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69화 (69/87)

69화

“삼촌이 우니까 나도 갑자기 울 거 같잖아!”

언제 차분했냐는 듯이 아나샤가 바락 외쳤다. 그리고 삐죽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밀어 넣고서 툴툴거렸다. 평소의 아나샤다운 모습이었다.

“가서 영영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울어… 정말.”

아나샤는 양옆에서 들려오는 훌쩍거리는 소리에 함께 코를 훌쩍였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소리 없이 다가와 제 왼손을 감싸왔다.

바로 옆에서 자신의 손을 꽉 잡아주는 리히르트의 손은 따뜻했다. 그 든든한 온기에 의지한 채 아나샤는 기사들과 마저 씩씩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꼭 돌아오는 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아샤.”

“네가 그리울 거야, 이 친구야.”

엘빈과 악수를 나누고서 아나샤는 제 곁으로 다가온 부단장 칼리프를 돌아보았다.

“아나샤 경, 경이 없는 동안은 술친구가 없어 조금 심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오면 맥주 한턱 쏠게요. 그리고 아샤 경이라고 불러달라니까 정말 끝까지……!”

“다음에 만났을 땐 그렇게 불러드리죠.”

깐깐하기 그지없는 부단장에게서 너그러운 대답을 들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정말이죠? 약속했어요!”

“경이나 한턱 쏜다는 약속 잊지 마십시오.”

아나샤는 그와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몸을 돌렸다. 기다려 주고 있던 리히르트에게 다가가 다시 그와 손을 붙잡고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문 앞에는 크리스가 서있었다. 크리스가 문을 열라고 신호를 보내자 곧 두 문이 활짝 열렸다.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바깥은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아나샤가 리히르트와 함께 막 문을 나선 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꽃잎들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아나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 옆에 늘어선 기사들은 바구니에 담긴 꽃잎들을 허공에 높이 뿌려댔다. 아나샤는 꽃잎들을 맞으며 공작 가문의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리히르트의 손을 붙잡고서 아나샤는 화려한 마차 위에 올랐다. 그리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서 그리울 얼굴들을 하나하나 시야에 담았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요!”

화창한 가을 햇살 아래, 아나샤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사단의 말괄량이가 기사단을 잠시 떠나는 날이었다.

10장 겨울나기 (1)

제국의 북부에 위치한 공작령.

국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을 등지고 펼쳐지는 평야 지대는 드넓었다. 그 위로 흐르는 큰 강줄기 너머에는 고결하리만치 새하얀 성이 세워져 있었다.

높이 세워진 성을 중심으로는 긴 성벽이 둘러져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북방 이민족의 침탈을 막아온 성벽은 어느 벽보다도 견고하고 드높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민족의 침략이 잦은 곳이었으나, 시간이 흐른 현재 성벽 밖은 평화롭기만 했다.

일찍이 공작 위에 오른 현 웨일그레슬 공작이 4년간의 크고 작은 토벌 작전을 벌여 이룩한 성과였다. 섬멸에 가까운 전과를 번번이 거두자 주변 이민족들은 감히 그의 영토에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벌써 6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웨일그레슬 공작의 무용담은 영지민들 사이에서 영웅담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작 가문의 사병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많았다. 영지 안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크면 기사가 되길 원할 정도로.

벤자민 피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올해 열아홉 살인 벤자민은 공작성의 사병으로 입단한 지 일 년째 되는 견습 기사였다.

3년 안에 공작에게서 직접 기사 위를 서임받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입단했으나, 벤자민이 입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일그레슬 공작은 기사단장직을 위해 수도로 떠나버렸다.

존경하던 이를 앞으로 수십 년 뒤에나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좌절한 것이 약 9개월 전 일이었다.

일주일 전 갑작스럽게도 웨일그레슬 공작이 돌아왔다. 그것도 회임하신 공작 부인과 함께.

“서임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의 뜻이 아닐까.”

“아직도 그 소리냐.”

앳된 티가 남아있는 갈색 머리 청년, 리암이 한심한 눈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 봐. 갑자기 돌아오셨다고!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

“네 서임 때문에 오신 게 아니라 결혼 때문에 내려오신 거잖아.”

“어찌 됐든 간에 기회는 기회인 거잖아? 결심했어. 내년에는 꼭 기사 서임을 받고 말겠어.”

“나도 아직 못 이기면서 서임식은 무슨. 꿈도 크다.”

“지금부터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부터 노력하는 걸로 될까, 뭐 응원은 할게.”

“야! 너 자꾸 초칠래?”

발끈한 벤자민은 리암에게 달려들었다. 숙여진 리암의 목을 팔로 감싸고서 사정없이 조를 때였다.

“야! 거기 벤! 리암!”

견습 기사들 중 한 명인 렉스가 그들을 불렀다.

“지금 엄청난 내기 중이니까 너네도 와라!”

“내기?”

벤자민이 팔에서 힘을 빼자, 리암이 곧바로 빠져나왔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는지 연병장 담장 밖에선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단검 던지기 내기인데, 루카스 녀석보다 더 잘 던지는 애가 있다니까!”

