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널찍한 품에 갇힌 채 아나샤는 그의 등에 얹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리히가 이 사실을 어디서 들었을지.
보나 마나 자신이 임무에 나간 사이 크리스 삼촌이 임신 사실을 폭로한 것일 테다. 그 사실에 격분한 삼촌들이 리히에게 달려들었다고 하면 앞뒤가 딱 들어맞는 것이다.
“삼촌들이 그런 거죠? 제가 삼촌들 혼내줄게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리히.”
아나샤는 자신보다 큰 사내의 등을 안아주며 그를 달랬다.
얼마 안 가 그가 눈물을 그치자 아나샤는 일단 그를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던져놓은 옷가지들로 너저분한 바닥을 보여 창피했지만, 아나샤는 애써 모른 체 굴었다.
벗어놓은 제복 겉옷을 주워 든 아나샤는 그 속에서 주섬주섬 반지함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고백하려고 했는데……. 흠흠.”
부끄러움에 목을 한번 가다듬고서 아나샤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반지함을 열어 그에게 내밀며 놀란 듯한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제 하나뿐인 남편이 되어줄래요? 리히.”
그렇게 말한 아나샤는 제법 비장한 얼굴이었다.
“제가 비록 신분도 낮고 가진 건 없지만, 리히랑 아기만큼은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요.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요!”
포부가 느껴지는 당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해 있는 중이었다. 아나샤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샤.”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아나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했던 대답과는 다른 대답에 멍하니 눈을 깜빡거릴 때였다.
“행복하게 만드는 건 제가 할 테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지함을 든 작은 손을 그러쥐며 리히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분홍빛이 도는 손가락 끝마다 하나하나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제게 청혼하기 위해 반지함을 꼭 쥐고 있는 손가락들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이다.
“…그저 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직이 속삭이듯이 말한 리히르트는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손가락 안쪽을 따라 연신 입술을 누르던 그가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이젠 그대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아샤.”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던 하루하루가 그녀를 만난 이후로 달라졌다. 함께 있는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고,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달콤하고 즐겁게 느껴진다.
그녀가 이런 소중한 감정들을 알려주었기에 제 삶이 비로소 삶다워진 것이리라. 리히르트는 아나샤와 눈을 맞춘 채 그대로 긴 눈매를 휘어 웃었다.
분명 흙투성이에 산발일 텐데도 아름답기만 한 미소에 아나샤는 연하게 볼을 붉혔다. 새삼 리히의 미모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낯간지러운 기분에 더 부끄러워진 그녀는 괜히 툴툴거렸다.
“…이건 반칙이에요. 청혼한 사람은 전데 리히가 저한테 청혼하는 거 같잖아요. 제 고백보다 멋진 대답은 무효예요.”
그 작은 툴툴거림에 리히르트는 더욱 웃음을 짙게 그렸다. 입가의 상처는 아프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미안합니다, 아샤. 제게 다시 한번 대답할 기회를 주겠습니까?”
“좋아요. 리히니까 특별히 한 번만 봐줄게요. 그럼 다시, 제 하나뿐인 남편이 되어줄래요?”
“당연히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될 준비는 됐구요?”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제 장단에 맞춰주는 그가 귀여워서 아나샤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으나, 아나샤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제 남편이 된 걸 축하해요, 리히.”
그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는 뒤늦게 도착해 문밖에 서있던 삼촌들의 귀에도 고스란히 흘러들어 왔다.
책임지지 않겠다고 하면 곧바로 방에 쳐들어가 기사단장을 베어버릴 생각이던 그들은 일제히 검 손잡이에서 손을 내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아샤가 무척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눈에 흙이 들어와도 인정하고 싶지 않던 그들이었으나, 그들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썩을 놈의 곁만큼 아샤가 행복한 곳도 없다는 것을.
* * *
“달러스에 이어서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에르디온은 테이블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고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리히르트를 바라보았다.
“내부 상황에 대한 보고와 작전 계획서를 먼저 올리기로 하지 않았나. 전부 무시하고 기사들을 이끌고 무작정 쳐들어갈 줄이야.”
한숨을 내쉰 에르디온은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더욱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달러스 영지에서 작전 총책임자인 제2기사단 단장의 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인 사건은 유명했다. 다행히도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 크게 뒷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하마터면 황실 기사단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남길 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어제 벌어진 사건 또한 같았다. 신중을 기울여야 할 기밀 작전이었으나, 그는 작전도 세우지 않은 채 기사들을 이끌고 베렌 상단에 쳐들어갔다.
