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많이 졸립니까?”
“아뇨, 그렇게 안 졸려요.”
“그럼 식사만 하고 잡시다.”
그녀에 관해서라면 모든 일에 관용적인 리히르트가 딱하나 칼같이 지키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끼니였다.
안 그래도 너무 마른 몸이었다. 조금 더 지나면 점점 배가 불러올 텐데 벌써부터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그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리히르트가 아나샤를 안아 침실로 이동한 사이, 루시는 밖으로 나와 주방에 말을 전했다.
반시간 정도 지나 주방장이 직접 트레이를 밀며 공작 부부의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옆 둥근 테이블 위에 접시와 은제 식기가 빠르게 놓였다. 주방장은 트레이 칸마다 놓여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선보이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일 만큼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에 아나샤는 밝은 얼굴로 스푼을 움직였다.
“웁…….”
그러나 몇 번 씹기 무섭게 아나샤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해가자 리히르트는 곧바로 음식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문밖으로 사라지는 음식들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아나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점심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는 동안에도 요리를 먹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동시에 아나샤는 주방장을 볼 면목이 없었다.
“미안해요. 기껏 맛있는 음식 만들어 주셨는데 또 한 입도 못 먹고…….”
“아닙니다, 공작 마님!”
주방장 밀론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입덧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원하시는 요리가 있으실 때 언제든 말씀만 해주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개 드세요! 그리고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아나샤가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미소 지어 보이자, 밀론은 고개를 들며 따라 따스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 리히도 얼른 저녁 식사 해요. 배고프잖아요.”
“아까 전에 먹고 와서 괜찮습니다.”
“그랬어요?”
쉽게 납득하며 넘어가는 공작 마님의 모습에 밀론은 ‘마님, 거짓말입니다!’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작 마님이 입덧하시는 날에는 본인도 한 입조차 안 드시는 공작 각하였다. 항상 마님이 먹는 모습부터 보고 드시는데 먼저 먹고 왔을 리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입덧이 계속 심해진다면…….
‘분명 식음 전폐하시겠지.’
훤히 보이는 미래에 밀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 두 분이 같이 쓰러지시는 게 아닌지 불안과 걱정이 치밀었다.
반드시 심한 입덧에도 드실 수 있는 요리를 찾아내야 했다. 밀론은 무거운 사명감을 안은 채 공작성의 주방으로 돌아갔다.
* * *
공작성에서의 아나샤의 일과는 대략 이러했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리히르트와 이른 점심 식사를 한다. 이후 그의 집무실에서 낮 시간대를 함께 보내다가 낮 세 시쯤 성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황혼 무렵에야 공작 부부의 방으로 향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도 나름의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아나샤는 성 최상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무실 한가운데에 큼지막하게 놓인 마호가니 책상은 내버려 둔 채 리히르트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기다란 티 테이블 위에는 찻잔 대신 가문 도장과 잉크병 등 업무 처리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들이 놓여있었다. 업무를 보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환경이었으나, 리히르트는 매일같이 이 자리를 고집했다.
다름 아닌 매일 이 시간마다 낮잠에 드는 아내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
따뜻한 집무실 안에서 울리는 고른 숨소리는 늘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리히르트는 손에 든 서류에서 눈을 떼고서 조용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옆으로 돌아누운 아내의 얼굴을 보는 그의 얼굴에선 잔잔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리히르트는 한 손을 내려 그녀의 뺨 위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조심스럽게 귓등을 따라 넘겨준 순간이었다.
“으응.”
그 작은 접촉에 아나샤가 얼마 안 가 부스스 눈을 떴다.
“…리히. 몇 시예요?”
“두 시입니다. 아샤, 더 자도 됩니다.”
“아니에요. 리히 덕분에 푹 잔걸요. 하암.”
하품을 터뜨리고서 아나샤는 정면을 올려다보았다. 다정한 빛을 띠는 푸른 눈과 마주한 채 잠이 덜 깬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심심했죠? 매일 저만 자서 미안해요.”
“오히려 제가 미안합니다. 편하게 침실에서 자도 되는데 저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니…….”
“그거야 뭐, 리히랑 같이 있고 싶기도 하고, 여기 무릎베개가 워낙 훌륭해서 낮잠 자기에 딱인걸요.”
그렇게 말한 아나샤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피곤하면 리히도 잠깐 눈 붙일래요?”
리히르트는 제 뺨에 닿은 작은 손을 잡아 떨어뜨리고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손바닥 안쪽에 입술을 묻으며 속살거렸다.
