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기사들은 휴식 중 찾아온 아나샤를 반갑게 맞이했다. 리암과 싸우던 벤자민도 빠르게 달려와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받아 대신 들어주었다.
“아샤가 간식 가져왔답니다!”
“간식이라고?”
“오, 고맙다. 잘 먹을게.”
다가온 기사들은 나무 아래에 앉아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쿠키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아나샤도 그들 사이에 앉아 쿠키를 먹었다. 주방장 밀론의 수많은 실패와 혼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쿠키였다. 밋밋한 맛이기는 했지만 먹다 보면 고소해서 씹는 맛이 있는 데다 건강에도 좋았다. 무엇보다 입덧 중에도 먹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아샤, 너 공작 마님의 시녀야?”
그때였다. 옆에서 대뜸 묻는 말에 아나샤는 콜록하고 사레에 들리고 말았다.
다행히 리암이 건네준 물을 두세 모금 마시자 빠르게 진정되었다. 사레가 멈추자 곧바로 양옆에서 질문 세례가 쏟아져 왔다.
“공작 마님에 대해 알면 어떤 분인지 좀 얘기해 주라!”
“맞아, 궁금해 죽겠다고. 수도에서 오신 거면 어느 가문의 영애이신 거야?”
“외모는? 공작님도 기가 막히게 잘생기셨으니 분명 엄청 아름다우신 분이겠지?”
그 질문들에 아나샤는 난처한 듯 뺨을 긁적였다. 기대 어린 얼굴들을 보니 정말 자신이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할 말을 고르던 그녀는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환상을 깨서 미안한데… 사실은 내가 공작 부인이야.”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 옆에서 푸하하하 하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벤자민은 올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배를 부여잡고 웃기까지 했다.
“나도 안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크게 웃을 필욘 없잖아.”
아나샤가 툴툴대며 말하자 그제야 견습 기사들은 웃음을 멈췄다.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진지한 아나샤의 태도에 괜히 미안해진 것이다.
“아니… 우리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웃은 게 아니라…….”
가장 크게 웃은 벤자민이 뒤늦게 수습하려고 했지만, 아나샤는 단단히 삐친 얼굴이었다.
“됐어. 난 말했다?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아냐아냐, 믿어.”
“맞아. 정말 믿어.”
전혀 믿지 않는 눈빛으로 말해 봤자였다. 그들을 째릿 쏘아본 아나샤는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정말 공작 부인이었냐고 까무러치게 놀라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나샤가 연병장 밖으로 나가자 벤자민이 뒤늦게 그녀를 쫓아왔다.
“아, 아샤. 벌써 가게?”
“리히 보러 갈 거야.”
‘리히? 강아지 이름인가?’ 벤자민은 갸웃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웨일그레슬 공작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 * *
“에취!”
“뭐야, 아샤 감기 걸렸어?”
아나샤의 곁에 다가온 벤자민이 팔뚝을 문지르며 말했다. 제국의 북쪽 끝에 위치한 땅이라 그런지 겨울은 빠르게 찾아왔다. 어제보다 뚝 떨어진 기온에 이제 겨울에 접어들었다는 실감이 났다.
“킁, 아침에 열이 조금 나긴 했는데…….”
“몸도 안 좋은데 왜 놀러왔어.”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고서 리암이 한 소리 하자, 지나가던 루카스도 힐끗 돌아보았다.
“콧물 나온다.”
루카스의 말에 아나샤는 코를 크게 훌쩍였다. 벤자민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추운 데 있으면 감기 더 심해질걸? 성에 들어가지 그래?”
“어차피 곧 들어갈 거야. 심심해서 잠깐 나온 거라.”
“근데 시녀 일 정말 좋나 보다? 일하는 도중에도 이렇게 막 나와도 되고, 심심할 정도면 할 일도 없나 본데?”
“진짜…, 나 공작 부인이라니까? 아직도 안 믿네.”
“아 그래그래, 마님이셨지. 잠깐 잊었어.”
그 진정성 없는 대답에 아나샤는 잠시 쏘아볼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몇 번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이젠 포기한 것이다.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아나샤는 견습 기사들과 서서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었다. 장난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흐를 때였다.
“헙!”
가직한 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나샤는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연병장으로 들어서는 이를 발견하자 아나샤 또한 작게 숨을 들이켰다.
멀리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훤칠한 백금발의 사내는 웨일그레슬 공작이었다. 언제 떠드느라 모여있었냐는 듯이 견습 기사들은 바짝 기합이 들어간 얼굴이었다.
아나샤만이 지레 찔린 얼굴로 서있을 뿐이었다.
“…….”
