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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72화 (72/87)

72화

“…그런데 공작 마님, 실례가 안 된다면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마침 심심했던 아나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에 마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근 들어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혹시 저번에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싶어서요.”

“헉, 티 났어요……?”

아나샤는 되레 놀란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마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뺨을 작게 긁적이며 민망한 듯 웃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구… 그냥 좀 서운한 일이 있었거든요. 괜찮다면 들어주시겠어요?”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샤는 냅다 의자에 마리를 앉혔다. 나란히 마주 보고 앉기 무섭게 아나샤는 구구절절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곳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제가 공작 부인이라는 걸 안 이후로 저를 불편해하더라고요.”

“…그 친구들이라는 게 혹시 기사분들이신 건가요?”

“헉, 맞아요. 마리… 혹시 독심술 같은 거 할 줄 아세요?”

그 진심 어린 물음을 마리는 농담으로 알아듣고 “그럴 리가요.” 하고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나샤는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어 말했다.

“처음부터 공작 부인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제 잘못도 있지만요… 뭔가 그 친구들은 알아도 그냥 한 번 놀라고 말 뿐이라고 여겼어요.”

“…….”

“평소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거랑 다르게 돼서 서운한 거 있죠.”

말이 길어질수록 아나샤의 표정과 목소리엔 점점 힘이 없어졌다. 살짝 눈을 내리깐 채 아나샤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음 같아선 다시 전처럼 지내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조심스럽더라고요. 물론 그건 핑계일지도 모르겠어요.”

“…….”

“사실은요… 또 연병장에 갔는데 다들 저를 불편하게 여기면 어쩌지, 그런 생각 때문에 두려워서 못 가고 있어요.”

힘없이 웃는 모습에 마리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괜히 섣부른 말을 해봐야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상하죠? 공작 부인이 되면 더 당당해질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더 위축되는 거 같아요.”

아나샤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답지 못한 모습에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털어놓으니까 속이 시원해진 것 같아요. 걱정할까 봐 리히한테도 못 털어놨거든요. 들어줘서 고마워요, 마리.”

그 티 없이 맑은 미소에 마리는 괜히 마음이 안 좋아졌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걸요. 제대로 위로도 못 해드렸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들어주셨잖아요. 그리고… 아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셨을 때 솔직히 조금 감동했어요.”

수줍게 털어놓으며 아나샤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시녀분들이랑도 더 친해지고 싶어요. 루시가 절 대하는 것처럼 다들 편하게 저를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다들 곤란해하겠죠?”

“네, 아무래도 시녀장님께서 엄격하시니까요…….”

전속 시녀가 되기 전부터 공작 마님과 알고 지냈다는 루시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듣기로는 공작 마님 덕분에 공작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하니 말이다.

“저 그러면, 아샤 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공작 부인을 차마 이름으로는 부르진 못해도, 님 자를 붙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마리의 말에 아나샤는 대번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죠. 딱딱한 마님보다 훨씬 좋은걸요!”

그 기뻐 보이는 모습에 마리도 덩달아 마음이 따스해졌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마주 본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샤, 안에 있는 거예요?”

“아, 루시!”

뒤늦게 루시가 찾아오자 아나샤는 루시도 끌어들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던 세 사람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동쪽 끝에 위치한 연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성 부지의 어디에 있다는 얘기만 들어봤지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색하게 연병장 입구 앞을 서성이던 마리는 마침 입구로 나오는 주홍색 머리의 남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 혹시 실례지만, 공작 마님과 친하게 지내던 기사분들이 누군지 아시나요?”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면, 저인데요?”

벤자민은 얼떨떨한 얼굴로 멈춰 서서 말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옅은 기대감이 어렸다.

“혹시 공작 마님께서 찾으시는……?”

“아니요. 아샤 님과는 상관없이 저 혼자 개인적으로 찾아온 거예요.”

마리의 단호한 말에 벤자민은 “아, 그렇군요…….” 하고 말끝을 그렸다.

“다름이 아니라, 기사분들께서 공작 마님에 대해 오해하고 계신 걸까 봐 말씀드리러 온 거예요.”

“어떤 오해를……?”

“아샤 님이 신분을 감춘 채 기사분들과 친해지셨다고 들었어요. 신분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사이가 어색해져서 무척 서운해하고 계시고요.”