“그대가 세상모르게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면 피로가 다 풀려서 말입니다.”
“그럼 앞으로도 열심히 자야겠어요.”
손바닥 위로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아나샤는 작게 키득거렸다. 커다란 손에 잡힌 손을 쏙 빼내고서 그의 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히 몸에서 좋은 향이 나서 더 잠이 잘 오는 것 같아요.”
그러곤 장난기가 돋은 얼굴로 베고 있는 허벅지 위에 코를 묻었다.
“혹시 뭐 숨겨놓은 거 아니죠?”
살짝 상체까지 일으키고선 향기의 근원을 찾듯이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아나샤는 더욱 열심히 코를 움직였다.
그녀의 코가 막 허벅지 안쪽을 넘어오기 시작할 때였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누르듯 덮어왔다. 아나샤는 더 이상 고개를 들이밀지 못하고 수색을 종료해야만 했다. 뒤늦게 손이 거둬지자 아나샤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드물게도 성마른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보였다. 묘하게 상기된 낯빛과 달아오른 귓가가 자신이 그의 무언가를 건드려 버린 게 확실해 보였다.
아나샤는 뒤늦게 그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따라붙은 손은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 뒤를 안아 바짝 당겨왔다. 아나샤는 다시 어정쩡하게 그의 허벅지를 짚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가 뭘 원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나샤는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넓은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이제 됐죠?”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왠지 부끄러움이 밀려와 아나샤의 뺨이 살며시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은 풀릴 줄 몰랐다.
“…아샤.”
리히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은 당장이라도 입술을 머금을 것처럼 그녀의 아랫입술을 톡 건드려 댔다. 마치 열어달라는 듯이.
평소라면 3초도 안 되어 유혹에 넘어갔을 아나샤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고개를 돌리고서 작게 말했다.
“안 돼요. 여기는 일하는 공간이잖아요.”
아나샤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구는 이유라면 있었다.
과거 기사단 단장실에서 한번 키스를 한 이후로 틈만 나면 쪽쪽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었다. 그 결과 리히는 업무 소홀을, 자신은 삼촌에게 들켜 창피를 당했었고 말이다.
과거의 일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것에도 말입니까?”
“물론이죠. 장소를 구분해서 해야죠.”
그 타박 아닌 타박에 리히르트는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었다. 닿을락 말락 하던 그의 입술이 순순히 물러나자 아나샤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말 잘 듣는 남편만큼 귀여운 것도 없는 것이다.
“착하죠? 대신 이따가 침실에서 많이 해줄게요, 네? …잠깐, 리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히르트는 그녀를 안아 든 채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가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나샤가 “지금 말고 이따 저녁요!” 하고 외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환한 대낮부터 공작 부부의 침실에선 쪽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 * *
공작성의 기사들 중에서 ‘아샤’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단검 던지기 내기를 하며 견습 기사들과 친해지더니 매일같이 연병장을 들락날락하는 그녀를 이제는 모두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워낙 자연스럽게 친해진 탓일까, 기사들은 그녀의 정체에 아무런 의문조차 갖지 않았다. 알게 된 지 2주가 다 돼가도록 말이다.
“근데 아샤는 성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그렇기에 리암이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의 파장은 컸다.
“누구 여동생 아니었어?”
“저만한 여동생이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나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녀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성에서 사람을 뽑았었나?”
견습 기사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물었으나 확실한 답을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어떻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짙은 의구심이 든 벤자민은 실없는 가정 하나를 떠올렸다.
“유, 유령 아냐?”
“저 멍청이랑은 대화를 하지 말아야지.”
리암의 한심한 어조에 벤자민은 곧바로 리암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멱살을 잡는 동안 기사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 공작 마님이랑 같이 온 시녀가 아닐까?”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렉스의 말에 다들 제법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아샤한테 공작 마님에 대해 물어보면 되겠네.”
“진짜 궁금했는데 드디어 알겠네. 어떤 분이실지.”
웨일그레슬 공작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만큼 공작 부인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공작께서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성안에 꽁꽁 감춰두기만 하셔서 더욱 궁금증은 컸다.
두 분의 금슬이 몹시 좋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이 어떤 분이신지,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지, 성의 구석에 위치한 연병장에서 종일을 틀어박혀 있는 기사들로서는 알 턱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자가 연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언제 오나 했더니, 손에 그건 뭐야?”
“간식 좀 들고 왔어. 친구들한테 나눠준다고 했더니 엄청 많이 만들어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