴 다짐이란 것을 알았다.

“조심할게요! 완전 사랑해요, 리히.”

그리고 이번 역시 똑같았다. 이어지는 뽀뽀 세례에 리히르트는 ‘그녀가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 * *

해가 저물어 가는 성벽의 뒤편 길은 어둑어둑했다. 거대한 뒷문을 향해 걸으며 아나샤는 기분 좋게 흥얼거렸다.

오늘 하루 얼마나 짜릿하고 즐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사냥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에 운 좋게 나타난 멧돼지를 잡았을 땐 기쁨에 방방 뛰어다녔을 정도였다.

친구들도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떠들기에 바빴다.

“진짜 그 장면을 다른 녀석들도 봤었어야 하는데! 아마 말해도 안 믿을걸?”

“난 아직도 저걸 어떻게 잡았는지 실감이 안 난다니까, 휘이.”

리암이 휘파람을 불며 산짐승들이 가득 실린 수레 위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눈에 띌 만큼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샤의 공이 컸지. 원래도 잘 던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도 진짜 아샤 실력에 감탄했다니까. 나무 위에서 단검을 던져서 멧돼지 눈에 명중시켰을 땐… 크흐!”

“역시 황실 기사단 출신은 다르십니다!”

“흠흠, 뭘.”

친구들의 칭찬 세례에 아나샤는 으쓱하며 코밑을 문질렀다. 떠드는 사이 어느덧 성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나샤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재차 얘기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너네가 잡은 거다. 나는 토끼만 잡은 거야.”

“물론입죠. 마님은 토끼만 잡은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벤자민이 실실 웃으며 능청맞게 굴자 아나샤는 질색했다.

“너 진짜 얄밉다. 아무튼 비밀이야.”

“걱정 마십쇼. 제가 입 하나는 무겁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쉿, 말하지 마.”

“예예~ 안 말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쇼. 멧돼지 잡았다는 얘기가 공작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는 죽은 목숨…….”

“아니, 그만 말하라고…….”

아나샤가 다급하게 팔꿈치로 벤자민의 배를 쳤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멧돼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저음의 목소리에 주위가 싸늘하게 변했다. 벤자민은 딱딱하게 굳은 채 동쪽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계셨던 것인지 공작님께서 멀찍이 떨어지셔서 이곳을 보고 계셨다.

서느런 눈길이 수레에 실린 멧돼지 위에 정확히 머무르자 기사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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