마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일개 시녀일 뿐인 자신이 이렇게 참견해도 되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되시기 전에는 그분도 평민이셨고, 아직까지도 평민 생활에 익숙하신 것뿐이세요. 기사님을 기만할 목적으로 신분을 감추신 건 결코 아닐 거예요.”

“그거야… 저도 잘 알아요. 친해지는 동안 그렇게 느꼈는걸요.”

목 뒤를 문지르며 벤자민은 말했다.

아샤가 신분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아랫사람에게 권력을 부리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높은 지위에 지레 겁먹고 거리를 둔 것은 자신들 쪽이었다.

“그럼 예전처럼 다시 지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 그러고 싶죠! 만나고는 싶은데 찾아갈 신분이 안 되니까… 아샤, 아니 공작 마님께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엔 미안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머뭇거리던 벤자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 마님의 시녀라고 하셨죠? 죄송하지만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저번엔 우리가 너무 과하게 행동한 것 같다고, 서운했다면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저희 모두 민망해하고 있다고…….”

“…….”

“그리고 언제든 좋으니까 꼭 와달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도요.”

마리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얼굴이 벌써부터 떠오른다는 듯이 말이다.

* * *

세상은 완전히 겨울에 들어섰다. 한동안 월동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성내에는 한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이에 맞춰 반가운 손님이 공작성을 방문했다.

“할아버지!”

성의 안주인, 아나샤는 직접 밖으로 달려 나가 아버트를 맞이했다.

아버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두 팔을 벌려 아나샤와 포옹했다. 결혼 소식을 접하고 한 달 만에 부랴부랴 공작령으로 달려온 그는 오랜만에 보는 손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이고, 녀석. 안 본 새에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반쪽이 됐어.”

“할아버지는 얼굴이 더 커진 것 같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를 보며 아나샤는 키득거렸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 차곡차곡 쌓이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짐이라고 하기엔 너무 화려한 상자들이었다. 안 내린 물건들이 더 있는지 시종들은 마차에서 물건들을 내리느라 바빠 보였다.

“설마 선물이야?”

“다 너랑 아기 선물이다. 그놈 건 하나도 없어.”

“그놈이라니…….”

아나샤가 샐쭉한 표정을 짓든 말든, 아버트는 ‘그놈’으로 아예 호칭을 정한 듯 말을 이었다.

“그놈 좀 봐야겠다. 그놈이 얼마나 못하면 네가 이렇게까지 빼짝 마르겠냐!”

“리히 탓 아니야! 입덧 때문에 잘 못 먹어서 그런 거지……. 그래도 요즘에는 좀 나아져서 많이 먹는다고.”

“따지고 보면 다 그놈 탓인데 뭐가 아니야. 벌써부터 남편이라고 감싸주기나 하고… 크흠!”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크게 헛기침을 하는 아버트를 아나샤는 성안으로 이끌었다.

“춥다, 얼른 들어가자! 할아버지.”

지금 할아버지와 리히가 마주쳐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리히가 내려오기 전에 먼저 할아버지를 객실로 데려갈 생각으로 아나샤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성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복도를 가로질러 오던 리히르트와 딱 마주쳐 버렸다.

리히르트는 아나샤를 한번 바라봤다가 그녀 곁에 서있는 아버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이렇게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

아버트는 넉살 좋은 미소를 띠었으나 실상 하는 말은 ‘네놈이 빨리 사고 친 덕분에 이렇게 또 보는구나.’라는 비꼼에 가까웠다.

“제가 한 달간은 거의 병석에 누워있다시피 해서 축하가 늦었습니다. 제 눈엔 아직도 어려 보이는 손녀가 갑자기 결혼을 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졌다고 하니 순간 눈앞이 깜깜해서 쓰러졌지 뭡니까! 다행히 죽지는 않아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가능했지요. 허허.”

“할아버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나샤는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분명 영지 일 때문에 바쁘게 지내고 있다고 일주일마다 안부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여전히 훤칠하신 게 식사는 잘하고 계신가 봅니다. 제 손녀는 아주 반쪽이 되었는데, 허허허! 똑같이 반쪽이 되셨으면 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웃는 낯으로 신랄하게 말을 뱉어대는 할아버지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아나샤가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난처한 표정을 짓자 리히르트는 먼저 나서 말을 꺼냈다.

“찾아뵙지 않고 갑작스럽게 결혼을 진행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허허!”

“면목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리실 수 있다면 기꺼이 몇 대 정도는 맞겠습니다.”

“허허허! 그리 말씀해 주시니 그럼 사양 않고 간만에 실력 발휘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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