첩자가 따로 증거를 빼두지 않았다면 아무리 웨일그레슬 공작이라 해도 이 여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다.
“그래.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질 건지 들어보고 싶군.”
“단장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에르디온은 짚고 있는 이마 위로 주름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내리고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눈앞의 백금발 사내를 응시했다.
“허가해 주신다면 바로 단장직에서 물러나 공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내가 왜 자네를 수도로 불러들였는지 그새 잊은 건가? 명예욕이 없다고는 느꼈지만 기사단장직을 이렇게 가볍게 포기할 줄이야.”
표정 변화가 없는 모습이 이토록 답답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면서 공작령에 박혀 지내던 사내를 수도로 불러들였더니,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되돌아가겠다고 하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지금의 재력과 권력에 너무 안주하는 것 같군. 자네가 기사로서의 명예를 내려놓은 이상, 공작 가문도 언젠간 쇠퇴의 길을 걷겠지.”
“기사로서의 명예와 공은 모두 제 아내가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 담담한 대답에 에르디온은 그제야 그가 단장직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내로 맞은 여인이 누군지 끝까지 대답하진 않았으나, 에르디온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인지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달러스 영지에서의 작전이 끝난 후 내내 공작저에 칩거하던 그가 기사단의 첩자를 간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였다.
그토록 조급하게 달러스로 향했던 이유가 첩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에르디온은 아나샤라는 여인에 대해 조사했었다.
그리고 숨은 활약들을 낱낱이 알게 되어 그녀에게 정식 기사 작위를 내린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좋은 일을 했다고 여겼으나, 현재에 이르러선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하기 그지없었다.
“영지에 내려가 점잖은 부인들처럼 내조라도 할 생각인가 보군그래. 하하…….”
이런 날이 올 줄은 예상이나 했을까. 그 냉철하다고 알려진 웨일그레슬 공작이 사랑에 빠져 이토록 얼간이 같은 선택을 할 줄은.
“그동안 자네를 높이 평가했는데 실망이 커.”
우스운 듯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던 에르디온은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정말 내려놓을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나가게. 붙잡지는 않지.”
그 말이 끝난 직후 리히르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감정이 없는 얼굴로 묵례를 한 뒤 몸을 돌렸다.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걸 분명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야. 리히르트.”
“평생 후회하는 일 없습니다.”
정중히 대답한 리히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저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나샤를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황실 제5기사단 본관 홀 안에는 기사들이 모여있었다.
기사단장 리히르트가 공식적으로 퇴임하는 날이었다. 역사상 부임 기간이 제일 짧은 기사단장으로 남게 될 그였지만, 기사들 중 누구도 그의 퇴임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다름 아닌 아나샤를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중앙 계단 위에서 오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아나샤가 걸어 내려왔다. 기사의 상징인 금수가 놓인 새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옆에 선 리히르트의 손을 붙잡고 내려오는 동안 아나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은퇴하는 할아버지를 붙잡았던 이곳에서 삼촌들과 작별 인사를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아나샤는 리히르트의 퇴임과 동시에 공작령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안정을 취할 겸, 수도 귀족들의 관심을 피할 겸 공작령에서 한적하게 지내다 올 생각이었다.
아나샤는 수많은 눈들 앞에 섰다. 동료들과 삼촌들의 친근하고도 따스한 눈들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잠깐 쉬다가 올게요. 자주 편지 쓸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고요.”
머쓱하게 웃으며 아나샤는 근처에 있는 삼촌들부터 차례차례 포옹해 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편지 보내. 삼촌들이 바로 달려갈 테니까.”
“알겠어. 꼭 편지 쓸게.”
“아기 무사히 잘 낳고 몸 건강해야 된다. 알았지!”
“당연하지. 바론 삼촌도 건강해야 돼.”
꼭 철이라도 든 것처럼 차분하게 대답하는 아나샤의 모습에 그들은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짧은 다리로 연무장을 쏘다니던 모습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갑자기 어엿한 어른이 되어 떠나는 기분인 것이다.
벌써부터 시큰거리는 코를 문지르던 마브릭은 제 앞으로 다가온 아나샤를 끌어안아 주었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 아샤.”
“마브릭 삼촌…….”
“삼촌은 언제나 네 편인 거 잊지 말고.”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보이자 아나샤는 덩달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