리히르트는 멀리 있는 아내를 발견하기 무섭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아픈 몸으로 방 밖을 나갔다는 보고를 듣고 급하게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이곳에도 없다면 사병들을 풀어 성 전체를 뒤지려 한 그였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재빠르게 아나샤가 서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침실로 데려갈 듯한 태세에 아나샤는 먼저 선수 치듯 말했다.
“리히가 나가고 계속 누워있다가 괜찮아져서 잠깐 나온 거예요. 10분만 있다가 바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리고 열도 가라앉은……. 에취!”
커다란 기침 소리에 대번에 그의 표정이 짙은 걱정으로 어둡게 물들자 아나샤는 낭패 어린 기색을 띠었다. 괜찮아진 것 같다는 말은 이제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역시나 아나샤는 곧바로 그의 품에 안겨 연행되었다. 그 갑작스러운 연행에 아나샤는 놀라 벙 쪄있는 친구들을 살필 수도 없었다.
* * *
‘아샤가 공작 부인이라니…….’
벤자민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사건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휴식 시간 중에 정말이지 갑작스럽게도 공작 각하께서 연병장을 방문하셨다. 얼떨결에 존경하던 분을 가까이에서 뵌 것도 놀라운데, 제 옆에 있던 아샤를 안아 데려가셨다.
품에 안긴 채 뭐라뭐라 얘기하는 아샤도, 묵묵히 들어주며 걸음을 옮기는 공작 각하도 익숙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누가 봐도 부부 사이라는 듯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요상하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벤자민은 입만 떡 벌렸었고 말이다. 다른 기사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표정들이었었다.
그리고 그때의 충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왜 다들 말이 없어?”
오늘도 휴식 시간에 맞춰 나타난 아나샤를 눈앞에 두고서 벤자민은 선뜻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든 탓이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참 나, 뭘 이제 와서 새삼스레 처음 알게 된 것처럼 굴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지 아나샤는 부러 크게 툴툴댔다.
“난 저번부터 계속 말했거든? 내가 공작 부인이라고.”
“그거야… 그때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죠.”
벤자민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곁에 서있던 리암이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땐 미안했습니다… 그동안 무례하게 군 것도……. 야야, 너네도 사과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뒤따라 루카스와 렉스, 다른 견습 기사들도 하나둘 머리를 숙여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 사과 행렬에 아나샤는 금방이라도 놀라 펄쩍 뛸 것 같은 얼굴로 당황해했고 말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어색한 기류가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스스로도 잘하는 짓인지 알 수 없어 벤자민은 괜스레 뒷목을 긁적였다.
그는 힐끗 맞은편에 홀로 서있는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아샤는 평소와 같았다. 그동안 연병장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모습 그대로, 겨울용 망토를 두른 편한 바지 차림이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평소처럼 대하기가 힘들었다. 지위를 알게 되니 친한 여자애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 아니 저희가 너무 짓궂었었죠? 하하… 그보다 몸은 괜찮은……?”
“몸은 괜찮아.”
답지 않게 뭐 하는 거냐며 기겁할 거라고 여긴 것과 달리, 아나샤의 반응은 잠잠했다. 그저 간식이 담긴 바구니를 제게 건네주며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이거 주러 온 거야. 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렇게 말한 아나샤는 발걸음을 돌려 연병장을 나섰다.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뒷모습에 벤자민은 못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공작 부인의 전속 시녀 중 한 명인 마리는 최근 들어 고민이 생겼다. 요즘 부쩍 기운이 없으신 공작 마님 때문이었다.
주위에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듯 밝게 행동하신다지만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특정 시간만 되면 공작 부인께서 축 처져 창문만 보신다는 걸.
아마도 매일 놀러가던 연병장에 가지 못해 그러는 것 같다고 루시는 추측했고 말이다.
왜 가지 못하게 됐는지 마리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순 없었지만, 하루빨리 해결되길 바랄 뿐이었다.
공작 부인의 시중을 들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마리는 공작 부인이 좋았다.
몇 번 실수해도 한 번 나무라기는커녕 천천히 해도 된다며 따뜻하게 웃어주시고, 항상 시녀들에게도 간식을 같이 먹자고 얘기해 주시는 분이었다.
처음엔 같이 앉아 디저트를 먹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공작 부인의 디저트 타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될 정도였다.
전속 시녀들과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그녀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무뚝뚝한 성격이기에 평소 고마움을 표현하진 못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공작 부인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리는 오늘도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물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맡은 일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리는 침구 정리를 끝내고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았다. 커튼을 친 후 침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마침 침실 안으로 들어오던 아나샤와 마주치자 마리는 걸음을 멈췄다.
“아, 혹시 정리 중이었어요?”
“아니에요. 다 끝났어요.”
“오늘도 고마워요, 마리.”
“별말씀을요.”
마리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매번 사소한 것에도 고맙다고 하는 다정한 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정말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마리의 마음속에서 작은 용기가 불쑥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