그 흥분이 어린 목소리에 리암이 먼저 흥미를 보였다. 그들은 연병장을 벗어나 담장 주위로 우거져 있는 나무들 사이로 들어섰다.

“믿는다, 루카스!”

“아직 역전할 수 있어!”

“신중하게 던져라!”

둘러싸듯이 서있는 견습 기사들 너머로 큰 키의 잿빛머리 사내가 보였다. 루카스였다.

“상대는 누구…….”

뒤늦게 벤자민은 그 옆에 서있는 웬 여자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외모, 단발보다 살짝 기른 검은 머리, 집중한 듯 옹다문 입술.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편한 바지에 두꺼운 모직 망토를 두른 차림이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땐 평범한 또래 여자애였지만, 실력만큼은 전혀 평범하지 못했다.

쉭,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나무 표면에 빼곡히 꽂혀있는 단검들의 정중앙에 꽂혔다.

“봤지?”

씩 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여자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이번 판도 내가 이겼으니 총 6실루나지? 뭐, 나도 재밌었으니까 그냥 5실루나만 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무 중앙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루카스는 곧 순순히 5실루나를 건네었다.

“…너 내일도 나와라.”

이제껏 단 한 번도 단검 던지기 내기에서 져본 적이 없는 루카스였다. 검술보다 단검 던지기에 더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여길 만큼 전승 무패의 기록을 가진 그였으나, 오늘 그 기록이 깨졌다.

자존심에 금이 갔는지 뚱한 얼굴로 서있던 루카스는 내일도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몸을 돌렸다.

그가 자리를 벗어나자 견습 기사들은 모두 여자에게로 몰려들었다.

“루카스를 꺾은 건 이제까지 네가 처음이야!”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제국의 숨은 단검 던지기 고수 그런 거야?”

“내일도 너한테 돈 걸게. 잘 좀 부탁한다.”

“믿겠습니다, 선생님!”

당연히 벤자민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짜 대단하더라!”

견습 기사들의 칭찬을 우쭐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여자는 그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흥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연이어 꽂혀 들어왔다.

“이제까지 단검 던지기 내기는 여러 번 봐왔지만 너 같은 실력자는 처음이야. 어떻게 저기 가운데에다 딱 맞히는 거야?”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원하면 나중에 비결 정돈 가르쳐 줄게.”

“정말? 아, 내 이름은 벤자민 피트야. 벤이라고 불러.”

주홍색 곱슬머리를 가진 앳된 얼굴의 남자가 손을 내밀자 여자는 곧바로 손을 마주 잡았다.

“난 아나샤. 편하게 아샤라고 불러줘.”

* * *

“아샤, 일찍 들어온다고 했잖아요!”

아나샤가 방에 들어서자 루시가 빠르게 담요를 들고 다가왔다. 공작 저택에서 시녀로서 일하던 루시는 아나샤를 따라 공작령에서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현재는 공작 부인의 전속 시녀로서 아나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손이 엄청 차잖아요. 날도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구요.”

“미안해요. 그치만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걸요.”

아나샤는 모피 담요에 둘러싸인 채 조그맣게 변명했다. 그동안 루시는 다른 시녀들에게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했다.

“오늘은 어딜 다녀온 거예요?”

“성안에 있는 연병장에 가봤어요. 안에는 안 들어가고 담장 근처에서 기사들이랑 얘기만 나눴어요. 아 그리고 내기에서 이겨서 5실루나 땄어요.”

주머니에서 동전 다섯 개를 꺼내 보이며 아나샤는 이따 리히에게도 자랑해야겠다며 흥얼거렸다.

목욕물이 채워지자 아나샤는 방과 이어져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대리석이 깔린 화려한 욕실 풍경은 공작성에서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동시에 제 곁에 다가와 옷을 벗겨주는 시녀들의 손길도 말이다.

부끄러운 기분은 은은한 향기가 나는 욕조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라졌다. 온몸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피부에 좋은 마사지까지 받고서 아나샤는 욕실을 나왔다. 시녀들이 입혀주는 대로 입고서 화장대 앞에 앉아 얌전히 머리를 말렸다.

아나샤는 이 시간이 좋았다. 공작 부인을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도 최고였어요…….”

뽀송뽀송하게 머리를 말린 아나샤가 몽롱한 얼굴로 말하자 시녀들은 작게 웃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공작 마님.”

시녀들이 방을 나서자 아나샤는 소파에 편히 몸을 기댄 채 루시와 대화를 나누었다. 루시의 잔잔한 목소리에 조금 졸려온다 싶더니 어느샌가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그렇게 몇 분을 잠들어 있었을까.

귀를 두드리는 낮은 목소리에 아나샤는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조명을 받아 하얗게 물든 백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나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리히. 언제 왔어요?”

“방금 왔습니다.”

넓은 어깨를 지나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아나샤가 매달렸다. 소파 위를 덮듯이 몸을 숙이고 있던 리히르트는 두 팔로 그녀의 엉덩이 아래를 감싸 그대로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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